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철학을 인용해서
대타자라는 개념이 굉장히 중요하게 쓰이는거 같은데
이성과 무의식의 경계를 없애고, 모든 욕망은 대타자(언어와 기호, 모든 형식을 포함)라는 형식속에서 빚어지는데
여기서 주체적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고, 타인과의 상호관계 속에서만 이뤄지는 욕망은 결국 형식과 이데올로기 안에서 형성되기에
취약하면서도 동시에 아주 중요한 이 '이데올로기'라는게 지금의 자본주의 속에서 일종의 '환상'으로 기능하고
그 환상에서 벗어나 라캉의 실재계(지젝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사이, 대타자와의 교류로 욕망이 이뤄지는 공간을 실재계라 지칭한다면)를 직시함으로, 우리-나 자신에 대해 앎으로써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인가?
여기서 유념할 점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명제는 있을 수 없으니(욕망은 외부에서 오기에) 욕망의 근원적인 구조 자체를 직시해야된다는거고?
이 시발 뭐라는건지를
대타자라는 개념이 굉장히 중요하게 쓰이는거 같은데
이성과 무의식의 경계를 없애고, 모든 욕망은 대타자(언어와 기호, 모든 형식을 포함)라는 형식속에서 빚어지는데
여기서 주체적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고, 타인과의 상호관계 속에서만 이뤄지는 욕망은 결국 형식과 이데올로기 안에서 형성되기에
취약하면서도 동시에 아주 중요한 이 '이데올로기'라는게 지금의 자본주의 속에서 일종의 '환상'으로 기능하고
그 환상에서 벗어나 라캉의 실재계(지젝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사이, 대타자와의 교류로 욕망이 이뤄지는 공간을 실재계라 지칭한다면)를 직시함으로, 우리-나 자신에 대해 앎으로써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인가?
여기서 유념할 점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명제는 있을 수 없으니(욕망은 외부에서 오기에) 욕망의 근원적인 구조 자체를 직시해야된다는거고?
이 시발 뭐라는건지를
일단은 지젝에게 환상을 통과한다는 것은 환상이 제거된 현실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의 상실을 경험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에 있어서 분석의 끝은 매우 어려운 지점인데 자기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지마라는 라캉의 격언을 끝없이 변주하면서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endtime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이 무엇인지 탐구하는것이고 그게 무엇인지는
지젝 본인도 모른다 다만 그게 시장 자본주의는 아니라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
환상을 통과해 그것이 배제된 구조를 직시하면, 우리의 현실이 환상 위에 유지되고 있기에 상실한다는 것인가요? 그리고 endtime 이라는 표현은 그 누군지는 기억이 가물한데... 자본주의를 세상의 종말이라고 표현한 일본인 그사람 얘기인가요?
아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얘기였슴다
꽤나 난해하지만 지젝이 영화나 혹은 정치적 사건들 등에서 현실은 환상에 구조지어져있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다는게 내 생각임 이 지점에서 현실 환상 실재 상징계 외상 사건 등의 개념들이 얽혀있는데 간단히 정의내리가 어렵습당 그리고 정확히 일본인 후쿠야마 였나? 그사람 이야기 맞음 지젝 본인은 자신의 철학 전체가 역사는 정말 종언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 말함 그리고 지젝의 책이 어떤 부분이 독해가 어려우면 원서로 보길추천 지젝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반복되는 문장구조로 글을 쓰는데 이해하기가 한국어번역체보다 쉬움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미디어 담론을 고민하는 입장에서 환상과 현실의 구조적 연결이 꽤나 흥미롭네요. 욕망과 환상 때문에 라캉 좀 보고 지젝도 지금 보는거라. 미디어 담론 전체와 비슷하게 결국 시장 자본주의를 배척하는데서 공통점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감삼다!
대타자=상징계 입니다
주체적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상징계 자체가 환상이고 오인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환상) 우리는 우리만의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거는 타인들 것이었죠.. (임상 정신분석에서는 1차로 부모를 뜻함)
따라서 우리는 환상을 버리지 못합니다. 환상을 버리는 순간 우리의 일부도 사라지기 때문이죠 (최대한 순화하고 제가 임의로 해석함) 그러나 인간은 환상속에서만 살 수 없기에 결국 현실에 나와서 사회에서 돈도 벌고 일도 하고 마음에 안드는 게 있어도 해야합니다 근데 그러한 사회는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죠 (가령 부장-과장-주임은 다 하는 일이 정해져잇듯, 언어 또한 이렇게 체계화되어 있죠 ㅇㅇ) 라캉은 그래서 언어를 받아들이는 건 이처럼 사회의 구조를 받아들인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상징계라고 보았죠
그래서 우리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이행하게 됩니다 즉 나만의 환상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아 세상은 내가 원하든 안하든 언어처럼 체계로 이루어져 있고 내가 세상에 나가서 살려면 이 체계를 배워야 하는 구나'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이 체계, 즉 상징계(대타자)는 동시에 우리에게 하나의 환상을 제시해줍니다. 마 너 돈 마이 벌면 나중에 건물주 되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너 이거 하면 뭐 할 수 있어.. 라고 ㅇㅇ.. 그래서 이데올로기라는 환상은 상징계와 떼어놓을 수 없고,. 우리는 그 환상을 좇아 돈도 벌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그렇게 사회의 체계 속에 자리잡게 되죠..
근데 문제는 이 환상은 결국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존재한다 한들 우리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타자가 제시하는 이데올로기를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우리 자신은 소외되게 됩니다.. ㅇㅇㅇ.. 즉 맞지 않은 옷이었던 거죠 근데 우리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데올로기에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하든 워치 않든 간에 우리는 회사에서 적응해서 돈 벌고 승진하려고 하죠.. 내가 승진을 원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ㅇㅇ..
근데 라캉은 사실 하나를 더 말했습니다. 어 이 이데올로기라는 게 결국에는 사회가 만든 거네? 그러면 사회를 더 깊이 들여다보니까, 사회 그 자체를 정당화하는, (또 그런 체계로 이루어져 있는 언어를) 그런 건 없네? 처음부터 그것 또한 환상에 불과했던 겁니다. 근데 우리는 함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환상을 공유하고 그걸 법칙으로 만들고 적응하고 우리 자신을 끼워맞추었던 거죠 ㅇㅇ.. 그래서 라캉은 이처럼 환상의 끝에서 발견하는 무, 0,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러나 그게 없거나 가정되지 않으면 상징계와 상상계가 존재할수 없는, 이 두 세계를 전제하게 하는 제3의 세계를 실재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실재계에 다다른 자, 즉 사실 우리 자신은 타자에 의존한 거였고, 사실 우리 자신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는,, 서글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직면한 자를, 라캉은 '환상을 가로질러' 프로이트가 포기한 '거세의 암초'를 넘어선, 분석의 종결에 다다른 자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후기 라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환상을 꿈꾸고, 자신의 (신체적) 충동인 증상을 주체화해야 한다(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실재계는 결국 0, 언어 밖에 있는 것이고, 이는 신체로 곧바로 표현되거나 에너지 그 자체인 충동 (성충동이든 예술충동이든 뭐든) 그 충동만이 우리에게 '진실로'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근데 이 충동의 주체화는 결국 실재계에 다다른 자만이, 자신의 모든 환상이 실은 남의 것이었다는 진실을 직면하고 버틴 자만이 가능합니다 실재계를 직시한다는 건 그런 의미죠
그런 의미에서, 성취하면 다시 허무하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야 하고, 성취하면 다시 허무하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욕망>은 상징계의 언어의 사슬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집니다.. 이거는 상징계 그 자체가 그런 체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죠.. 질문하신 분이 말씀하신 <(욕망은 외부에서 오기에) 욕망의 근원적인 구조 자체를 직시해야>는 말은 곧 상징계의 이면을 들여다본다는 거고... 욕망 자체가 실제로는 그렇게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이어지고 또 이어지지... 그걸 이룬다고 해서 실재계적인 '충동'의 만족을 완전히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겠습니다..
현실은 환상에 구조지어져있다는 주장 이게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결코 실재계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미묘하지만 이미 환상을 통해서 굴절되어서 보죠 ㅇㅇ 그래서 우리가 접한느 현실은, 이미, 상징계에 의해, 언어로 정제된 현실입니다 가령 자연을 예로 들면.. 여러가지 드는 생각들.. 그것 자체가 이미 우리가 언어를 통해서 만들어낸 환상인 셈이죠.. 실제 자연이 정말 그럴까요? 모든 자연을 접한 사람이 존쟇라 수 있을까요?
그러한 의미ㅔ서 시장 자본주의는 매우 위험합니다 시장 자본주의 등 상징계는 자신들의 세계에 결함이 있다, 즉 실제로는 구멍이, 0이, 실재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교묘히 가리고 욕망의 무한한 추구를 유도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상징계, 즉 자본주의 등 대타자에 속아야 유지되니까요 ㅇㅇ 문제는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자신들의 실재계인 충동과 증상에서 소외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ㄳㄳ 혹시라도 다른 궁금하신 사항ㅇ ㅣㅆ으면 댓글이나 라캉 정신분석 마이너 갤러리에서 설명드릴게요
와시팔 이거구나
라캉과 지젝의 차이점은 저는 라캉은 철저히 환자를 치유하기 위한 임상적 정신분석에 자신의 연구와 성과를 한계지었다면 지젝은 이 원리를 사회학이나 철학 정치학 등 세상을 정신분석하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오 완전 감사합니다. 적어주신 댓 집가서 두어번은 더 되뇌어봐야될거 같네요. 라캉 갤이 따로 있는지는 몰랐슴다. 나중에 확인래볼께요! 감삼다!
그냥 개쩝니다. 쉽고 재밌게 너무 설명잘하시네요
근데 원문 요약만으로도 충분히 요약이 되는 것 같은데 ㅎㅎㅎ
혹시 몰라서 나중에 따로 찾아보실 분들을 위해 추가 설명 붙여놓고 갈게요 모두 읽어주셔서 ㄳㄳ 대타자 - 큰 타자입니다. 라캉이 만든 단어인데 왜 큰 타자이면, 수많은 타자들이 뭉쳐서 만들어진 게 큰 타자이고 ,이게 곧 사회이며, 언어이기도 하죠 ㅇㅇ 그래서 큰 타자, 타자들이 뭉치면 대타자가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늘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죠? 이처럼 대타자는 타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외상 - 여기서는 증상 (분석 종결 후에는 생톰)입니다. 언어를 배우기 전의 아기를 떠올려보죠. 뭔가 말을 하긴 합니다. 왱왱왜우에왱에~ 근데 아무도 못 알아듣죠.. 여기는 두가지 이유가 잇습니다. 첫번째로는 아기가 자기가 뭘 원하는지를 표현할 언어를 배우지 못햇디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아이가 원하는 바를 모두 표현할 언어가 존재하지 못하기 때무닙니다. 존재할 수도 없죠. 왜냐하면 아기가 느낀 건 '언어를 배우지 않았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ㅇㅇ 그래서 아기가 나이가 들면서 언어를 배우고 표현할 수 있긴 합니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를요 ㅇㅇ 근데 결코 왱왱왜우에왱에~ 할 때 그거를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ㅇㅇ 그건 언어 밖에 있죠...
증상은 이처럼 언어와 진짜 내가 느낀 바 사이 간극에서 발생합니다. ㅇㅇ 그리고 그거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강제를 언어로 배워야 하고, 또 그렇게 상징계에 투입되어야 하는 서글픈 인간의 숙명상.. 바깥에서 오는 상처이기에 외상이라고도 할 수 있죠 ㅇㅇ..
라깡과 지젝 모두 이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고 보앗습니다. 여기서 변화는 분석 주체로 거듭날 떄, 즉 자기의 증상은 실재계에서 온 것이기에 없앨 수도 없고 없애서도 안된다는 걸 꺠달은, 서글픈 인간 주체들이 모여서, 증상을 억압하고 자본주의의 무한한 기표연쇄(욕망하고 또 욕망하게만 할 뿐 진짜 만족을 주지 않는)를 깨부수어야만 가능하다고 믿었죠. 그래서 라깡은 68혁명을 지지했고 지젝 또한 윌스트리트에 가서 시위했던 셈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혁명은 계쏙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을 통해서...
그래서 지젝의 책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증상을 즐겨라' 등 라캉적인 명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ㅇㅇ 모두 자신의 증상을 피할 수 없고 생톰화 하였을 때 가능한, 분석 종결의 순간을 의미하고 있죠 ㅇㅇ
그럼 상상계는 뭐냐, 위에서 아기가 왱왱우애에왱에 할 때 아기는, 자신의 상태가 완전하다고 느낍니다. 근데 사실 그건 아니죠.. 근데 아기는 그러한 환상을 품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안 그러면 자기 손은 어떻게 움직이고 발은 어떻게 움직이며, 자기가 똥쌀 때 먹을 때 즐거움은 어디서 오겠어요. 그래서 아기는 나름대로, 자기 몸과 바깥에서 오는 자극들을 그러모아서 그것들을 하나의 통일된, 그리고 완전한 무언가로 상상하려고 애씁니다. 이 상상을 할 수 없으면 아기는 죽어버리거나 미쳐버리겟죠... 이처럼 상상게는 몸(실재계와 실재 사물 등)에서 오는 자극들과 각종 참을 수 없는 이질감들을 어떻게든 끌어모아서 통일된 무언가를 꿈꾸는 환상입니다 ㅇㅇ.. 근데 언어를 배우면서 이 상상계는 여지없이 깨지죠.
왜냐하면 언어로 된 상징계는 결코 통일된 허상을 주지 않고, 욕망의 무한한 연쇄를 요구하거든요. 즉 통일감에서 오는 만족을 응 '통일 압수 2주일' 한 거입니다 ㅇㅇ 근데 사실 이것 또한 환상이 숨어잇습니다. 상상계와는 다르게 '욕망의 저 끝에는 분명히 만족이 있을 거야'라는 이데올로기라는 환상 말입니다 ㅇㅇ 근데 사실 둘 다 어그러져 있죠. 둘 다 인간이라면 숙명적으로 갖고 잇어야만 하지만 둘다 결국 실재계가 아닌 실재계에 대한 해석에 부과하다는 점에서 불완전합니다
왜냐하면 아기가 상상계를 구축한 원인은 실재계에 있기 때문이고 ㅇㅇ 상징계 또한 상상계에 머문 인간들이 모여서 질서와 규칙을 만들면서 이루어져있기에 결국 상징계 또한 상상계에 의존하기 때문이죠 ㅇㅇ 그러면 실재계만 딱 뗴놓고 보면 ㅇㅋ냐... 그건 아닙니다. 인간이 실재계에만 있으면 정신증 상태에 있거나 죽음 그 자체입니다. 인간은 결코 실재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거든요 ㅇㅇ 그래서 라깡은 이 세가지의 계가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한쪽이라도 풀리면 다 풀려버린다는 점에서 보로메우스의 매듭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물론 후기 라캉은 조이스의 문학들을 분석하며 제4의 고리인 생톰을 개발했으나.. 이건 굳이 모르셔도 될 거 같습니다
여튼 그래서 자아, 즉 상상계는 오인과 허상에서 비롯되었고.. 상징계 또한 그 중핵(가운데)에 만족을 줄거라는 환상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 라캉 정신분석은 상상계에 사로잡힌 인간을 상징계에 배달하기만 하면 끝날거락 ㅗ보았는데 근데 어? 이상하네 분명 치료받은 사람이 다시 증상에 사로잡히네? 새로 증상을 개발하네? 이상하다 싶은거죠 그래서 후기 라캉은 '아..증상이야말로 그 사람의 본질이다. 상징계에 종속시키기 위해 증상을 제거하는 순간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증상, 즉 언어로 해석될 수 없고 우리의 의식 너머에서 오는 그것이야말로 실재계에서 오는 우리 자신의 충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라고 전환됩니다 그래서 지젝은 이를 두고 '증상을 즐겨라'라고 표현했던 셈입니다
자 그러면 분석의 끝, 즉 프로이트가 '거세의 암초'라 표현했고, 라캉은 '환상을 가로지르다'는 게 뭐냐.. 분석 종결은 곧 이런 거죠.. "아... 나는 내 부모님이 너무도 미웠어요. 그들이 내 인생을 파괴했다고 믿었는데.. 근데 그것 또한 환상에 불과했네요;.. 내가 그렇게 믿었을 뿐이지.. 그들은 그저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랬을 뿐이고.. 내가 그들이 나를 괴롭혔다고 해석한 거에 불과하네요.. 만약 내가 다르게 해석한다면.. 지금부터 나는 다르게 살 수 있겟네요.." 가 초기라캉의 종결 지점이고
"아.. 근데 그해석도 실제로는 내가 만든 것이지, 결국 해석 또한 존재하지 않는 거네요... 결국 아무것도 없네요.. 그러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죠? 왜 나느 살아야죠 분석가님?" "그걸 왜 저에게 물으시죠?" 가 후기라캉의 종결 지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