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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마르케스는 폭풍에 의해 마콘도가 휩쓸려갈 때 마콘도를 거울의 도시, 신기루의 도시로 비유한다. 바로 이 거울의 비유가 <백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소설을 하나로 요약한다. 결국 부엔디아 가문을 둘러싼 100년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거울이나 신기루에 다름없다는 것이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부터, 돼지 꼬리가 달린 아기를 낳게 되는 아우렐리아노까지, 약 백년 동안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그 인물들이 괴짜든, 영웅이든, 창녀든,, 한량이든 혹은 그들을 둘러싼 서사들이 사랑이었든, 기쁨이었든, 슬픔이었든, 폭력이었든, 혁명이었든간에 결국 그 모든 요소들 각각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인 셈이었고, 그 거울은 결과적으로 언제나 고독이라는 형상을 비추는 거울인 셈이었던 것이다. 마르케스는 마콘도라는 땅 위에서 펼쳐지는 이 거대한 한줌의 연대기를 경이로운 상상력으로 그려낸다. 미래와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비추고, 예언과 현실이 서로를 비추는 소설의 서사와 마찬가지로, 환상과 실재가 서로를 비추는 소설의 묘사 방식 또한 거울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마콘도를 ‘거울의 도시’이자 고독이라는 ‘신기루의 도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정치적 맥락에 전무한 독자로서, 나는 마르케스의 이야기를 그저 환상과 사실이 상호적으로 침투하는 그물망으로 여겼다. 물론 그 그물망은 너무나 촘촘하게 구성되어서, 이야기의 모든 요소들은 각각 제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완수한다. <백년 동안의 고독>이 위대한 이유는 그 이야기의 요소들이 하나의 완결된 결말을 기준으로 수직 배열되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야기의 요소들은 수평적으로 서로에게 침투한다. 백년의 역사는 멜키아데스의 예언과, 우르슬라의 불길한 예감에서 시작하여 전쟁과 학살과 홍수를 경유한다. 부엔디아 가문에 대한 태초의 신화와 에언은 마콘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의해 분열을 겪는다. 그러나 분열 속에서도 분명히 되풀이 되어왔던 태초의 신화는 결국 마콘도의 종말에 이르러서 다시 봉합된다. 그러므로 근친상간이라는 이 기묘한 이야기의 결말은 태초의 예언과 맞닿아 있다.
우르슬라가 말년에 장님이 되어 비로소 깨달았듯이, 부엔디아 가문에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다. 태초부터 부엔디아 가문은 고독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수많은 망각과 열정과 착각들이 백년 동안 지속된 후에, 이 가문에서 최후이자, 유일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근친상간의 결과는 멜키아데스의 양피지에 적혀있었던 우스꽝스러운 돼지 꼬리가 달린 아기로 나타난다. 이 아이러니한 비극은 영원한 고독의 상징이다. 한편으로 마콘도와 부엔디아 가문의 고독은 라틴 아메리카와 그곳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축소판인 셈이자 본질인 셈이다.
이 글에서 요약하기 벅찬, 수많은 등장 인물들에 대한 사건들은 모두 태초의 예언을 원형으로서 간직하고 있다. 결국 일종의 비극이라고 할 만한 부엔디아 가문과 마콘도의 서사는 되풀이되는 고독의 역사를 간직한 채, 폭풍에 의해 휩쓸려 날아간다. 돼지꼬리가 달린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는 태초의 예언과 그것의 실현. 예언과 결말이 맞물리는 그 순간, 독자는 실은 그 결말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모든 순간에서부터 되풀이 되어왔음을 깨닫는다 .그것이 이 소설을 경이롭다고 느끼게 하는 이유다. 즉<백년 동안의 고독>은 한 인간의 상상력이 예술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이토록 치밀하게 종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마르케스는 그저 이야기의 힘으로, 그리고 마술적인 서술의 힘으로 저 모든 미학적 성취를 일구어낸다. 내게는 그것이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전제한 채 세계를 그려내는 소설보다 더욱 위대하게 다가온다. 백년 동안의 고독이 정치 소설이자 역사 소설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내 짧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사실이 이 소설이 가진 위대한 힘을 빼앗을 수 없는 것 같다. 심지어 나는 실제 마르케스의 의도를 차치해서라도, 이 이야기를 일종의 현상학적 서술이라고 믿고 싶다. 무엇보다 인간과 역사와 신화가 한데 뒤섞인 환상적인 이야기로서 말이다.


실로 마르케스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묘사 방식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에서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독자에게 요구하고 있는가? 또한 그 상상력 앞에서 독자는 소설에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구호가 얼마나 무력한지 깨닫게 되지 않는가? 나는 그러한 묘사가 이 비극적인 가문에 대한 현상학적 서술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백년 동안의 고독>은 소설이 할 수 있는 ‘본질’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 심원한 접근 방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고 난 뒤에,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소설이 전제하는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실재는 정말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소설가의 세계가 그런 식으로 구성된다고 믿고 싶다. 밀란 쿤데라가 말했듯이, 그리고 에르만 블로흐가 말했듯이 소설은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내야만 한다면, <백년 동안의 고독>은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것’을 가장 탁월하게 성취해 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