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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이선 프롬>, <순수의 시대> 를 읽고서.
독서모임에서 <순수의 시대>가 채택 됐을 때, 왠지 모르게 이번 기회에 이선 프롬이라는 작가를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에 끌려 전작들인 <여름>과 <이선 프롬>을 함께 주문했고, 이 순서대로 읽었다.
보통 한 작가의 대표작이나 후기작을 읽고나서, 이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전작들을 찾아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작, 또는 후기작은 그 작가만의 세계가 견고해지고 사상이나 사유들이 더 심오해지고 숙성되면서 더 깊은 맛을 내는 까닭일 것이다. 그에 반해 초기작은 스스로를 시험하고, 아직은 풋풋하고, 미성숙한 느낌이 들어서 다소 아쉬운 인상이었다.
그래서 이번 만큼은 이전 작들을 읽고 대표작을 읽어보자! 라는 생각이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여름>의 줄거리.
-‘산’이라는 궁핍하고 야만적인 동네에서 태어난 채리티는 5살 때 로열이라는
변호사에게 거둬진다. 이야기의 시작점은 채리티가 18살때부터로, 로열의 부인이 죽은 지 몇 년 후의 이야기다. 채리티는 자신이 살고
있는 노스도머라는 시골동네를 싫어한다. 그 뿐만 아니라 로열을 혐오하고, 로열의 집에서 사는 것을 싫어하기에 언제든 기회만 된다면 이 곳을 탈출해 도시에서 살 거라고 꿈꾼다. (채리티가 로열을 혐오하는 까닭은, 그가 어느 순간 그녀에게 청혼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에서
하니라는 건축가가 과거의 건축양식을 조사하기 위해 노스도머에 내려온다. 그러고는 채리티가 사서로 일하는
작은 도서관에 어떤 책을 찾기 위해 방문하면서 이 둘은 마주쳤고, 몇가지 연유로 인해 채리티가 그를
안내하면서 친분을 쌓는다. 쌓여가는 친분 속에서 자연스럽게 둘은 정분이 나고,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것을 내주는 것처럼 사랑한다. 그러나 하니는
자신이 하던 일이 모두 끝매듭을 짓고, 기약없는 ‘다시 만날
것’이란 말만 하고는 도시로 떠난다.
하지만 채리티는 이미 임신을 했고, 모종의 심리적 흐름에 따라 ‘산’으로
다시 찾아간다. 그러나 그 ‘산’의 삶은 궁핍하고 보잘것이 없어서 좌절한다. 그 찰나 로얄이 채리티를
다시 데려왔고, 보호하겠노라는 약속을 듣는다. 그런 안정감을
믿으며 채리티는 자신의 운명이 이런 것인가 하면서 로얄과 결혼한다.
이 이야기에서 재밌었던 지점
1. 우선 도시남자와 시골여자의 만남에서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시남자는 입발린 소리를 하면서 여자를 꼬시고, 여자는 그 남자와 함께 도시로 떠나며 화려한
삶을 기대하는 그런 모습들 말이다.
그저 하니가 먼저 하니를 사랑하고, 하니 또한 나중에 채리티를 사랑하는 그 중간의 이야기들은 그저 자연스럽게 매력있는 남자와 여자가 같이 붙어다니면서
느낄 법한 자연스러운 감정들의 교류로 이디스 워튼은 멋지게 그려냈다.
사랑이란 본디 누군가가 나를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끌림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감정이고, 그 과정에서
성애를 나누며, 그저 사랑하는 그 순간에 집중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작가의 목소리가 덤덤하게 가슴을 울리는 지점이었다.line-break">
2. 상대적
빈곤함의 체험을 통한 내적 성장
채리티는 ‘산’에서 태어났지만 그 공간의 삶이 어떤지 몰랐다. 로얄 부부의 양녀로
가난한 시골생활만 지겹게 겪어봤을 뿐. 그렇기에 늘 도시를 동경했고 시골을 경멸했지만, ‘산’을 겪고나서는 그 시골이 선녀 같은 공간이었고 자신을 지탱한
뿌리였구나 깨닫는 지점에서 역시 인간은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해봐야 ‘지금이 선녀였구나’하면서 현재에 감사하는 동물이구나 싶었다.
3. 숙명론적 서사
채리티는 총 로얄에게 세 번의 청혼을 받는다. 그리고 앞의 두 번의 청혼으로 로얄을 혐오스럽고, 늙고 추악한 인간이라고 여긴다. 이런 심리기제로 인해 그녀는 나름 집에서 로얄 씨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정당성을 부여받으며, 그를 상대로 권력을 휘두른다. 그러나 하니라는 도시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는 떠나고 임신으로 아이가 남겨졌을 때, ‘산’의 경험과 자신의 무능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로얄 씨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이라 판단하고, 로얄의 마지막 청혼을 승낙한다.
이 이야기에서 가난한 시골에서 자고 나란 한명의 여인, 그 여인 뿐만 아니라 비슷한 환경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란 숙명론적 사고관을 가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지배적인 관습과 삶이란 응당 이래야하는 도덕적 규율들이 꽉 짜여진 세계에서는, 그 운명에 저항하거나 맞서 싸울만한 도구가 주어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실 낳아준 부모와 그를 둘러싼 세계에 의해 삶의 방향이 결정되고, 그 속에서 괴로워하거나 덤덤히 받아들이거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잠깐 들었다.
총평 – 우선 배경이 농촌이고, 주변에 산과 들이 많다보니 풍광묘사가 굉장히 많다. 그 풍광묘사 자체는 뛰어났지만, 개인적으로 풍광묘사를 즐기는 편은 아니기에 이런 부분들이 다소 읽기 지겨웠다. 그러나 이디스 워튼은 그 풍광보다 더 빼어난 심리묘사를 할 줄 아는 작가였다. 인물의 복잡한 내면을 단단하면서도 정교하게 풀어나가는 솜씨를 보면서 ‘우와 이런 게 소녀의 마음인가?!’하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덕분에 이야기 자체는 재밌게 읽었지만… 이야기의 결말부분이 설득력도 매우 뛰어났지만… 채리티가 능동적 인간에서 저항할 수 없는 외부의 사건과 그것들의 힘에 의해 굴복하며 수동적인 인간으로 변모하는 것이 다소 아쉬웠달까.
그 아쉬움으로 점수는 3.5/5
2.<이선 프롬>
이 이야기는 매우 짧은 이야기다. 조금
긴 중편소설정도?
구성은 액자식으로 ‘이선
프롬’이라는 인물에 대해 ‘나’는 조사를 시작하고, 이야기 중반부는 이선 프롬의 과거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하며, 마지막 부분은 다시 ‘나’가 현재의 ‘이선’의 삶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끝난다. 지나/매티
본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이선은 도시에서 공학자로 살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간병, 그리고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며
자신의 고향에서 가난한 농부로 살아간다. 그런 이선에게 어머니의 간병은 서툴고도 힘겨운 일이여서, 먼 사촌인 지나라는 6살 연상의 여인이 간병을 돕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 정도 해줬으면 결혼해서 책임을 저야지!’라는 마을의 평판에 휩쓸려 둘은 결혼한다.
어머니를 간병할 때만해도 건강했던 지나는 어머니가 막상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같은 병을 얻는다. 그러고는 일을 할 수 없다면서 친척조카인 매티(고아)를 집으로 들이며, 밥만
주고 무급으로 일을 시킨다. -그 당시 미국 시골의 농부의 삶이란 정말 가난했던 듯싶다- 그리고 이선은 매티를 사랑하게 되고, 매티는 지나에게 밉보이면 이
집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선을 밀어낸다. 하지만 결국엔 둘은 서로 좋아하면서도, 은밀한 상징 같은 것들을 통해 사랑을 나눈다. 직접적인 말과 본격적인
애정행각 없이 말이다. 그러다 지나는 매티를 점점 탐탁치 않아하고, 결국엔
매티를 집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한다. 이선은 충격을 받고, 매티를
기차역까지 바래다 준다면서 ~~ 하다가 결국 둘은 사랑을 고백하고, 서로의
사랑을 믿으며, 지금 죽자고 자살기도를 한다.
그 자살기도는 실패로 돌아가 매티는 하반신불수가 되고, 이선은 다리 한쪽을 저는 불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병치레를 하던 지나가, 누군가를 돌볼 때 오히려 에너지가 넘치고 생생해지는 모습을 보이며 둘을 돌본다. 그렇게 그들은 20년이 넘는 세월을 살고, ‘나’가 목격한 바로는 너무도 삭막하고 팍팍하여, 이들은 그저 살아있는 시체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
이 퍽퍽한 이야기는 내게 몇 가지 교훈을 주었다. 자살기도를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한다고, 어설프게 했다간 병신되서 인생이 고달파진다고. 결혼 생활이 그토록 팍팍하다면 부인에게 독약을 몰래 먹여아한다고. 그래야 진정한 사랑을 제대로 쟁취할 수 있다고. 물론 99.9% 농담이다.
이선의 빈곤함과 아내의 신경증에 기인한 무기력함. 그 무기력함에서 유일한 구원으로 느껴지는 매티에 대한 사랑. 이 두 가지의 대비가 이선의 마음을 더 좌절시키지 않았나 싶다. 원래 빛이 자리하기 전까진 자신의 삶이 얼마나 어두운지 자각하기 힘드니까. 또한 삶 속에서 구원처럼 여겨지는 어떤 희망과 탈출구로 보이는 무언가가, 결과적으로는 파멸의 원인이 되는 삶의 아이러니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그렇기에 삶에 찾아오는 어떠한 감정들에 도취할 것이 아니라, 냉정하고 엄격한 판단 하에 이성적인 결정들을 내리는 것이 올바른 삶으로 우릴 인도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물론 작가인 이디스 워튼은 그런 이야기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둘이 그저 바람나서, 외부에서 환상적인 삶을 살게 만들다가 사랑이 식어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말이다. 혹은 시대적으로나 주변의 평판을 의식해서 이런 사랑은 안돼! 하면서 이런 내용으로 짰을 지도 모르고.
어쨌든 이선과 매티가 서로 고백을 나누며 키스를 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천천히 달아오르고, 알듯말듯하게 감정을 교류하던 둘이 직접적으로 사랑을 나누고, 그 사랑에 취해 자살을 결심하고, 자살에 실패한 이선의 시선과 생각들이란… 정말 굉장해서, 이 부분 때문만이라도 이 소설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4/5)
<순수의 시대> 엘렌/아처/메이
오페라에서 아처는 엘렌을 처음 마주하게 된다. 알론스키 백작부인인 엘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을 들으며, 자신 또한 엘렌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또한 그 뒷풀이 자리에서 메이와 약혼을 발표하면서, 이 완벽하고 순수한 메이 같은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하지만 딜레당트인 아처는 엘렌과 마주하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메이같이 정돈된 사람이 가진 위선적인 모습들이 아닌, 진실한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에 흠뻑 빠지게 된다. 하지만 자신도 나름 명망있는 가문의 자제로서 품위와 체신을 지키고, 이미 약혼녀가 있는 사실로 애써 그녀에 대한 끌림을 부정한다. 그러면서 메이와의 결혼을 서두른다.(이 당시의 뉴욕 상류층 사람들은 약혼을 하고 결혼까지 2년이라는 기간을 둔다.) 아처는 그 기간을 밍곳 할머니를 통해 재촉해보는데, 그 와중에 엘렌의 이혼이 그들 가족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등의 몇가지 사실을 알려주면서, 그녀를 통해 뉴욕 상류사회의 가식적인 모습들에 회의를 가진다. 또한 그녀를 통해 배운 것들에 감동해서 그녀에 대한 사랑이 커져만 간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어디론가 떠나기를 기도하지만, 자신의 업보를 고스란히 돌려받아 결혼식이 앞당겨지며, 메이와 결국 결혼하게 된다. (1부)
그 후로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흐른다. 아처는 결국 메이와 결혼했지만,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너무 정돈되있고, 지식이나 문학을 교류한다기 보다는 사소한 관습과 인습으로 똘똘 뭉친 무언가로 느껴져 엘렌을 그리워한다. 그러다 엘렌을 만나고, 그녀와 함께 다시 떠나는 무언가를 기대하며, 계획해보지만, 메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듣고서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 후로 수십년의 시간이 흐르고, 메이는 죽고 슬하엔 삼남매가 장성했다. 돌이켜보면 그는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았지만, 너무 평탄하고 고루한 관습 그 자체로 굳어진 자신의 모습을 씁쓸해한다. 그러다가 아들과 단 둘이 프랑스여행을 떠났고, 엘렌을 마주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옛사랑을 옛사랑으로 추억하기로 결심한다.
이 소설의 초반은 지극히 어려웠다. 고유명사가 너무 많이 나오고, 그놈의 가문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가문마다 속성과 그 가문에 속한 인물들의 품평이며,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초반부를 넘겼을 때, 엘렌에게 사랑에 빠진 아처를 보면서 소설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다.
그래도 <여름>과 <이선 프롬>보다 재밌게 읽었던 점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농사에 관한 서술이나 배경묘사가 훨씬 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인물들의 심리묘사는 더욱 복잡하게 그 층위를 쌓아올리면서 기존의 단단한 심리묘사가 한층 더 깊어졌기에, 아처에게 몰입하며 끈끈하게 이야기를 따라가도록 만들었다.
-작품 자체에서 느낀 격정들에 대한 단상
-작품에 관해 사색한 점
이 작품의 제목인 <순수의 시대>는 그 당시 뉴욕 상류층의 허위와 위선들이 ‘순수’하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또한 역설적으로 그런 허위와 위선들이 거짓된 ‘순수함’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표상한다.
주인공인 아처는 이 ‘순수’에 대해 작품 막바지의 노년기를 제외하고는 내내 혐오하고, 그 순수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지만, 이미 자신 또한 순수한 인간이었기에 결국 어떤 결단이나 선택을 내리지 못하고 좌절한 채로 그 순수의 세계를 살아간 한 사내일 뿐이었다.
아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기회가 3번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순수’에 이미 흠뻑 젖어있는 인간이었기에, 그 기회에서 자신이 가장 편한 길을 선택한 가련의 사내였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 않았나 싶다.
또한 메이를 통해 살펴본 그 순수의 세계는 과연 나쁜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관습,규범,인습, 자질구레한 집안의 대소사까지. 이 모든 것이 정교하게 꽉 맞물려
있는 세계는 현대를 살아가는 나로서는 정말 숨 쉴 틈도 없게 느껴졌지만, 그런 순수함들이 우리가 소위
말하는 도덕적 인간을 만드는 한가지 방법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위선적으로나마 무언가 좋은 일을 계속
해나간다는 것은 결국 그 위선이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내가 동시대 사람이었다면 정말 끝내주는 소설이구나! 싶었을텐데, 안타깝게도 100년이 지난 뒤에 읽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나 부분들도 꽤나 많았다. 그럼에도 한 명의 인간이 어떤 한계를 지니는 이유를 그 당시의 시대상과 관습들을 통해 훌륭한 밑바탕을 만들고, 한 명의 인간이 지닌 복잡한 면들을 다양한 사건과 상황들과 그에 대한 그럴듯한 반응들을 낱낱이 그려낸 이디스 워튼의 솜씨란.. 크…
정말 끝내주는 소설이었다. <4.7/5>
<이선 프롬>, <여름>, <순수의 시대>를 통해 읽은 이디스 워튼.
두 편의 농촌소설과 한 편의 도시소설, 이
소설들의 이야기는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들이었다.
‘이선’은 지겨운 결혼생활 중에 찾아온 ‘매티’를 통해 희망과 정념을 맛보며, 그녀와의 삶을 꿈꾸지만, 자살기도의 실패와 결국 더 지긋지긋한 삶을 마주한다.
‘채리티’는 양부와 양녀라는 관계에서 하니와의 사랑을 통해 자기자신을 찾아가지만, 결국 그 사랑이 끝나고 양부와 결국 결혼한다.
‘아처’는 약혼녀보다 그녀의 사촌인 ‘엘렌’을 통해서 인간 대 인간으로, 그 둘만의 진실한 사랑을 통해 구원받고자
하지만, 여러가지 복합적인 사정으로 인해 결국 약혼녀와 결혼을 하고 쭉 살게된다.
세 이야기의 공통점은 결국 ‘순수한
사랑’의 끝이고, 이상으로 여기는 꿈꾸는 삶의 실패다.
그러나 세 이야기는 각기 다른 시간대 (비록 몇 년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에 쓰였기에 그 결말과 양상이 다소 다르고, 그 결말들이 주는 인상이
각기 달라 비교하며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이선 프롬>은 가난한 시골 농부의 비참한 생활과 맞물려 그 어떤 선택도 내릴 수 없게, 단 하나의 극단적인 선택만을 할 수 있도록 ‘이선’을 둘러싼 처지가 강요한다. 그로 인해 더욱 비극적인 삶을 살게 만들며, 이디스 워튼의 숙명론적 세계관의 끔찍함을 비춘다.
<여름>은 <이선 프롬>과 비슷한 배경을 지니지만, ‘채리티’라는 주인공을 통해 젊은 여성의 주체성을 그린다. ‘채리티’는 사랑의 대가로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열렬히 ‘하니’와 사랑을 나눌 뿐이고, 그 사랑의 대가를 기꺼이 치루겠다는 의연한 자세를 보인다. 하지만 임신 이후의 ‘채리티’의 내적 혼란과 사고방식들, 아직은 미성숙한 한 인간이 자신의 처지를 절감하게 만들면서 결국 로얄씨와 결혼하게끔 만드는 내용은 결국 돌고돌아 다시 ‘채리티’의 신세와 시대의 한계로 인한 숙명론적 인간을 조형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로얄 씨가 보여준 안정적인 모습에서 ‘채리티’는 이 삶이 나쁘진 않을 수 있다고, 그저 체념한 것이 아닌, 자신의 숙명을 담담히 마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순수의 시대> 아처는 ‘엘렌’을 통해 뉴욕의 상류층 사회의 부조리함을 배우고, 그녀와 모든 것을 포기하고는 그 둘 자신만의 사랑을 꿈꾸지만, 자신이 일러준 그 상류층만의 인식들과 관념들을 ‘엘렌’에게 알려주면서, 그 엘렌이 정작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또한 ‘메이’와의 약혼, 결혼, 임신이라는 사건들은 아처에게 자신이 속했던 ‘순수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끔 만들며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는 메이와 함께 오래 산다. 마지막 체념의 순간과 25년이 지난 후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모습은, 자기 스스로의 부끄러움과 엘렌에 대한 동경, 하지만 그 관습적이고 답답한 삶을 유지해나간 자신이 비루하지만서도 결코 나쁘지 않은 삶이라 생각하지 않았나. 엘렌과의 관계를 보물로 여기며 마지막에 엘렌을 만나지 않는 장면이 특히 인상 깊었다.
이처럼 세 소설엔 모두 숙명론적 관점이 나타나지만, 그 숙명에 대해 주인공들이 받아들이는 모습은 다소 상이하다. <이선 프롬>은 끔찍하게 여겼고, <여름>은 비극적이지만 일말의 희망을 꿈꾸었고, <순수의 시대>는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작품들의 내용을 통해 이디스 워튼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멋진 사랑을 꿈꾸고, 여러 사랑에 실패하면서
결국 사랑은 누군가를 구원해준다기 보다는, 그저 격정일 뿐이라는 말을 이 소설들을 통해 하고싶어하는
듯싶다. 또한 우리의 삶은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고, 그저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맞게 그때그때 선택하면서 어쩔 수 없는 개인의 숙명을 살아가는 것 뿐이리라는 쓸쓸한 세계가 엿보였다.
물론 그 개인의 숙명을 만들어내는 시대의 관습과 경제적 상황, 문화적 억제력 등은 부조리한 무언가로서 그녀가 통렬하게 비판하고 싶어했던 부분들을 모두 꼬집는다.
그러나 작가 본인이 자신의 삶을 체념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소설들을
쓸 수 있었을까?
작가의 쓸쓸한 마음을 이야기로 풀어낸 듯해서 그녀의 소설은 읽을
때마다 슬프고도 무거웠다.
하지만 난 다른 시대에 태어났고, 그녀와는 전혀 다른 경험으로 자라왔기에, 그녀가 보이는 숙명론을 지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녀의 세 작품을 통해서 인생을 숙명론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내면 세계가 어떤지, 심리가 어떠한지에 대해 공부한 좋은 기회였다.
-끝-
3줄평, 점수후기등으로 짤막하게 요약할 수 있었지만, 그냥 쓰다보니 이게 지금의 내 한계다 싶었음. 반박이나 좋은 이견은 댓글들 언제나 환영합니노!
최근 읽은 책에서는 이디스 워튼이 간결한 문체와 한 순간을 포착해서 담아내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글을 봤어
수명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이디스 워튼, 나쓰메 소세키, 안톤 체호프 등등 1860년대 작가는 옛날 사람같기도 하면서 현대적인 느낌도 있고 중간같아...
소세키는 담백하면서 심심한 맛이고 체호프는 강렬하다면, 이디스 워튼은 자포자기한 자의 덤덤하고 솔직한 자기고백 같았음. 주관적인 맛 판단임! (체호프랑 소세키 엄청 좋아함) - dc App
이선프롬과 순수의 시대는 완벽한 대구를 이루는 작품임. 가난한 남자가 진정한 사랑을 찾아 현실을 버리려고 했다가 짊어지게 된 굴레 VS 부유한 청년이 진정한 사랑을 포기하고 현실에 머무름으로써 나중에서야 얻게 되는 자긍심
위선적인 세상 속에서 순수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결국 어떻게 위선으로 돌아오는지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면 좀 난해하긴 하지만 "프랑스중위의여자"를 추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