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핵심>은 잡지에 먼저 발표되었지만, '말로우 3부작'으로서 <청춘과 두 이야기>란 제목 아래에 중단편집으로 출간되었다.
<청춘과 두 이야기>는 세 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된 책인데 <청춘>, <암흑의 핵심>, 그리고 <밧줄의 끝>을 수록하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콘래드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담겨 있고, 그 작품의 화자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단편집이기도 하다.
본래 이 단편집을 콘래드는 ‘말로우 삼부작’으로 기획했다고 한다. <청춘>과 <암흑의 핵심>을 들려주는 화자는 그 유명한 찰스 말로우인데, 본디 <밧줄의 끝> 대신 <로드 짐>을 넣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엔 단편으로 구상했던 <로드 짐>이 거대한 악몽으로 자라나면서, 콘래드는 다소 급하게 다른 이야기를 찾아야했고, <밧줄의 끝>을 단편집 출간을 위해 빠르게 써내려가서 그 빈자리를 메꾸게 된다.
<청춘>은 말로우가 처음 등장한 이야기이자, 말 그대로 청춘에 관한 짧은 단편이다. 여기에서의 말로우는 말 그대로 콘래드의 자전적인 인물이다. 이제는 중년의 말로우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청춘 시절의 자신의 항해에 대해서 들려주고, 청춘 시절의 불멸을 꿈꾸는 풋풋함과 이제는 늙어버린 자신을 대조한다. 콘래드의 장기인 바다 이야기이며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다.
<밧줄의 끝>은 다소 실망스러운데, 우선은 그 분량의 애매함에서 문제가 있다. 이 소설은 분량으로 따지면 경장편에 가깝지만, 내용을 보자면 단편이 더 어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고 있는 요소들은 단편에 어울리진 않다. 소설 자체는 한 노인의 몰락을 다루는 콘래드스러운 이야기다. <청춘>이 젊을 시절을, <암흑의 핵심>이 중장년 때를 다룬다고 했을 때 단편집의 구성을 위하여 ‘노년 시절’을 다루는 것은 균형에 맞는 선택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나쁘진 않으나 아무래도 말로우의 또 다른 이야기였으면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아쉬움이 더 앞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단편집에서 가장 중요하며 이야기해야할 것은 역시 <암흑의 핵심>일 거다.
<암흑의 핵심>/<암흑의 심장> 등 여러 가지 제목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이 중편은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여전히 너무나도 난해한 작품이다.
흔히 일컫는 콩고에서의 벨기에의 끔찍한 학살을 다루는 조지프 콘래드의 작품은 이 중편과 함께 그의 또 다른 단편 <진보의 전초기지>가 있다. 그렇지만 같은 주제와 장소, 비슷한 일을 다루지만, 그 양상은 확연히 다르다.
<진보의 전초기지>의 경우, 이 작품이 수록된 <불안의 이야기>를 다룰 때 조금 더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지만, 끔찍한 악몽을 다루는 소설이다. 전지적 관점에서 진행되는 이 몰락을 다루는 악몽은 큰 논쟁이 없어 보인다. 레오폴드의 유령은 고리타분한 소시민들마저 타락시키는 천인공노할 일이었고, 콩고에서의 모든 것은 악몽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암흑의 핵심>은 그 방향성이 조금 다른데, 이는 전적으로 찰스 말로우란 인물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말로우 덕분에 모든 것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래, 순례다. 그로 인하여 이야기는 단순한 악몽이 아닌, 여정이자 순례로 바뀐다.
<청춘>에서도 그러했지만, 찰스 말로우는 콘래드 본인의 자전적인 주인공이다. 이를 부정하긴 어려워 보인다. 그는 콘래드가 그러했던 과정을 통하여 콩고를 갔고, 콘래드처럼 ‘선원’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전적인 인물을 작가와 완벽하게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인데 콘래드 또한 말로우를 자신과 완전히 동일시하진 않는다. 이미 <청춘>에서도 그러했지만, 말로우가 배를 탄 나이는 콘래드와 다르며, 무엇보다도 말로우 본인은 콘래드와 달리 ‘영국인’이다. 어쩌면 콘래드 자신의 ‘괴리감’을 줄이고자 하는 소망일지도 모르겠다. 영어로 유창하게 글을 써도, 정작 콘래드는 여전히 러시아로부터 망명한 폴란드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편하게 말로우를 콘래드로 생각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의 국적은 영국인이지만, 여전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말로우를 ‘영국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긴 어렵다. 그는 기괴한 인물이다. 뱃사람이지만, 마냥 육체적인 노동자는 아니다. 단순하지 않고, 오히려 시종일관 냉소적이며 문학에도 조예가 깊다.
콩고 한복판으로 커츠를 찾아 떠나는 그의 여정 자체는 낯설지 않다. 말로우에겐 이미 많은 선배들이 있었다. 테이레시아스를 찾아 저승으로 내려간 오디세우스와 아이네이아스, 지옥 밑바닥으로 순례를 떠난 단테의 전례를 그도 밟고 있는지도 모른다.
콩고 원주민들과 사투를 벌이며 강을 계속 건너는 모습에서 누군가는 기사도 문학에서의 기사의 여정을 찾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면만을 보면, 누군가는 이 작품 속의 제국주의적인 요소를 비판할 지도 모르나, 다르게 여지는 충분하다. 적어도 말로우는 그들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여긴다. 이런 점을 제외하더라도 말로우는 전통적인 영웅들과는 분명 다르다.
전통적인 신화와 소설이라면, 이러한 여정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영광이다. 말로우가 기사나 조금 더 이른 시기의 소설 속 영웅이었다면, 그는 신비로운 인물을 만나 조언을 얻고, 쟁취를 했을 거다. 그러나 말로우는 그럴 수 없다. 그가 본 것은 영광이 아닌 진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실 자체는 이 소설에서 ‘생각보다’ 크게 중요하진 않다. 콘래드의 시대에선 그 자체만으로 충격적일지도 모르나, 우리에게 그 진실 자체는 익숙하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처음부터 드문드문 진실과 거짓의 괴리감은 충분히 뿌려졌으니까.
그 여정의 끝까지 함께하여 말로우와 함께 진실을 목격해도 우리는 여전히 물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체 말로우는 누구인가?
말로우와 달리, 커츠를 탐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워 보인다. 가장 노골적으로 뿌려진 밑밥으로 알 수 있는 건 커츠가 파우스트 박사란 점이다. 괴테의 구원받는 파우스트가 아니다.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지옥으로 끌려가는 파우스투스 박사다. ‘말로우’란 이름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투로 작중 한 인물이 ‘메피스토펠레스’에 비유되며 어떤 이상을 가지지만 결국 ‘암흑’에 완전히 먹혀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커츠는 충분히 훌륭한 파우스트다.
(물론 이는 너무나도 노골적인 떡밥을 입이 문 것이므로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단 넘어가보자)
그럼 말로우는 무엇인가? 이 소설이 재해석된 파우스투스의 몰락이라면, 말로우의 위치는 무엇인가? 메피스토펠레스? 그레트헨이나 헬레네? 혹은 다른 무언가? 하지만 쉽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직관적으로, 적어도 파우스투스 박사의 전설 속에서 ‘말로우’가 맡을 역은 없어 보인다. 차라리 그는 이러한 전설을 들려주는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역일지도 모른다. 콘래드의 입을 빌어서 독자들에게 전설을 이야기해주듯.
정말로 단순히 말로우는 무대 밖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그는 명백히 이야기에 참여하고, 이야기를 이끌며 동시에 들려주는 자다.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좋다, 말로우의 목적은 결국 커츠를 찾는 거다. 이게 그의 여정의 목적이다. 그리고 말로우가 커츠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점이 우리를 더욱 더 미궁 속으로 몰아넣는다.
말로우가 찾는 커츠는 악명 높지만, 막상 <암흑의 핵심>에서 커츠의 크기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데 그 문제가 있다. 정작 커츠는 거의 끝에서야 등장하며 그마저도 말로우 본인과 나눈 대화의 분량은 (아마도) 한 문단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말로우가 커츠를 보았을 때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삶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커츠가 말로우에게 중요한 존재인가?
다시 소설의 시작부분부터 생각해보자. 말로우는 시종일관 커츠에 대한 ‘소문’들을 듣는다. 커츠에 관한 목소리들을 듣는다. 처음엔 단순히 찬양 정도에 그치지만, 때때론 불화나 석연치 않은 목소리도 있고, 광신에 가까울 정도로 열광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말로우는 본질적으로 냉소적인 인간이며 이러한 목소리들 자체에 크게 감화되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환청’들을 괴롭다고 여기며 목소리들로 판단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미 말로우의 냉소를 통하여 우리는 커츠의 석연치 않음을 커츠를 만나기 전부터 느낀다. 말로우의 냉소가 판단하기에, 같은 사람들을 때리고, 착취하는 자들이 찬양하는 자를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니까.
그럼에도 말로우는 커츠를 만나게 되고, 그의 마지막 목소리, 그 유명한 ‘그 공포, 그 공포’의 속삭임을 듣곤 커츠에게 도망칠 수 없게 된다. 이 자체는 놀랍지 않은 일이다. 소설 내내 말로우는 커츠의 여러 목소리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커츠는 공허한 존재로 묘사된다. 공허하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로 채울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커츠 본인은 그걸 채우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몰락했고, 죽음을 맞이하여 육신을 잃어버린다. 마치 유령처럼 목소리만 남긴 채.
그리고 그 유령에게 말로우는 홀리고 만다. 커츠라는 공허한 존재, 텅 빈 공간에 자신을 끼워 넣고 만다. 그래서 그는 ‘공포’로부터 도망칠 수 없게 되고, 거짓 속에서 살고 있는 커츠의 약혼녀나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온전한 영국인 친구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개인 individual’은 본디 나눌 수 없음을 의미하지만, <암흑의 핵심>에서 개인은 분열된다. 아니, 콘래드의 세계에선. 분열된 자아란 그럴싸하며 평론가들이 좋아할 만한 단어로 표현해도 좋다. 그렇기에 이는 말로우의 지옥 순례이자 공포와 목소리에 홀리는 자의 악몽이 된다. 그렇기에 말로우는 자신의 대본을 들려주면서 동시에 무대 위 배역을 맡을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이 소설은 제국주의의 야만을 폭로하는 소설이면서도 동시에 한 내면의 가장 어두운 곳, 제대로 표현될 수 없기에 애매모호하며 그렇기에 우리를 괴롭히는 암흑의 핵심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콘래드는 우리에게 확실한 답을 주지 않을 거다. 아마 그 자신도 줄 수 없을 테니까.
이 작품을 둘러싸고 여러 논쟁이 있고 분명 시대의 한계도 있다.
말로우가 이야기에 앞서 언급하였던 과거 ‘문명을 가진’ 로마인들의 영국의 야만족들을 살육하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역사의 굴레라도 암시하는 걸까? 아니면 결국 영국인들도 ‘야만인’이었다는 걸 뜻할까? 혹은 커츠의 흑인 여자는 무엇을 암시하는가? 냉소적인 말로우는 야만/문명의 이분법을 받아들이는 건가, 비웃는 건가?
몇몇 부분, 대체적으로 커츠의 약혼녀와의 만남 부분은 감상적으로 늘어진다든가, 묘사의 한계, 혹은 콩고인이 보기에 느껴지는 불편함 등 이와 관련된 논쟁은 계속될 거다. 어쩌면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는 인물들, 커츠나 말로우, 혹은 이름 없는 말로우의 흑인 여자 등 너무나도 많은 의문들은 여전히 풀릴 수 없다.
그럼에도 위대하기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같은 말을 하고 싶진 않다. 어쩌면 커츠의 말이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일 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올바른 번역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우리를 미궁으로 빠뜨린다는 점에선 비슷하다)
말로우의 또 다른 목소리는 그저 우리에게 언제까지고 속삭일 뿐이다.
그 공포, 그 공포(The horror, the horror).
영화 보고 도전했다가 나가떨어진 소설이네
오 잘롭 오랜만이고
얘도 참 글 안 는다 안 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