나는 몇 년 전 우연히 안나 카레니나, 마담 보바리, 에피 브리스트를 연속으로 읽은 적이 있다

세 권 중 두 권만 읽어본 사람이라도 눈치챌 수 있을텐데, 저 책들의 공통점은 기혼 여성의 불륜을 주 소재로 다룬다는 것이다

나는 저 때 아직 감상을 꼼꼼히 남기는 습관이 없었고 워낙 평소의 기억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저 책들에 대한 생각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저런 우연이 나로서도 신기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줄을 세웠던 것은 기억하고 있는데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위에 적은 순서대로 고평가했다

하지만 저 책들 중에서 몇 년 안에 다시 읽은 책은 마지막의 에피 브리스트가 유일하다

기억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시 느끼고 싶어서였다. 읽으며 기억을 일깨울 감상이 없는데도 에피가 계속 생각이 났고 결국 다른 역본으로 찾아갔다

한편 안나 카레니나와 마담 보바리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들지만

이건 기억나지 않아서에 가깝다. 독갤을 하다 보면 거의 매일 언급되는 책들인데, 내가 분명히 읽었고 고평가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렴풋한 인상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도 다시 읽지 않았다. 아마 이 기억때문에 감상을 쓰고 또 독서 중간에 생각이 날 때마다 폰에다 메모를 남기는 습관을 억지로 만들게 된 것 같다

나는 이런 경험을 통해 예술의 완성도 혹은 대다수의 평가가 나의 취향과 괴리될 수 있고 그것이 사실은 은근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다

훌륭한 것을 접하면 왜 훌륭한 것인지 알 수 있으면 된다. 이게 왜 고평가임? 진짜 모름 이지랄만 안 하면 된다. 좋아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훌륭한 이유를 몰라도 된다. 다음으로 넘어가자. 좋아하는 게 나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