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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에 주로 제기되는 좌익적 비판은 그것이 특정한 사회적 상황을 초역사화하여 판단하는 비관주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검토로 글을 시작해보자. 특히 “동일성 사유”라는 개념에 그러한 혐의가 제기되는데, 이 개념이 동일성 사유를 초역사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아도르노에게 동일성 사유는 초역사적인 개념이 아니며, 후술할 교환원리라는 명백히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토대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아도르노가 “동일성”에 기반하지 않은 사고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동일성 사유란 개념으로 겨냥하는 것은 바로 “모든 소들이 검게 보이는” 추상적 동일성이다. 직접적으로 『계몽의 변증법』을 살펴보자.

서문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 책의 핵심 부분인 「계몽의 개념」 장을 이렇게 요약한다: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신화는 무엇이고 계몽은 무엇인가? 전자는 “특수한 대표 가능성”을 중심으로 하고 후자는 “보편적인 대체 가능성”을 중심으로 한다. 제물로 바쳐질 암사슴은 딸을 대신하여 희생되고, 실험용 토끼는 토끼의 “단순한 견본”으로서 희생된다. 이러한 대리, 즉 추상을 통한 동일화가 신화=계몽이다. (물론 이 둘이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다뤄지지는 않는데, 신화에서 희생될 제물은 신의 대리물이라는 “고유성”을 갖는 반면 계몽에서 실험용 토끼는 양적으로 파악된 수많은 토끼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아도르노는 단순히 동일화를 지적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교환 행위와 연결시킨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다루는 장에서 아도르노는 오디세우스의 행동양식을 계몽적 사고의 맹아를 보여주는 알레고리로 독해하는데, 그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의 행동에 깔린 기작은 “교환의 한 방식으로서의 책략”이다. 이는 “자기보존” 개념을 거쳐 연결되는데, 나아가 동일시하는 행위와 교환은 불가분의 것으로 설정된다. “...’동일시’가 시민적인 정의나 상품 교환도 지배한다. (...) 시민 사회는 등가 원칙에 의해 지배된다.” 물론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 관계가 명시적으로 구체적이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그 관계는 『부정변증법』에서 조금 더 자세히 언급되는데, “인간의 노동을 평균 노동시간이라는 추상적 보편개념으로 환원시키는 교환원칙은 동일시의 원칙과 근본적으로 유사하다. 동일시의 원칙은 교환이라는 사회적 모델을 가지고 있으며, 또 동일시의 원칙 없이는 교환도 있을 수 없다. 교환을 통해서 비동일적 개별 존재나 업적들이 통분될 수 있고 동일해진다.”

여기서 두 가지 혐의가 다시 제기된다: 아도르노가 동일화 자체의 포스트모던적 폐기를 주문하고 있다거나, 동일성 사유라는 관념적인 요소를 교환 행위라는 물질적인 요소보다 선차적인 것으로 놓고 있다는 혐의 말이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또한 “그러나 이 원칙이 추상적으로 부정될 경우, 그리하여 환원될 수 없는 질적인 것을 더욱 존중하기 위해 이제는 등가관계에 따라 일이 진행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이상으로 표명될 경우… …일종의 약속으로서 교환원칙에 내재하는 합리성 대신 직접적 점유나 폭력, 혹은 오늘날처럼 독점기업들과 도당들의 적나라한 특권이 등장할 것”이라고 적으면서, “살아 있는 노동 가운데 일부도 빼앗는 일이 없게 된” “합리적 동일성”을 주문한다. 교환원칙을 폐지하는 것은 또한 노동이 생산하는 가치가 그와 다른 양의 가치, 즉 노동력의 교환가치와 교환되는 것을 폐지함으로써 같은 것을 서로 교환하라는 교환원칙의 요구를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둘째 혐의에 대해서는, 애초에 아도르노에게 사회는 주체에 선행하며 – 이에 대해 한 강의록에서 그는 헤겔 법철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까지 한다 – 그러한 추상적 동일화는 사회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행위이며, 사실상 교환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사회학에 대한 아도르노의 강의록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노동시간에서는, 즉 평균적 사회적 노동시간에 따라 이루어지는 교환에서는 서로 교환되는 대상들에 들어 있는 특별한 형태가 필연적으로 제외됩니다. 교환되는 대상들은 그 대신에 일반적인 단위로 환원되고 맙니다. (...) 사회 자체에 일반화가 들어 있다는 점에 여러분이 주목해 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이러한 일반화 진행 과정이 개별적으로 교환에 참가하는 주체들 내부에서 매번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일반화를 이해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화폐의 형식과 같은 그러한 형식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동일성 사고는 추상노동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제적 사회에서 사회의 실제적 유지를 위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가상일 수 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아예 “사회, 조직화된 사회는… …교환에 의해 규정되는 연관관계”라고 말하기까지 하는 아도르노가 과도하게 유통영역에 집착함으로써 생산영역을 무시했다는 혐의를 제기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에 투하된 가치에 의해 직접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상품을 생산하는 것에 필요한 사회적 평균노동시간, 즉 추상화된 노동시간으로 정해지며, 그것의 표현과 실현은 화폐를 이용하는 교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측면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최종적으로 아도르노가 “동일성 사유”라는 아도르노 자신의 핵심 개념을 다소 다의적으로 쓰고 있다는 혐의를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훈고학이나 문헌학을 할 것이 아닌 이상, 전통적 마르크스주의가 대중에게서 그 설득력을 잃고 또 포스트모던한 기획들이 사실상 좌초된 현 상황에서, 아도르노의 모델은 오늘 날 대안으로 모색될 가치가 있다.

변증법적 탈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