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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슬픔, 어렵고 쉬움, 기품과 쾌활함, 정념에 대한 감각과 고뇌, 또는 우울함, 또는 천박함 간혹 천연덕스러움 등등. 삶은 이런 단어들과 그 밖에 많은 단어를 더한 만큼 풍성하고,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언어 바깥의 세계를 더한 만큼 방대하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어휘들을 구구절절 나열한다고 그것이 삶이 되지는 않으리라. 삶은 그 자체의 리듬을 가진 채 조화롭게 인식될 뿐이다. 그리고 지난한 일상 속에서 그 인식의 선은 그저 엉켜있다. 괴테는 그 얇은 인식의 선 하나를 잘 풀어내어 풍성한 단어들로 엮어낸다. 밧줄처럼 단단한고 유연하게 엮인 그의 작품을 통해, 엉켜있던 인식의 선이 풀려나와 팽팽하게 당겨진다. 밧줄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실.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작품 전체를 지탱하는 그 얇은 인식의 선 하나는 무엇일까?


괴테는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은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작품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은 모두 괴테의 경험들이다. 옛사랑과의 운명적 결합, 저택과 정원에 대한 애정, 고귀함과 그렇지 못한 성품을 향한 태도, 타인과의 정서적, 사회적 교류, 관습과 혁신의 가치, 새로운 사랑의 출현, 이끌림, 멀어짐, 충돌, 갈등, 예술과 공간에 대한 정념과 관념, 애틋함, 과거와는 달라진 자기만의 어떤 느낌들. 크고 작은 사실들. 인간에 대한 관찰, 사물에 대한 관찰, 사건과 인과에 대한 관찰, 삶의 패턴에 대한 관찰. 인식의 선을 중심으로 밧줄을 엮어내는 주변부의 실들이 바로 이러한 경험과 관찰들이다. 이 경험들을 하나의 밧줄로 엮어 주는 중심선은 대체 뭘까?

 

괴테는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은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는 말 뒤에, 단 한 줄도 자기가 겪은 그대로 쓰지도 않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괴테의 말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 굳이 겪은 그대로를 쓰지 않았을까? 이야기를 경험들이 재구성된 하나의 세계라고 본다면,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인식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서로 다른 그 경험들을 하나의 세계로 볼 수 있었는가?”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부분의 합보다 큰 전체를 만들 수 있었느냐? 는 물음이다. 분투하는 자에게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라기 보다 어떻게이다.

 

<선택적 친화력>에서 괴테는 시종일관 정념과 의지의 상관관계를 그려낸다. 곧 정념이 의지를 형성하고, 의지가 행동을, 행동이 사건을, 사건은 충돌을 만들고, 충돌은 존재를 결합하거나 갈라놓는다. 그리하여 모험과 로맨스, 희극과 비극이 생겨난다. 장르적으로 귀결된 세계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은 변화를 겪는다. <선택적 친화력>의 주인공들은 세계를 이전과는 다르게 보게 된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지만, 이제 전체적으로 낯설게 보이는 광경을 보며 오틸리에는 기뻐해 마지않았다.”

 

바로 이 점. 변화한다는 사실. 세계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식이 변한다는 사실이 이야기를 이야기되게 한다. 경험에서 우러난 정념은 인식을 바꾼다. 어린 시절 죽일 듯이 싸우던 소꿉친구와 헤어진 후, 건장한 청년과 다정다감한 신부로 재회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그들이 그렇게 바뀌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감정이 달라졌음을 깨닫는 데에 있다. 재회를 통해 정념이 싹트고, 의지가 충돌과 결합을 만들어내며 이야기를 이끈다. G.K. 체스터턴이 <정통>에서 썻듯이,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이유는 그 속에 너무나 강한 의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경험이 변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야기를 이야기하며, 한편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괴테가 작품 말미에 써놓았듯이, “결국 이야기란 것은 대체로 실제 일어났던 일이지만, 있었던 일 그대로 전해지는 경우는 결코 없는 것이다.” 경험을 재구성하는 것이 부분의 합에 머문다면, 인식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전체인 무언가의 씨앗인 것이다. 부분과 전체는 서로를 보완한다. 인식의 변화 없이 경험은 재구성되지 않고, 경험의 재구성 없이 인식은 변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그 순환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택적 친화력>은 괴테의 경험들이 녹아있는 하나의 세계이자, 경험이 달라지는 모습을 그려낸 그림이며, 화학적 상호작용이라는 비유를 통해, 인간의 정념과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곧 그의 개인적 경험이 보편적 공감으로 이어짐으로써, <선택적 친화력>은 작가와 독자들, 독자와 독자를 묶어주는 수단이 된다. 사회를 묶어주는 것은 거대 담론이 아니라, 보편할 수 있는 1인칭 시야의 경험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두고 인간사의 본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경험했고, 무엇을 느꼈으며, 무엇을 원했는가?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진리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 뿐이리라. 그래서 의지를 실현한 끝에 이들도 서로를, 세상을, 또 자신을 이전과는 다르게 보게 되지 않았는가? 결국 보게 된 것이 비극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