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강 정리 및 독후감
2강에서는 칸트의 이성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칸트의 이성에 대한 순수한 설명보다는 칸트의 이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전개된다.
칸트의 이성이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선 우리가 칸트가 형식논리학의 명제들의 규준을 전제했음을 알아야 한다. (저자는 가정이라고 말한다)
칸트는 다양한 영역의 이성개념을 말한다.
예를 들어 수학적 자연과학의 이성개념이 있고, 경험이성의 개념이 있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판단들이 있고 실천철학과 결합하고 있는 판단들이 있다.
이 다양한 영역의 차이는 상등성과 동일성의 계기에 의해 구분된다.
이 명제들(상등성과 동일성은) 이가 논리학에서 규정된 것이며, 이 논리학은 동일률과 모순률에 기초하고 있다.
동일률은 동일한 개념은 동일한 의미를 보유할 것을 말하며, 모순률은 두 모순된 판단은 오로지 하나의 판단만이 참일 수 있음을 말한다.
이성은 이러한 명제들을 결합시키는데 그 계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성 그 자신이다, 이성이란 위 명제들의 규준(kanon)이다.
이에 따라 칸트에게 있어서 이성의 방식이란 논리적-사유 그 자체이며 그 논리적 사유의 타당성은 비판 없이 이성을 위해 언제나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동일한 이성이 서로 다른 대상에 적용된 칸트에게선 여러 이성개념들이 나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의 정의는 무비판적으로 전제된 형식논리학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이 칸트가 가진 이성의 방식이다.
그리고 저자는 칸트의 이성에서 다음을 추측한다.
이는 이성이 서로 다른 유형의 대상과 자신의 가능한 관계를 숙고한다는 것이다.
이때 이성은 대상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구속력을 갖고 실제적으로 강제적인 어떤 것을 형성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엔 칸트를 떠나 철학적 사유의 특징에 귀를 기울여보자.
관념이란 무엇인가? 관념적으로 말해 모든 것은 주관이고 의식이고 정신이다.
정신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각 인식의 조건을 다른 것과의 연관을 통해서 도출한다, 그 반례란 없다, 만약 그렇지 않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무전제의 요구사항을 만족할 것임에도 말이다.
다시 말해 모든 판단의 기초는 그 자체로 도출될 수 없다, 우리 정신에 있어서 무전제한 관념이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위가 있기에 아래를 상상하고 아래가 있기에 위를 상상하지 않는가?
이러한 불가능한 요구 속에서 우리는 기초 정립의 망상을 품게된다.
기초 정립의 망상이란 저자의 용어로서, 존재하는 것을 가장 오래되었고 근원적인 것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최초를 탐하는 우리 정신의 기본적인 욕구와 관념론의 결합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칸트 철학에 이러한 망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모순적이게도, 저자는 칸트 철학에서 이성이 갖고 있는 한계를 비판하면서, 그 한계를 보듬어줄 것을 이번엔 우리 독자에게 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근원의 탐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유 운동 내에서 전제의 위치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2강을 읽고있는 이유이다.
아무튼, 칸트가 오래된 철학이고 그보다 더 오래된 규정들을 전제하고 있는 한 우리는 칸트철학에 무전제성을 요구할 수 없다.
칸트철학에 전제된 것들의 위치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로 정립된 칸트의 사유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한다면 우리는 이성 그 다음의 칸트 개념에 접근할 수 있다.
그것은 '선험' 개념이다, 이것은 칸트 철학 전체의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이유는 이 개념이 이성의 내적 본질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의를 읽는 중간이지만, 만약 이 선험의 개념이 형식논리학의 전제와는 별도로 정립된 개념이라면, 그리고 이것이 이성의 본질과 어떠한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면 이는 정말 흥미로울만 하다.
그 다음엔 이성의 소여성에 대해 논한다.
이성이란 그 개념이 칸트에 의해 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에 관해서 우리는 소여성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것은 인식을 위한 감성적 내용이 결코 연역될 수 없다는 점에 근거한다.
깊게 말하여, 왜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가능적 직관의 유일한 형식인지에 대해 우리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그저 우연적으로 우리에 정신이 주어진 것이고 우리는 그저 주어진 것들의 작동방식을 통해 최선의 규정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건 끔찍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정신적 감옥에 영원히 갇혀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칼 융의 표현이 연상된다.
이성이란 정신의 어떠한 통일 작용으로 볼 수 있다.
통일에서는 모든 것들이 연역적으로 완결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의식속에서 완료하고자 하는 관념론자들과 달리 칸트는 이것이 결코 의식속에서 완벽히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식'하고 있었던듯 하다.
즉 칸트는 통일이 가장 완벽한 결합이고 통일 외엔 어떠한 다른 통일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이 통일이 전체가 아니며 우리가 항상 어떠한 벽에 가로막혀 있음을 의식한 것이다.
이는 다소 심리학적 견해를 불러일으키는 생각이다.
아무튼 칸트는 이성적 통일에 대한 충동과 이를 가로막는 무언가에 대해서 선험적 조건의 소여성을 사용한다.
언뜻보면 인식의 한계 너머를 규정하기 위해 '신'을 끌고온 관념론자들과 비슷해보이지만 정작 그 신 앞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력한 관념론자들과 달리 칸트는 획기적인 시도를 한 셈이다.
다음은 칸트에 의해 정의된 선험의 개념이다.
"나는 대상이 아니라 아프리오리로 가능한 한에서 대상 일반에 관한 우리의 인식 방식에 종사하는 모든 인식을 선험적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이는 저자에 의해 다시 해석된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 선험적이란 말은 아프리오리한 종합판단의 가능성과 연관되어 있는 모든 것의 탐구입니다."
이는 마치 칸트에게 있어서, 규정되어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인식의 본질적 전제들을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다음 문장은 더 흥미롭다.
"칸트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이성을 통해 아프리오리한 종합판단이 될 수 있게 하는 개념적 그리고 직관적 방식의 근본 형식들과 연관된 모든 탐구가 선험적입니다. 따라서 선험적 탐구는 정신이 타당한 아프리오리한 종합판단을, 따라서 경험으로부터 독립된 판단을 어디까지 제시할 수 있는지의 입각점에서의 정신 혹은 의식의 탐구입니다."
정말이지, 내가 무의식에 관련된 심리학을 읽어보거나 무의식에 대한 고찰을 경험하지 아니한 사람이라면 이는 더 난해할 뻔 했다.
"우리는 더 이상 직관 형식의 배후로 나아갈 수 없으며, 그리고 이 직관 형식을 통해 우리의 모든 직관들은 '우리의' 직관이 되기 위해 걸러지게 됩니다. 그리고 칸트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지성은 직관에 의해 주어진 것을 근본 개념이라고 불리는 범주에 포섭시켜야 합니다."
또한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의 문제점을 자각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비난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근본 개념들에서 직관 형식과 사유 형식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직관 형식은 개념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칸트는 이는 소여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사유의 형식에 있어서는 그것이 논리적 이성 일반의 통일에서 전개될 수 있어야 한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리고 순수이성비판의 본래의 핵심 영역인 순수 지성 개념의 선험적 연역이 바로 이 시도라고 한다.
아마도 선험이란, 직관의 계기가 되는 것들, 직관 형식의 배후에 있는 것들을 말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선험적인 모든 것들이 아프리오리한 종합 판단의 가능성의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언어의 필연적 계기가 되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선험을 언어의 필연적 계기로 보는 내 관점에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언어는 단순히 명제의 수단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 표현이다.
다시 말해 가공되지 않은 인간의 순수한 감성이 나중에 가공되어 직관이 되고, 이성이 되고, 인식이 되어 언어의 형태로 나타난다.
칸트의 범위를 벗어났지만 선험을 나 자신이 더 잘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선험을 본능적 양식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당연히 '선험이 존재한다면 선험은 또 어떻게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이를 '소여된 것'으로 간주한 칸트와 달리 나는 이를 또한 '선험전 양식을 통해 주어진 것들' 이라고 가정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 다음엔 선험적과 초월적에 대해 설명한다.
초월은 '뛰어넘는(hinausgehend)' 것이다.
칸트적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언제나 대상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인식론적 함정이 있다.
우리가 대상을 말하고 있을 때 사실 우리는 대상을 촉발시킨 물자체가 아닌 물자체가 우리 안에 촉발시킨 것을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월이란 우리 안의 대상(물자체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닌, 물자체 그 자체를 향하려는 하나의 도약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칸트가 종종 언급하는 절대적인 것들이 있다, 신, 자유, 불멸성, 존재의 본질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이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는 초월적 인식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결코 설명할 수 없으면서, 또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저러한 대상들을 촉발시켰는지 알 수 없으면서, 그리고 저것들의 개념 자체가 우리가 가진 개념의 조건을 초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저것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탤릭체로 처리한 글은 책에 나와 있지 않은 나의 주관적인 견해이다.
이 주관적인 견해는 물론 책을 읽으며 내 오류를 깨닫게 되는 시점에 이른다면 마음속으로 정정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내 스스로의 설명이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초월적과 선험적의 차이가 드러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선험적은 주어진 것, 이른바 소여된 것이고 초월적인 것은 뛰어넘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개념은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저자는 그것은 '경험'과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고 말한다.
아무튼 초월적인 것은 경험을 뛰어넘은 것이고, 선험적인 것은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는듯 하다.
그러나 선험적인 계기를 통해 지각한 대상이 정말로 초월적인 것일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나의 말에 대답해주듯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순수이성비판의 가장 어려운 문제들 중 하나입니다. 이 조건들은 경험과 대립된 경험 가능성의 초월적 조건입니다. 그러나 이 조건은 절대적으로, 따라서 초월적인 절대적 진리를 갖고 있지 않고 오로지 조건이 경험, 가능한 경험과 관계하고 있는 한에서, 그리고 경험 대상 일반으로 포화되어 있는 한에서 진리를 갖습니다. 말하자면 초월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선험으로 해석되면서 제한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초월은 내면화됩니다. 즉 인간 너머 저쪽에 독단적으로 요청된 원리에서 정신의 원리로 그리고 이와 함께 인간 의식 일반의 성질로 되어집니다."
어찌보면 초월의 개념은 형이상학적이고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영역들을 탈취하려는 시도의 일반이고, 초월적의 개념은 그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결국 우리의 경험적 영역과 연결되어 선험의 영역으로 환원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다시금 소중한 말을 전달해준다.
"선험은 본래 경험에서 결코 유래되지 않으면서도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영역임을 염두에 두기 바랍니다."
논리학적 사유가 결여된 나의 문장이 비록 근거가 비루하지만 내 직관적 감성이 그 사유의 바다에 조금이라도 빛이 점점 드리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의 모든 인식은 경험과 더불어 시작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식 능력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작동하도록 일꺠워질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식이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칸트의 구절이다.
그리고 저자는 다시금 소중한 설명을 한다.
"칸트에게 선험은 본질적 의미에서 경험과 독립된 명제들과 아프리오리한 종합판단들과 관계하는 모든 탐구뿐만 아니라, 정신과 경험과의 가능한 관계와 대상 일반과의 가능한 관계에 이르는 모든 숙고들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본래 선험의 개념일 것입니다. 내가 추론하여 언급해도 좋다면 선험의 영역은 결코 형식논리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험의 영역은 대상의 인식 가능성과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선험은 본래 내용을 전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코 내용적이지 않고 단지 그러한 내용을 가질 가능성에만 관계합니다."
내 진술에 바로 정정이 요구된다.
나는 위에서 선험의 영역은 직관형식의 배후에 있는 것들 일반이라고 추측하였는데, 선험은 내용을 전제하고 있지 않고 내용적이지 않기 때문에, 단지 그러한 내용을 가질 가능성에만 관계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험이란 순수직관의 계기가 되는 형식들이나 그 조건을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 제2강은 끝나는데 나는 2강을 다시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현재 내 사유가 다다른 곳이 지금의 최선임을 인정하고 제3강으로 넘어가야할지 고민하였다.
<제2강 용어 사전>
경험판단: 주어 개념과 술어 개념의 종합이 경험에 의하여 성립되는 판단. 예를 들어 '태양은 돌을 뜨겁게 한다.'가 있다.
종합: 개개의 관념, 개념, 판단 따위를 결합시켜 새로운 관념이나 개념을 구성하는 일.
변증법: 1) 문답에 의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어원은 대화의 기술. 2) 헤겔 철학에서 동일률을 근본 원리로 하는 형식 논리와 달리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 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는 논리. 인식과 사물은 정/반/합의 삼 단계를 거쳐 전개된다고 한다. (dialectic)
형식논리학: 올바른 논증의 형식적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 변증법적 논리학과 같은 경험 내용에 관한 논리학에 대립되는 것으로, 경험이나 사실의 내용에는 관여함이 없이 오직 사유의 형식에만 관여한다. (formal logic)
동일률: 형식 논리학에서 사유 법칙의 하나. 모든 대상은 그 자체와 같다는 논리학상의 근본 요구를 나타내는 원리로, '갑은 갑이다.'로 표현된다. (principle of identity)
모순율: 형식 논리학에서 사유 법칙의 하나. '갑은 갑인 동시에 갑이 아닐 수 없다.'와 같이, 모든 사물은 그 자체와 같은 동시에 그 반대의 것과는 같을 수 없다는 원리로, 동일률의 이면을 이른다. (principle of contradiction)
상등성: 두 사물이 분량이나 특징에 서로 차이가 없는 성질.
동일성: 두 개 이상의 사상이나 사물이 서로 같은 성질.
푸앙카레: 모든 수학은 동어반복임을 주장한 수학자.
사상: 어떠한 사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고나 생각. 판단, 추리를 거쳐서 생긴 의식 내용. 논리적 정합성을 가진 통일된 판단 체계.
소여성: 사실이나 대상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주어진 경험의 내용 범주 .
소여: 사유에 의하여 가공되지 아니한 직접적인 의식 내용.
표준: 사물의 정도나 성격 따위를 알기 위한 근거나 기준
규준(kanon): 사유, 인식, 평가, 행동, 신앙 따위에 있어서 규범이 되는 표준.
규범: 사유나 의지, 감정 따위가 일정한 이상이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법칙과 원리.
규정: 내용이나 성격, 의미 따위를 밝혀 정함. 또는 그 정하여 놓은 것.
통일: 나누어진 것들을 합쳐서 하나의 조직/체계 아래로 모이게 함.
우연성: 어떤 사물이 인과율에 근거하지 아니하는 성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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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 책이 엄청 어렵다는데 저걸 읽고 정리도 했다니.. 덕분에 잘 읽었다. - dc App
사실 내가 제대로 읽었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잘 읽는 것보다는 끝까지 읽어보기만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