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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공기가 습하고 뜨거워 금방 병이라도 날 것 같은 역겨운 날씨다. 시원하게 비가 내렸으면 좋으련만 하늘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먹구름이 긴장감만 드리우고 있다. 식힐 곳을 찾지 못하는 몸은 옷을 벗고 싶어 하지만 시선이 두려워 어디까지나 상상만 즐길 뿐이다. 이런 날씨의 베네치아에서 아셴바하는 죽었고, 나는 아셴바하가 죽어가는 이야기를 읽는다.


아셴바하는 예술가로서 큰 명예를 얻었다. 이룰 것은 다 이룬 셈이다. 하지만 대가 없이 이룬 것은 아니다. 아셴바하는 고결한 명성을 위해 고결한 삶을 살아야 했다. 물론 절제는 영혼을 위해 좋다. 하지만 절제는 쾌락이라는 기회비용을 낳는다. 자신을 철저히 통제한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언제고 솟아오르는 욕망을 모른 체하거나 애써 경멸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셴바하의 삶은 질서를 지키려는 의지와 유희적 흥취를 느끼려는 욕망의 줄다리기였다. 이룰 것을 다 이룬 아셴바하였기에, 밟아보지 못한 욕망의 땅이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마침 그의 피도 「토니오 크뢰거」의 토니오처럼 시민과 예술가의 피가 섞여 만들어졌으니, 아셴바하가 평생 억눌러오던 반쪽의 피가 나이가 들면서 슬슬 자제력을 이겨내고 끓어오를 때가 됐을 것이다. 죽음의 전령 헤르메스는 이렇게 새로이 눈뜰 준비가 된 아셴바하를 욕망과 죽음의 땅 베네치아로 이끈다.


헤르메스는 타치오로 현현하여 아셴바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다. 아셴바하는 타치오를 사랑하고, 자신도 그 사랑이 금단임을 안다. 아셴바하는 금기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대신에 아셴바하는 가질 수 없는 타치오를 계속 관조할 뿐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관조에 머물 뿐이었다. 나중에는 타치오를 관조하는 일이 아셴바하의 생의 의의가 된다. 타치오가 아셴바하의 의식에 스며들어, 욕망이 아셴바하의 자제력을 함락한 것이다. "용인될 수 없고, 망발과 죄악에 가깝고 우스꽝스럽지만, 그래도 신성하고 이 경우도 역시 위엄 있는 그 동경의 상투어를! '너를 사랑해!'"


해로운 공기, 그리고 콜레라의 창궐은 여행객들에게 도망가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아셴바하는 베니스에서 타치오를 관조하는 동안 삶의 의미가 변했다. 이전에 그에게 삶이란 투쟁이었다. 솟아오르는 욕망 속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본업에 근엄하게 임하는, 고급스러운 시민의 삶을 쟁취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하지만 타치오가 아셴바하의 욕망에 붙인 불은 아셴바하의 영혼의 나머지 모든 부분을 불태웠다. 이제 아셴바하는 자신을 속일 수도, 억누를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셴바하는 시민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더는 원하지 않았다. 그의 소망은 타치오를 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오랫동안 보다가 타치오가 사라지면 타치오가 없는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아셴바하는 「파이드로스」의 소크라테스에 빙의해서 자신이 근본적으로 껴안고 있던 모순을 고백한다. "우리는 여자들과 비슷한 면이 있단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열정이 곧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켜 주는 것이며 우리의 동경은 반드시 사랑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야. 그것은 우리의 즐거움인 동시에 치욕이야. 이제서야 아마도 너는 우리 시인들이 지혜로울 수도, 품위가 있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겠지? 우리가 필연적으로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서는 필연적으로 방종해지고 감정의 모험에 빠진다는 걸 알았니? 인식 그 자체가 타락의 심연인 셈이지." 이 고백을 마지막으로 아셴바하는 영혼의 인도자 헤르메스를 따라 바다 너머로, 무한한 단순함 너머로 떠난다. (바다를 보고 떠난다는 점에서 아셴바하는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토마스 부덴브로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토마스 만이 아셴바하를 통해 보여주려던 것은 (그의 여느 작품이 그렇듯이) 시민과 예술가의 대립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규칙을 충실히 이행하며 사는 시민의 삶을 동경하지만, 예술가의 본능은 정열을 일으켜 탈선을 유발한다. 아셴바하는 그 대립 속에서 시민의 역할을 오랫동안 가장했지만, 결국 숙명에 따라 삶에서 벗어나 죽음으로 향했다. 나는 이런 대립이 시민과 예술가의 관계를 넘어 일반적이라 생각한다. 공공의 선과 개인이 추구하고 싶은 가치가 늘 똑같지는 않다. 칸트의 말대로 우리에게는 스스로의 의지를 보편의 의지와 합치시킬 의무를 갖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있다. 자유 의지를 갖고 있는 한 인간은 지켜야 할 것과 지키고 싶은 것이 따로 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억누르고 보편에 부합하는 사람은 성인으로 추앙받겠지만, 최대한 행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면, 질서가 깨진 대가로 삶이 저 멀리로 달아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삶을 의지와 욕망의 소모전으로 보는 토마스 만의 관점에 동의한다. 자신을 잘 조절하는 삶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런 삶을 실제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옛말은 머리는 차갑게 하고 가슴은 뜨겁게 하라고 조언하지만, 인간이라는 미약한 존재는 자기 가슴의 열기도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아셴바하의 이야기가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아셴바하의 모델이 토마스 만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근엄한 이미지,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의 이 소설가는 실제로 동성애자였다. 그러나 토마스 만은 자신의 성향을 숨기고 살았다. 그러나 새어 나오는 정열을 억누를 수 없어서, 소설 몇 편과 비밀로 부쳐둔 일기장을 배출구로 삼았다. 토마스 만의 일기는 유언에 따라 사후 20년이 돼서야 공개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기 속에는, 아셴바하처럼 미소년을 관조하는 토마스 만 자신의 비참함이 실제로 기록돼있다. 토마스 만이 인생에 내재하는 대립을 (동성애를 중심으로) 잘 그린 것은, 그가 실제로 그 대립을 겪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구스타프 아셴바하,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부덴브로크, 그리고 토마스 만의 삶으로부터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무엇보다 삶 내내 절대 해소되지 않을 대립을 느낀다. '그래도 삶에 충실해야 한다.'라고 말하려면 평생 안고 살아야 할 응어리가 마음에 걸리고, '그래도 사랑에 충실해야 한다.'라고 말하려면 사랑의 대가로 포기해야 하는 정상적인 삶이 마음에 걸린다. 양쪽 다 취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말은 곧 아셴바하처럼 언젠가 욕망에 잡아먹히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읽고 이성과 감성을 가릴 것 없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살자는 말을 했다. 하지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사랑처럼 처음부터 금지된 사랑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명확하게 떠올리기 어렵다.


다만 나는 아셴바하와 타치오의 인연이 보다 길고 깊어질 가능성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셴바하는 관조했을 뿐이다. 물론 아셴바하가 타치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어렵다. 타치오의 가족들이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고, 어찌 보면 아셴바하의 욕심일 뿐 타치오의 마음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셴바하가, 가령 베네치아에 역병의 마수가 드리웠을 때 타치오의 가족에게 경고를 하는 식으로, 완화된 형태의 인연을 맺었다면? 그러면 타치오의 안전도 챙기고 아셴바하의 수명도 늘어났을 지도 모르겠다. 또 인연이 이어지고 깊어져 속편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셴바하가 타치오와 떨어진 채로 보내야 하는 삶에 흥미를 가졌을 지는 의문이다. 그 삶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면, 삶을 포기하기로 한 아셴바하의 결정이 가장 현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사랑은 이성과도 감성과도 다른 제3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마음대로 이성으로 재단할 수도 없고 무책임하게 감성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당사자가 아닌 한 아셴바하와 토마스 만의 속 사정을 멋대로 판단할 수 없다. 다만 그 이야기가 언젠가 내게 들이닥친다면, 즉 언젠가 내가 어떤 욕망을 깨닫고 지금까지의 삶과 앞으로의 삶을 저울질할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두려워진다. 그때가 됐을 때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책을 읽으며 지혜를 쌓아두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비다. 일단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으로부터 결론을 찾는 일은 유보하기로 한다. 대립에 관한 자신의 고뇌를 예술로 승화시킨 토마스 만에 대한 존경심만 가져가기로 하겠다.


생각이 뒤죽박죽 섞여 있어 글을 쓰는 데 오래 걸렸다. 밖은 여전히 습하지만 공기는 한결 시원해졌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지만 새벽부터 시원하게 쏟아진다고 한다. 나는 여름의 땡볕을 싫어하지만 해가 지거나 비가 내려서 드리우는 시원함은 어떤 계절의 날씨보다도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때는 목 빠지게 기다리는 동안에도 오지 않지만, 아무튼 언젠가는 온다. 마찬가지로 내 삶을 둘러싼 딜레마가 정말 많지만, 나는 이것들이 사소하게나마 해결되는 순간들을 즐긴다. 언젠가는 내 안의 보편의지와 자유의지가 대립을 멈추고 나름대로 화해의 선을 찾을 날이 오리라 믿는다.


그 방법을 찾기까지 많은 현인들의 삶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토마스 만의 평전을 읽어보아야겠다. 실존했던 아셴바하가 어떻게 삶을 극복했는지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