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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도 내 독서량이 간신히 3권으로 턱걸이를 했다. 이렇게 보면 지난 달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가면 갈수록 책 읽는 속도와 독서에 쏫는 집중력이 떨어져 가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다. 2024년 절반에 이른 지금, 남은 절반 동안에는 더 열심히 독서해 볼 것을 다짐하며 지난 6월 동안 읽었던 책을 정리해 보겠다.

1. 공포의 계곡 (The Valley of 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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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맥 경감, 시야를 넓게 가지는 것은 우리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조건의 하나라네. 이런저런 생각들이 상호 작용하고, 풍부한 지식을 간접적으로라도 이용할 수 있게 될 때 대단히 흥미로운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거든."

- 공포의 계곡 中 -

1859년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태생의 의사이자 소설가인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 1915년 출간한 셜록 홈즈 시리즈의 마지막 장편 소설인 공포의 계곡을 읽어봤다. 1890년부터 출간되었던 셜록 홈즈 시리즈 중에서는 후기작으로 꼽히는데, 그래선지 시리즈의 이전 작품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내가 이 책을 집어든 계기는 거창한 이유는 아니지만 지난 달 동안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는 어려운 책들만 읽다가 기분 전환이 필요할 것 같아서 셜록 홈즈 장편 중 유일하게 읽어보지 못했던 장편을 하나 골라서 읽어보았다. 다만 나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읽게된 셜록 홈즈 시리즈인데, 원래 내 예전 거처에서는 전집 채로 쌓아놓고 생각날 때 마다 꺼내서 읽었지만 국경을 넘어서 내 본거지를 옮기게 되면서 셜록 홈즈 전집을 다 가져오지는 못했다. 다행히도 이번 기회에 예전 집에서 남은 책들을 모두 건져온 덕에 무리없이 읽어봤다.

이 책은 셜록 홈즈가 암호로 된 편지를 뚫어지게 쳐다 보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걸 보고서는 궁금해 한 왓슨이 편지의 정체를 묻자 홈즈는 범죄자들의 세계에서 황제로 암약하는 제임스 모리어티의 뒤를 밟고자 끄나풀로 심어놓은 프록이라는 자로부터 받은 편지라고 답한다. 모리어티는 대외적으로는 명망있고 인자한 천문학 교수이지만 실상은 전세계 범죄자들로부터 자문과 의뢰를 받아 조직범죄를 계획하고 암살도 감행하는 거물 범죄자였다. 이번에 받은 편지도 그에 관한 첩보를 받기 위해 책 페이지를 암시하는 내용의 암호문이었고, 곧이어 해독문도 전달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배달된 편지에는 첩보원이 신변의 위험을 느꼈다며 이전에 보낸 암호문은 잊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리 없었던 홈즈와 왓슨은 암호를 전달하기 좋을 정도로 풍부한 어휘를 담고 있고 어디에서든 구할 수 있고 칼럼이 2개로 나뉘어진 책이 어떤 거인지 추론하다가 연감이라는 확신이 섰고, 암호문에 적힌 페이지를 찾아 있는 단어를 조합하여 암호를 해독했다. 암호문의 내용은 벌스톤에 있는 더글러스라는 사람이 위험에 처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홈즈에게 자문을 구하고자 왔던 런던 경시청의 맥도날드 경감은 두 사람이 해독한 편지 내용을 보고 경악한다. 그가 자문을 부탁할 사건이 다름이 아니라 벌스톤의 옛 영주관에 자리한 저택에서 벌어진 존 더글라스 씨의 살인사건이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몹시 흥미를 느낀 홈즈와 왓슨은 경감의 제안을 수락하고 사건이 벌어진 저택으로 향한다. 사건 현장은 꽤나 참혹했는데 피해자가 머리에 소드 오프 샷건을 맞아 피살당한 바람에 얼굴은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었다. 피해자는 한 때 미국의 광산에서 일을 하다가 노다지를 캐면서 큰 돈을 벌어들인 부호이며, 최근 들어 영국으로 들어와 20세 연하의 아내를 얻고 옛 영주관에 자리한 저택을 인수하여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었다. 사건 현장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신고한 사람은 세실 제임스 바커로 더글라스와는 미국에 있었던 시절부터 막역하게 지냈던 친구였다. 그가 증언하기로는 처음엔 더글라스가 누군가에게 암살당했다고 하기엔 너무 소란스러운 샷건으로 살해됐다는 게 너무 말이 안되서 자살을 의심했지만 친구가 살해당한 방 창가 쪽에 핏자국과 함께 찍힌 발자국이 있다며 타살을 강력히 주장했다. 또 홈즈 일행은 수사를 위해 더글라스의 부인을 상대로도 심문을 벌였는데, 그녀는 기분이 가라앉은 채로 담담히 사건 당일을 증언했지만 왠지 모르게 남편의 죽음에 뼛속 깊이 통곡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렇게 기이하게 짝이 없는 사건이다 보니 홈즈 일행은 수사하는데 난항을 겪는다. 이에 골치가 아팠던 왓슨은 머리를 식히고자 영주관 근처 공원을 산책하기로 했다. 그렇게 산책하던 와중 그는 근처에서 히히덕 거리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벤치에 있던 사람들을 목격하는데, 앉아 있던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더글라스 부인과 바커였다.

본작은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를 제외한 셜록 홈즈 시리즈 장편소설이 그러하듯이 사건을 추리하는 파트인 1부와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후 범인의 과거와 사연을 담은 2부로 구성이 되어 있다. 이렇다 보니 장편에서 주인공인 왓슨과 홈즈의 비중 보다는 범인의 비중이 더 큰 편이다. 이 때문에 셜록 홈즈 시리즈 팬이나 추리소설 팬들 중에서 홈즈의 비중이 적은 편이 장편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작가인 아서 코난 도일은 성공은 셜록 홈즈 시리즈를 통해 거뒀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고 심혈을 기울였던 장르는 모험 소설이었다. 실제로도 모험 소설을 꽤나 많이 집필하여 출간했지만 잃어버린 세계(The Lost World)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상업적으로는 쪽박을 쳤다. 셜록 홈즈 시리즈 장편의 경우에는 작가가 좋아하는 모험 소설로써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보니 작가 본연의 개성이 더 확연히 드러나서 개인적으로는 단편보다는 장편을 더 좋아한다. 장편 자체가 갖춘 성격을 차치하고 단순 서사적인 재미만 따졌을 때는 추리 파트인 1부 보다는 범인의 사연 풀이가 주를 이루는 2부가 상대적으로 전개가 늘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본작은 아서 코난 도일이 작품을 이미 여러편 연재하면서 내공이 제법 쌓인 덕인지 1부 뿐만 아니라 2부도 긴장감 있게 이야기를 잘 끌고 갔다. 그 덕에 개인적으로는 이전까지 읽어봤던 장편 중에서 가장 재밌었던 작품이었던 것 같다. 예전부터도 강조했듯이 셜록 홈즈 시리즈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지만, 내용이 딱딱하지도 않고 보편적인 재미를 자랑한다. 고전은 고리타분하다는 편견을 깨주는 작품이니 만큼 기회가 된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2.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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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잊지 마렴, 벨라. 잉글랜드에서도 그렇고 스코틀랜드에서도 그렇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기 위해 교육받는 게 아니란다. 도구가 되기 위해 교육받을 뿐이지. (Never forget it, Bella. Most people in England, and Scotland too, are taught not to know it at all - are taught to be tools.)”

- 가여운 것들 中

1934년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태생의 작가이자 미술가인 앨러스데어 그레이(Alasdair Gray)가 1992년 출간한 장편소설인 가여운 것들을 영어 원서로 읽어봤다. 그레이는 글래스고 미술대학에서 공부했던 만큼 글래스고 여러 곳에서 벽화와 극장에 있는 회화를 그리는 등 화가로서 꽤나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동시에 그는 어렸을 때 책벌레였던 만큼 문학을 좋아하기도 했고 탁월한 글솜씨 또한 갖췄다. 그는 본격적으로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자기가 지닌 두가지 재능을 결합시키는데, 그는 본인이 집필한 소설에 삽화까지 직접 그려넣는다. 이렇게 수록된 삽화는 단순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묘사하는데만 그치지 않고 내러티브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으로써 기능하기도 한다. 상호보완적 성격을 띈 삽화는 작가의 개성이자 정체성으로 자리잡는다. 1981년 그레이는 장편소설 데뷔작으로 라나크(Lanark)를 출간하면서 영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좋았는데, 당대 명망있던 소설가이자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라는 걸작을 만들어낸 앤서지 버지스(Anthony Burgess)는 월터 스콧(Walter Scott) 이후 최고의 스코틀랜드인 소설가라며 그레이를 추켜 세웠다. 그 이후로도 그레이는 왕성히 작품을 집필했고, 이번에 내가 읽어본 작품 또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내가 이 책을 읽어보게 된 계기는 사소하면서도 제법 특이하다. 몇 달 전에 지인과 같이 서점으로 놀러갔던 적이 있었는데, 서점에서 가장 잘 보이는 매대에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본 작품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된 적이 있어서 영화 포스터가 표지로 된 책이었는데, 여기에 호기심이 발동해서 손에 쥐고 페이지를 쓱 훑어봤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지인이 그렇게 관심이 가는 책이면 사줄테니 한 번 읽어보라며, 흔쾌히 하나 사주었다.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본 책을 읽어보았다.

이 책은 1990년대 글래스고에서 도시 재생 계획으로 철거될 고건물 중 하나에서 마이클 도널리라는 역사학자가 서류 봉투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봉투 안에는 1800년대 후반 빅토리아 시대 때 활동했던 글래스고의 공중보건의 아치볼드 맥캔들리스가 집필한 '가여운 것들'이라는 책과 해당 책에 반박하는 내용이 담긴 빅토리아 맥캔들리스 박사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이를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꼈던 코널리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작가인 앨러스데어 그레이를 불러 책의 편집을 부탁한다. 그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책의 화자라고 볼 수 있는 아치볼드 맥캔들리스는 스코틀랜드 시골 동네에 있는 한 부농의 사생아로 태어난다. 아버지와는 거리를 둔 채 가난한 농부였던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 궁핍한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언젠가 성공하겠다는 꿈을 꿨고, 성장해서는 고향을 떠나 대도시 글래스고에 있는 의대에 입학한다. 학생으로서는 제법 괜찮은 학업성취도를 보여줬지만, 시골에서 가난하게 자란 가정환경 탓에 그는 옷도 꾀죄죄하게 입고 다니고 말에도 시골 억양이 많이 묻어난 탓에 학우들에겐 비웃음만을 사면서 따돌림을 당했다.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게 된 사람이 하나 생겼는데, 바로 고드윈 백스터라는 별난 외과의였다. 그는 뛰어난 의학적 성취로 기사 작위를 받은 천재 의사 콜린 백스터의 아들로, 어렸을 때 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그 덕에 외과의로서는 뛰어난 능력을 갖췄지만, 추한 외모를 갖추고 듣는 이의 고막을 일그러트려 놓는 끔찍한 목소리를 가진 바람에 사람들로 기피된다. 본인 또한 이를 개의치 않고 대학에도 가끔씩이나 출석하고 그 이외에는 자신만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같이 소외된 처지에 있던 두 사람은 만난지 얼마 안될때만 하더라도 서로 무심한 관계에 있었지만 이후 산책로에서도 여러번 마주치면서 친분을 트게 되고, 이후에는 막역한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드윈 백스터는 맥캔들리스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아가씨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고드윈은 맥캔들리스에게 아가씨를 '벨라 백스터'라는 이름으로 소개시켜줬다. 그녀는 쾌활하고 생글생글한 사람이었지만, 종종 과장된 몸짓을 취하고, 말하는 중에도 여러 동의어를 반복하면서 어린아이다운 구석을 보였다. 맥캔들리스는 궁금증을 느끼며 저 여자와는 어떻게 알게 됐냐고 고드윈에게 묻자, 고드윈은 돌연 얼마전 글래스고의 클라이드 강에 있는 다리에서 투신 자살한 한 여인 얘기를 꺼낸다. 그 여인의 시신은 곧 강에서 건져졌지만 왠지 몰라도 아무도 찾아가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그 시신은 경찰 부검의를 맡기도 했던 고드윈에게 인계된다. 부검을 진행하던 고드윈은 그녀가 8개월 태아를 몸속에 품고 있던 임산부였다는 점을 알아차린다. 그는 곧바로 태아를 몸속에서 꺼내는데 이 아이를 당장 어떻게 처분할지 뾰족한 수를 떠올리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자신이 이전부터 생각해왔던 기발한 실험을 실행해보기로 결심하는데, 바로 태아의 뇌를 적출하여 죽은 어머니의 머리속에 넣어 소생시키는 것이었다. 고드윈은 그 실험의 결과물이 바로 벨라 백스터라고 대답한다.

이 책의 내용은 크게 세가지 파트로 나뉘어서 진행된다. 하나는 아치볼드 맥캔들리스의 회고록, 다른 하나는 회고록 내용의 반박하는 빅토리아 맥캔들리스의 편지, 나머지 하나는 회고록과 편지에 달아놓은 작가 앨리스데어 그레이의 주석과 비평이다. 세 파트 모두에서 가장 중심점이 되는 인물은 다름아닌 신생아의 뇌가 이식된 20대 아가씨 벨라 백스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파트에서 얘기하고 있는 사실은 서로 딴판이다. 단순 내용이 다른 것을 넘어서 각자의 이야기가 진실이고 다른 이야기는 거짓이라는둥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또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치볼드 맥캔들리스의 회고록만 보더라도 화자인 맥캔들리스의 회상뿐만 아니라 또 각자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편지도 같이 끼워져 있다. 이렇다 보니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뭐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헷갈려하게 된다. 하지만 책 속에 들어있는 여러가지 이야기들 중 어떤 게 진실인지 알아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기 시작할 때 이 이야기의 진가가 발휘된다. 각자 이야기들은 화자의 주관이 많이 가미된 만큼 왜곡된 부분들이 분명히 있지만 다른 화자들이 놓쳤던 부분들을 포착해서 알려주는 내용도 있다. 또 각 이야기들은 서로가 옳다고 하고 다른 이야기는 완전히 틀리다고 주장하지만 각자 이야기를 찬찬히 뜯어보면 다른 이야기에서 나왔던 내용이 은은히 드러나는 부분도 있다. 즉 상반된 이야기들을 무작정 대립되는 이야기로만 보기보다는 퍼즐 조각처럼 짜맞춰서 볼 때, 독자들은 비로소 벨라 백스터의 일생을 다양한 시선으로 조망하면서 이야기를 보다 더 풍부하게 음미할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이 갖춘 다양성은 단순 내러티브에 그치지 않는다. 작품 내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간접적으로 드러나듯이, 본 작품은 꽤나 여러 문학 작품으로부터 레퍼런스를 얻었다. 그중 가장 많은 영감을 받은 작품은 다름 아닌 영국의 작가 메리 셸리(Mary Shelley)가 집필한 장편소설인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이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통해 인조인간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대놓고 프랑켄슈타인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걸 작품은 굳이 숨기려들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본 작품은 시간적 배경이 되는 빅토리아 시대 때 가장 유행한 고딕 소설로서의 성격을 다분히 띄고 있다. 하지만 본 작품은 프랑켄슈타인을 바탕으로한 고딕 소설에만 그치지 않고 여러 특징적 요소들도 적당히 배합하였다.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벨라 백스터가 성관념이 꽉 막혀있던 빅토리아 시절에도 불구하고 진취적인 모험을 하면서 성장해나간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적인 요소도 들어있고, 직선적인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지 않고 액자식 구성을 통해 비선형적인 내러티브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요소도 들어있고, 백인우월주의,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해서라도 인구 조절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 영국의 성직자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의 인구론, 무장 혁명이 아니라 점진적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를 이룩하고자 했던 영국의 온건좌파 페이비언 협회와 같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풍미헀던 사상과 정치단체를 묘사하는데도 지면을 할애하는 등 정치적인 요소도 작품에 산재해 있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지역색도 꽤나 많이 묻어나는데, 원서 기준으로는 bairn(영어로 baby 정도 되는 표현), wee(작다는 뜻의 단어) 등 스코틀랜드어 표현도 제법 보이는 편이다. 이렇게만 보면 각자가 너무 튀는 요소들이라 잘 어울릴까 싶기도 하지만 작가는 이를 교묘히 배합했다. 그 결과 작품이 중구난방으로 정신없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오히려 큰 줄기의 이야기 속에서 개성적인 요소들이 적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덕에 개인적으로는 단 한권의 책이 이렇게 풍성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탄하면서 읽었고, 올해 읽어본 영어 책 중에 가장 만족스러운 경험을 한 것 같았다. 한국어 번역본 중에서는 황금가지에서 출판한 번역본이 있으니 혹시라도 이 책에 관심이 생겼다면 한 번 정도 읽어볼 것을 권장한다.

3. 연애 소설 읽는 노인 (Un viejo que leía novelas de a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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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초탈의 순간에 있는 타인의 천국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지."

- 연애 소설 읽는 노인 中 -

1949년 칠레 오바예 태생의 소설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루이스 세풀베다(Luis Sepúlveda)의 장편 소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읽어봤다. 세풀베다는 소싯적부터 문학에 빠져 살았는데, 그가 가장 좋아하던 문학가는 칠레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사회주의자로 이름을 날렸던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였다. 우상의 영향을 받았는지 세풀베다 또한 칠레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을 전복시킨 아우구스티노 피노체트의 군부 독재정권 치하에서 반독재투쟁에 몸담았다. 이 때문에 그는 경찰에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고, 3년 남짓한 기간동안 투옥되었다. 국제사면위원회의 끈질긴 노력으로 석방된 작가는 이후 조국을 떠나 남미 국가 여러 곳을 방황했는데, 그 기간동안 아마존 밀림에서 오랜 시간 생활한 적이 있었다. 이때의 경험은 작가에게 자연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을 심어주었고, 이후 소설을 집필할때 아이디어의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30대에 접어들며 대서양을 건너 독일에 정착한 세풀베다는 본격적으로 작가로서 창작활동에 몰두한다. 그리고 1989년 출간한 본작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세풀베다는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이 책을 읽어보게 된 계기를 얘기하자면 나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어떤 남미 문학책이 좋은지 목록을 뒤적거리다가 이 책도 눈에 밟혔다. 환경소설이라는 점에 관심이 가긴 했지만 다른 책들에 비해 유독 관심이 간 편은 아니었다. 그러던 와중 제가 있는 곳 근처에서 이 책을 꽤나 저렴한 가격에 중고로 파는 사람이 생겼길래, 냉큼 집어와서 후루룩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은 호세 안토니오 볼리바르라는 한 노인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그는 에콰도르 고산지대에서 태어난 메스티소로 고향에서 돌로레스 엔카르나시온이라는 소꿉친구와 결혼하여 알콩달콩 살고 있었다. 하지만 두 부부는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아이를 가지지 못해서 동네사람들의 의심과 경멸을 샀고, 결국엔 이에 못이겨서 고향을 등지고 떠나게 된다. 이들의 행선지는 에콰도르 정부에서 개간할 땅을 불하해준다는 약속을 믿고 간 아마존 강가 밀림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개간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힘든 척박한 곳이었다. 볼리바르 부부와 함께 밀림을 개척하러 왔던 이주민들은 대부분 위험천만한 밀림을 떠나거나, 굶어 죽거나, 살쾡이나 보아뱀과 같은 맹수에 공격당해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두 부부도 식량과 기력이 동난 채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중, 그들에게 뜻밖에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밀림에서 터전을 이루고 있던 원주민 수아르족이었다. 이들은 서서히 죽어가던 두 부부의 처지를 동정한 나머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또 그들에게 밀림에서 생존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안타깝게도 돌로레스 엔카르나시온은 2년만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지만, 호세 안토니오 볼리바르는 꿋꿋이 살아남았고, 예전에는 생존하는데만 급급했던 밀림의 환경에 점차 적응하였다. 수아르 족과도 같이 가까이 지내며 유대감을 쌓았지만, 외지인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원주민 사회의 완전히 녹아들지는 못하였다. 이후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수아르 족 부족과도 같이 지내게 힘들게 되자 그는 원주민들을 떠나 다른 이주민들이 정착해서 살아오고 정부에서 파견한 읍장이 통치하는 부락 엘 이딜리오로 이주한다. 그렇게 수십년이 흘러 호세 안토니오 볼리바르는 70에 가까운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오래 전 사별한 아내의 초상화를 집안에 걸어놓고, 한달에 한 번씩 부락으로 진찰을 오는 치과의사가 가끔씩 전해주는 연애소설을 읽으며 소일거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평온한 삶을 이어나가던 와중, 원주민들이 부락으로 참혹하게 찢긴 한 백인 사냥꾼의 시신을 가지고 오며 노인의 일상이 깨지고 만다. 시체를 살펴본 부락의 뚱보 읍장은 다짜고짜 원주민이 저지른 살인 행각이라고 의심하며 시신을 가지고 온 원주민 일행을 범인으로 몰지만, 노인은 고인의 유류품으로 발견된 자그마한 살쾡이 가죽을 보고 시체에서 나는 오줌 냄새를 맡고는 전혀 다른 추측을 내놓는다. 그는 새끼 살쾡이의 죽음을 보고는 복수심의 휩싸여 인간 사냥에 나선 살쾡이의 소행이라고 주장한다.

본 작품에서 가장 중심이 소재는 자연입니다. 상술하였듯이 세풀베다는 조국을 떠나 남미 등지에서 망명을 다닐 때 아마존 강 유역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다. 수목이 우거지고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서식하는 환경에서 지내며 작가는 자연을 향한 애정을 키웠고, 이내 환경운동가로 활발히 활동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도 그의 환경 사랑이 유감없이 드러는다. 분명 이야기 속 아마존 밀림은 수없이 많은 생명이 죽고, 푹푹찌는 더위와 살인적인 폭우가 퍼붓는 거친 곳이지만, 다양한 생명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 숨쉬는 삶의 터전으로 그려진다. 이 책이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책임에도 자연의 위대함을 고스란히 담아내는데 딱히 부족함이 없었던 책이었다. 물론 본작은 자연을 예찬하는데만 그치는 책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아마존 강 유역 밀림에 위치한 부락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뜯어보면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민중들의 삶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작중 아마존 강 유역 밀림은 갖가지 동식물과 원주민들이 생동하는 생명의 땅이었지만 타지에서 온 메스티소 이주민들이 본격적으로 개척을 하며 환경이 파괴되고, 정부에서 파견된 공무원인 읍장은 폭정을 일삼으며 이주민들과 원주민들을 괴롭힌다. 그리고 백인들과 소위 ‘양키’라 불리는 미국인들도 가세하여 밀림의 동물들을 살육하거나 남획하고, 원주민들의 부락을 파괴한다. 한때 미지의 땅으로 존재했었지만 스페인의 침략으로 식민지 신세로 전락하고, 독립 이후에도 폭압적인 독재자가 군림하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확장으로 인해 황폐화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은유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 문단에 언급했듯이 본작이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은유했다는 점과 제법 긴 호흡을 가지고 이어지는 문장 덕에,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났던 작가는 단연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거장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였다. 하지만 두 작가의 스타일은 공통점 만큼이나 차이점도 확연한 편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경우에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선구자 중 하나로 꼽히는 사람답게 초자연적이고 몽환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는 작품을 썼지만, 세풀베다가 쓴 본 작품은 확실히 현실적이고 건조한 톤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경우에는 작품에서 등장하는 비유와 상징이 우화적이고 은유적인 편이지만, 본 작품은 확실히 직설적인 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향기가 어렴풋이 나면서도 자신만의 확실한 정체성을 갖춘 이 책은 제겐 꽤나 매력적이였고 또 만족스럽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의견을 정리하자면, 제가 이 책에 대해 설명하면서고 실제 라틴아메리카의 사례를 이러쿵저러쿵 대긴 했지만 사실 본작은 남미에 관한 배경지식이 없어도 꽤나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너무 길지 않은 분량,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흥미진진한 서사, 감질맛나는 문장에다, 간단명료하고 뚜렷한 주제의식 등 큰 어려움 없이 재밌게 읽을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는 책이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고 책에 관심이 생겼다면 한 번 정도 읽어보는 것을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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