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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볼 시간이 있었다. 어릴 때 읽었던 책이라고 한다면 당장 생각나는 것만 나열해도 칸이 모자를 텐데, 이를테면 생텍쥐페리, 톨스토이, 알퐁스 도데, 등등 너나 할 것 없이 읽어 어린이 문고의 정전으로 여겨지는 책들도 있고,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나 박사가 사랑한 수식처럼 정전으로 분류되지는 않으나 적어도 내 안에서는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책들도 있다. 그런 책들은, 그리고 그 책들을 읽었던 경험은, 어른이 된 이후에 만난 책들과는 전혀 다른 공간에 격리된 채, 내게 남아있는 순수의 편린을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다. 내게 순수란 그런 것이다.


사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순수에 좀머 씨는 없다. 심지어는 지나가다가 책장에서 본 기억조차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좀머 씨를 기억하고 있다고 하니 아무래도 내가 내린 순수의 정의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정해진듯 싶다. 다만 그럼에도 좀머 씨를 투과하는 화자의 시선에 있어서 나는 위의 책들, 그리고 위에 나열하지 않은 책들, 그리고 나열하지 않았고 기억하지도 않지만 책장 부근에서 가끔씩 되살아나는, 마치 책속의 미시즈 풍켈처럼 이따금 나타나 내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노쇠한 작품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 지극히 순수한 화자의 성장담과는 별개로 좀머 씨란 인물 자체는 매우 미스테리함에 틀림없다. 게다가 좀머 씨가 작가인 쥐스킨트와 겹쳐보인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한편으론 화자 역시 쥐스킨트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어찌 보면 기괴하기까지 한 좀머 씨의 행적과 화자의 순수한 시선이 충돌하며 작품은 아이러니에 직면한다. 화자가 나무 위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처음 경험한 것처럼, 읽는 이는 어린 날의 순수를 경험함과 동시에, 지극히 어른적인 질문. 왜? 어째서? 라는 합리적인 의문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삶에서 충돌을 겪을 때, 피츠제럴드식으로 말하면 우리를 둘러싼 삶이 순식간에 파열하는, 결정적 순간에, 우리는 순수에서 합리로, 호수 아래에서 위로, 건너가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작품은 세 네 가지 정도의 '결정적 순간'을 제시하며 우리에게 충돌을 경험시킨다. 우리도 인생에서 언젠가 겪어봤던 것 같은, 돌이켜보면 그럭저럭 괜찮았던 '사건'들이 화자의 유년을 투과할 때, 그리고 좀머 씨가 모로 보나 의문스러운 죽음을 남긴 채 우리 인생에서 사라질 때.


우리도 화자처럼, 그게 인생에 있어 중요한 장면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은 우리에게 금세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젠 날 좀 내버려 두시오!

라고


그러면 우린 다시 착착, 어른의 삶을 살아간다.

바야흐로, 이야기의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