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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는 그동안 만난 소설 속 인물들 중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사람이다. '역마살'이라는 단어가 생명을 얻어 돌아다닌다면 크눌프가 되지 않을까? 방랑하는 예술가지만, 시공을 초월할만한 재능은 없다. 크눌프의 자유로운 모습이 사람들에게 감흥을 주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당장의 삶을 포기하고 그를 따르지는 않는다. 크눌프는 자의로 방랑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방랑벽을 슬퍼한다. 크눌프를 동경하는 사람은 있어도 크눌프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으며 크눌프도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크눌프에게 부정적이었다. 목적이 없는 크눌프의 인생에서 무엇을 얻을지 갈피를 못 잡았다. 얼핏 보면 크눌프는 감성적으로 산다. 여자를 꼬시기도 하고, 고향에서 추억을 곱씹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활동들 뒤에 무엇이 남는가 의구심이 든 것이다. 이런 활동들로 크눌프가 마냥 즐거움을 느낀다면 옹호할 수 있겠지만, 크눌프는 늘 활동 뒤에 고독을 느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다른 사람의 영혼과 섞을 수는 없지." 결국 좋아하는 대상과 동화할 수 없는 자신의 영혼을 한탄하며 또다시 방랑의 길을 택하는 것이다.
크눌프에 대한 생각은 최종장에서 바뀌었다. 크눌프는 죽기 직전 하느님과 마주한다. 크눌프는 자신에게 방랑벽을 선사한 하느님을 원망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크눌프에게 방랑의 의미를 일깨운다. 방랑하는 인생 자체는 고달팠을지 모르지만, 방랑하며 순간순간 겪은 일들로 행복했다는 것이다. 행복한 부분들로 가득 채운 인생을 두고 전체적으로 불행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즐거웠던 순간들이 있다면, 즐겁지 않은 인생이라 부를 수 없다.
크눌프에게 정착이라는 선택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착하지 않았기에 크눌프의 인생이 있었다. 크눌프의 인생은 크눌프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었고, 크눌프의 인생은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즐거움을 주는 일이 크눌프의 즐거움이자, 크눌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밖에는 달리 사용할 수가 없었노라. 나의 이름으로 너는 방랑하였고, 정착해 사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자유에로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주었노라. 너는 나의 이름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하고,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였노라.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이 네 속에서 웃음거리가 된 것이고, 또 내 자신이 네 속에서 사랑을 받은 것이다. 너는 바로 나의 자식이요, 나의 형제이며, 나의 분신이었노라. 그래서 네가 맛보고 겪었던 모든 괴로움에는 내가 너와 함께 체험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느니라."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크눌프를 보는 시선이 크게 달라졌다. 나는 인생의 가치를 오직 소유주로부터만 찾았다. 하지만 내 삶의 의미가 꼭 내 안에만 있어야 할까? 나는 남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 영향은 남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남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나만의 느낌과 생각을 빚는다. 나 또한 남에게 그런 존재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 영향을 교환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영향이라는 작용으로 얽혀 우리는 한 몸인데, 나의 삶을 나의 성취로만 평가해야 할까? 내 본성이 내게 유익하지 않더라도 내 본분을 다해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사가 잘 된 셈이다.
「크눌프」는 이렇게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다. 덕분에 내 인생에 만족하는 새로운 방식을 배웠다. 나는 아직 이루고 싶은 바가 많기 때문에 여전히 성취가 인생을 평가하는 주요한 기준이겠지만, 이제 나 자신만 바라보며 조바심을 내지는 말아야겠다. 물론 노력으로 구체적인 무언가를 해내면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노력하는 과정에서 순간순간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남에게 좋은 울림을 줄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다고 믿어 보련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