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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로 낸 서평문 올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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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마음』의 극초반부에는 작품의 구도와 주제를 압축하여 나타내는 문단이 하나 존재하는데, 이는 전체를 인용하여 길게 분석할 가치가 있다.
“내가 그 찻집에서 선생님을 봤을 때 선생님은 마침 옷을 벗고 바다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나는 선생님과 반대로 젖은 몸에 바람을 맞으며 물에서 나온 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시야를 가릴 만큼 많은 까만 머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나는 선생님을 못 보고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해변이 혼잡했고, 그만큼 내 머리가 산만했는데도 내가 바로 선생님을 발견한 것은 선생님이 한 서양인과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두 문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암묵적으로 화자와 선생의 상징적 대립이 설정된다. 그러나 어떠한 대립인가? 다음 문장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는 시야를 가릴 만큼 많은 까만 머리들”란 표현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화자와 선생의 구체적 내용은 여전히 결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두 사람 사이”의 제3자인 “까만 머리”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세인(世人)을 말하지만, 이 제3자 역시 그 구체적 내용은 여전히 미정립되어있다. 또한 그 제3자성 역시 제대로 확립된 것은 아니다. 뒤이어 해변의 사람들과 선생은 구분되어 인식된다. 다른 사람들과 화자는 해변의 오직 선생을 인식했다는 것으로 구분될 뿐이다. 화자에 대해 사람들이 제3자로 정립되는 것은 타자인 선생을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생을 해변의 인파에 대해 대립시킴으로써 선생이 함의하는 바를 정립하는가? 어떠한 함축의미가 “선생님”이라는 기표에 귀속되고 또 그것을 관통하는가? 자연스러운 생략을 통해 유예되던 것, 즉 화자는 어떻게 그 인파에서 선생을 알아보았는가, 이것은 문단의 최후에 서양인이 언급됨으로써 답해지고, 그 의미가 완결되어 결정된다. 여기서 “서양인”은, 모든 상징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또 고정하는 일종의 중심점이 되며, 그 내용은 “까만 머리”와 상징적으로 대립한다. 화자에게는 그저 하얀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의 시각적인 대립이지만, 소설의 층위에서는 상징적인 대립이다. 물론 이 알레고리는 더 보충되지 않고 일단 여기서 끝나지만, 작품 전체의 맥락이나 소세키 작품들의 특징을 고려해본다면, 이 서양인이 상징하는 바는 소세키의 메이지 일본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근대문명이다. 해변의 “까만 머리”는 그와 반대로 메이지 유신 이전의 전근대인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구도에서 선생이 즉자적으로 서양인과 같이 근대문명으로 정립되는 것은 아니다. 선생은, 그저 서양인을 통해서 백사장의 사람들과 다르게 정립될 뿐이다. 즉 그는 중간자이다. 이것은 물론, 영국 유학파인 소세키가 자신과 같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가교를 담당하던 계층에 대해 사용한 메타포이다. 그리고 화자는 그러한 선생을 인식하지만, 화자 자신도 선생처럼 구분이 되는지는 여전히 미결정의 상태이다. 이는 전근대와 근대 모두를 불만스러워한 소세키의 태도를 보여준다고 하겠는데, 여기서 선생은 “근대”가 아니다. “근대화”이고, 그 근대’화’를 최전선에서 경험한 소세키 본인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명백히 선생 이후의 시대로 상징되는 화자는 아마도 “근대화”가 아닌 완벽한 “근대”인가? 그것은 불명이다. 보다시피 화자는 해변의 사람들과 제대로 대립적으로 정립되지도 않았다. 일반적인 소설이라면 아마도 작품이 전개되면서 화자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전개될 것이다. 과연 『마음』의 화자도 그리되는가? 그 정반대로, 화자의 상징적 의미는 작품이 결말을 맺을 때까지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그러한 모호함이 바로 화자가 상징하는 바이다. 소세키의 모든 작품에서 갈등은 결국 미완으로 그치듯이, 그리고 화자가 갖는 갈등 역시 갑자기 등장한 선생의 기나긴 유서로 전개가 중단된 채로 작품이 그대로 끝나듯이 화자가 상징하는 바인 근대는 모호하게 남는다. 그렇다면 작품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호함을 가지고 결말을 맺는가?
『마음』의 결말은 선생이 보낸 긴 유서로 끝난다. 화자에게는 아버지의 죽음이나 취업과 관련된 문제가 있지만, 이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조금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저 선생이 유서를 통해 자신의 죄업을 고백하고는 메이지 천황의 죽음으로 끝난 메이지 시대와 함께 자신도 자살하겠다는, 갑작스러운 전개가 있을 뿐이다. 작품은 선생의 유서를 받은 화자가 어떤 행동을 취했는가에 대해서는 단 한 글자도 묘사하지 않는다. 마치 그 이후의 일을 묘사하는 것은 금지되어있다는 듯이. 『마음』의 1부는 마치 선생과의 교류를 통해 화자가 성장해나갈 듯한 분위기를 취하고, 2부에서는 화자가 겪을 듯한 고난이 제시되지만, 마지막 부분인 3부에서 화자의 비중은 없으며, 화자 또한 “나”에서 “선생님”으로 바뀐다. 앞서 인용한, 화자가 선생을 처음 만난 순간을 묘사하는 문단에서 화자의 상징적 지위는 전술했듯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는데, 이 미정립이 결말까지 해소되지 않고서 그대로 남는 것이다.
구조상의 이런 모순을 단순히 소세키의 역량 부족으로 돌리는 것은 아무것도 낳지 못하는 비평 가라타니 고진. 『나쓰메 소세키론 집성』, 윤인로 옮김, 도서출판b, 2021, 327쪽. “물론 그것을 구성의 파탄으로 단순히 읽어버린다면 불모의 비평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에는 소세키가 (...) 피할 수 없었음이 틀림없는 내재적인 조건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니, 이를 단순히 작가의 실력 부족으로 치부하고 넘기기보다는 그러한 모순 내지 결함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끔 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따져보는 게 바람직하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소세키가 객관적으로든 소세키 본인의 자기인식에 따라서든 “중간물”이었기 때문이다.
“중간물”은 원래 주로 루쉰 연구에서 사용되는 개념으로, 짧게 말하자면 구시대의 마지막에서 신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강하게 감지하나, 그 자신은 구시대에 속한 자이기에 신시대를 완벽히 경험하지도, 또 그것에 완벽히 만족하지도 못하는, 즉 두 시대 모두에 속해있는 동시에 두 시대 모두에 속하지 않은 중간자를 말한다. 루쉰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일체의 사물이 변화하는 가운데 어쨌든 중간물이라는 것이 다소 있다고 생각한다. (...) 최초에 문장을 개혁할 때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작자가 몇몇 생기는 것은 당연하며, 그럴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있다. 그의 임무는 얼른 깨달은 다음에 새로운 목소리를 질러대는 것이다.”
자신이 중간물이라는 인식은 어찌 되었건 자기비하적인 인식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중간물 자체는 결코 새로운 것을 가져오는 주체가 될 수 없으며 그러한 주체는 이후의 세대에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광인일기」의 이 문장은 그러한 의식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4천 년 동안 수시로 사람을 잡아먹던 곳, 나도 여러 해 동안 그 속에서 함께 살아왔다는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명백히 알았다. (...) 사람을 먹어 보지 않은 아이들이 혹시 아직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자...”
이렇게 중간물은 결국 이후의 세대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런던에서 근대화의 최전선을 경험했던 소세키는 근대나 뒷 세대를 마냥 낙관할 수도 없었다. 한마디로 소세키는 불확실한 것에 희망을 걸어야 했고, 근대라는 불확실한 것이 혁신을 가져오리라고 그저 기대해야 했던 동시에 그것을 그저 기대할 수 없었다. 중간물은 자신이 속한 전근대와 자신이 바라는 근대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마음』의 결말이 그토록 갑작스러운 이유이다.
『마음』은 중간물의 모순적인 위치를 구성하는 두 대립항이, 소세키 자신의 근대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서로 맞부딪힌 채 그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지 못하고 그대로 구조에 나타난 작품이다. 소세키는 근대화에 대한 자신의 내적인 갈등을 억지로 화해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작품에 녹여내었고, 작품의 구조적 파산을 통해 역사적 중간물이라는 모순적인 위치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마음』은 실패함으로써 완성된 작품이다.
와씨 니가 쓴 글을 읽으니까 갑자기 대학생 때 이런 류의 글을 쓰던 내가 떠오르면서 그때의 나에게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외치고 싶어진다 "취업부터 해!" 하지만 난 그러질 않았지.....ㅜㅜ
아직 너나 잘해!는 안 외치고 싶나 보노ㅋㅋ
소세키의 태풍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르네: "오늘의 우리는 과거를 갖지 않은 개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린 물론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거는 망령된 과거든지, 유치한 과거입니다. 기준으로 삼고 따를 만한 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 전례 없는 사회에 태어났다는 것은 스스로 전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예요. 속박이 없는 자유를 향유하는 사람은 이미 자유를 위해 속박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이 자유를 어떻게 능숙하게 사용할까 하는 문제는 여러분의 권리이자 동시에 큰 책임입니다. 여러분! 위대한 이상을 갖지 못한 사람의 자유는 타락입니다."
... 대체로 한 시대에서 초기의 사람들은 후손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기의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산다는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후기의 사람들은 아버지를 위해 산다는 체념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왜 초기의 사람들이 선례가 될 수 없는가? 초기는 가장 무질서한 시대입니다. 우연성이 발호하는 시대입니다. 요행을 얻을 수 있던 시대입니다. 초기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 집안을 일으킨 사람들, 재물을 쌓은 사람들, 사업을 일으킨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의 역량만으로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 중기 사람들은 이런 점에서는 초기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합니다. 일을 쉽게 성취할 수 없다는 점이 행복한 것입니다.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요행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이 행복합니다.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능력에 따라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고, 발전의 길이 있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후기에 이르면 굳어져버려요. 단지 전 시대를 조술하는 것 말고는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 인간이 타락할 때 다시 파란이 일게 됩니다. 파란이 일지 않으면 화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화석이 되기 싫으면 스스로 파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과도기라는 건 어떻게 보면 초기이기도 하고 후기이기도 할 텐데... 어느 쪽이건 과도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고 중기 사람들처럼 자기자신을 위해서도 살지 못하는 채로 그저 명목상의 자유, 자유를 위한 속박상태에 머물러 있는 듯. 소세키의 시대와 지금 시대를 비교하면, 중기처럼 안정돼 보이는 시기는 잠깐이었고 여전히 과도기의 무한한 지속에 갇혀 있는 듯싶음. 현대가 더 특이한 점은 혁명도 불가능하고 어떤 정립 자체가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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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디시 잡글조차 이해할 능지가 안되는거 같은데 디시 접으란 말부터 새겨듣고 발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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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소세키는 마음 고양이 도련님만 읽었는데 소세키는 이 책들에서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느꼈음. 그런데 그 인간이 초기작인 도련님에서는 자신만의 올곧음이 있었는데 그게 후기작인 마음에서는 꺽였다고 막연하게 느꼈음. 이글을 읽으니까 그 올곧음이 뭔지 그게 어떻게 꺽였는지 좀 더 이해하게 된듯.
마음도 다시 읽고 싶다 잘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