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논란이 되는 번역 (원문 충실 / 가독성 / 의역) 에 대한 김택규 번역가의 의견 긁어왔다.
독붕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냐?
출처 <번역가 되는 법 : 두 언어와 동고동락하는 지식노동자로 살기 위하여> / 김택규 / 유유 출판사
▷ 번역가는 작가보다 열등한 존재인가 [全文 25-28쪽]
번역서의 인세 비율에서 나타나는 저자와 번역가의 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우리에게 '번역가는 작가보다 열등한 존재인가?' 혹은 '번역은 창작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행위인가?' 라는 자문을 하게 만듭니다. 과연 그럴까요? 보수의 많고 적음이 그런 불평등의 당위성을 입증할 수는 없지요. 제도적인 차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도는 시대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로마제국 시대의 귀족과 계몽주의 시대의 유럽 지식인에게 번역은 그들의 품격을 높여 주는 고상한 행위였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당대의 언어로 유려하게 옮겨 자신의 박학과 문체를 뽐내는 것이야말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기예로 평가 받았기 때문이지요.
중국에서도 청나라 말기, 린수 라는 번역가가 영어를 잘하는 동료의 구술에 의지해 수많은 서양 대중 소설을 번역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그의 번역은 결코 투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작가 앞에 나서서 원문을 능가하는 필력을 뽐냈으며 작가를 능가하는 영예도 누렸습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날 저자와 번역가의 불평등한 관계는 전적으로 근대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번역의 대상인 고대와 다른 세계의 지식이 더 이상 성스럽거나 비밀스럽지 않고 외국어 능력도 희소가치가 떨어진 상태에서 유례없는 출판의 대중화로 온갖 지식이 범람하게 되면서 번역과 번역가가 평범한 기술과 기술자로 전락한 것입니다.
하지만 상식적이면서 본질주의적 관점으로 저자와 번역가의 관계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이런 설명이 통하지 않겠지요. 그들은 이렇게 반박할 겁니다. "어쨌든 저자의 창작이 있어야 번역이 있을 수 있지 않느냐?", "창작은 창조이고 번역은 변환일 뿐인데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시간적으로 창작이 선행하기 때문에, 그리고 창작만이 오로지 창조이기 때문에 저자는 번역가보다 우월할까요?
발터 베냐민*은 “번역이 그 궁극적인 본질에 있어 원작과 닮으려고 노력한다면 어떤 번역도 가능하지 않다.”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번역들이 원작에 기여한다기 보다는 원작이 그것들이 존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원작의 생명은 번역들 속에서 항상 새로운 최신의 것으로, 가장 풍성한 꽃을 피우게 된다.” 라고도 했지요. 저는 번역을 원작의 연장된 삶 혹은 제2의 삶이라고 봅니다. 원작은 본래 우리와 다른 세계의 문화 체계 안에서 태어난 생명입니다. 그 시대의 문화적 자아를 가진 저자가 역시 그 시대의 독자를 대상으로 수천 년의 민족적 기억이 켜켜이 담긴 모국어로 창출해 낸 산물이지요. 번역가는 그것을 자신의 문화 체계 안으로 가져와 '변환'을 시도합니다. 오로지 인류 공통의 사유 구조와 감정 패턴에 위태롭게 의지한 채 자국의 독자를 대상으로 역시 똑같이 방대한 세월을 거치며 형성된, 저자의 언어와 완전히 이질적인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이라는 새로운 소우주를 축조합니다. 이 과정에서 번역가는 "번역들이 원작에 기여한다기 보다는 원작이 그것들이 존재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시시각각 절감합니다. 번역은 원작에 충실해야 한다고요? 이 말처럼 공허한 빈 껍데기 언명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베냐민의 말대로 "번역이 그 궁극적인 본질에 있어 원작과 닮으려고 노력한다면 어떤 번역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자가 기대하는 원작과 번역의 등가성은 그저 순진하고 기계적인 등가성일 뿐입니다. 번역가가 실현하는 등가성은 역동적, 기능적 등가성 입니다. 원작의 독자가 얻은 체험을 역서의 독자도 얻게 하려고 최대한 노력하지만 양자의 체험은 유사할 뿐이지 동일하지 않습니다. 역서의 독자는 동일성의 환상을 애써 누리려 할 뿐입니다. 번역은 원작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번역가도 저자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저자와 번역가의 관계는 우열 관계나 상하 관계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할 뿐이며 그들의 능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발터 베냐민 발언 출처 (책에는 각주로 표기)
* John Biguenet, Rainer Schulte 엮음, 이재성 옮김, 『번역 이론: 드라이든에서 데리다까지의 논선』 (동인, 2009), 111쪽
<번역가 되는 법 : 두 언어와 동고동락하는 지식노동자로 살기 위하여> / 김택규 / 유유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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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은 그런 뜻이 아님
벤야민 말하려고 들어왔는데 바로 언급되네
비평가 평론가도 같은 맥락에서 논의될 수 있겠는데 그들도 창작을 행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잖아 요즘엔. 기생하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지만
번역 중요하고 매우 독창적 기예라고 본다. 단순한 기계적 작업은 아니지. 그리고 번역은 철저히 한국어 문법과 언어감각과 맥락에 맞춰서 해야 한다고 보고. 현대 한국인의 감각에 맞춰야 하고. 필요하면 원문을 분해하고 이중부정문을 긍정문으로 바꾸는 등 잘 읽히게 하기 위한 노력도 섞어야 한다고 본다(특히 원문이 길고 장황한 경우) 가끔 출발어적 언어감각에 얽매여서 한국어로는 비문과 난문에 불과한 뻑뻑한 번역문을 써놓고 자족하는 번역가가 있는데 이 양반들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번역은 과녁을 정확히 겨냥해서 쏴야지.
왜 그렇게 해야 됨? 요즘엔 원문의 느낌을 잘 살리는 게 잘 된 번역이라고 평가받고 있는데 굳이 그런 시류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번역가에게 창작의 권한을 더 안겨줘야 하는 이유가 뭔데?
의도적인 원문 훼손은 그저 번역가의 장기자랑일뿐
번역은 원문을 못 읽거나 안 읽는 독자를 위해 봉사하는 철저히 합목적적 행위니까. 그래서 잘 읽혀야만 하니까.
원문을 못 읽거나 안 읽는 독자를 위해서 행하여지는 종류라고 해서 '잘 읽혀야(가독성이 좋아야)' 한다는 게 성립하지 않음. 당장 여기서 출판사/역자 따지는 수많은 글들도 '잘 읽히는' 글을 찾기 위한 여정이지만 분해따윌 하는 건 번역이 아니라 곡해에 가까움. 원문에 대한 존중도 '읽을 수' 없고.
그리고 내가 읽은, 어설프고 경직된 직역으로 일관하는 번역가들의 번역은 원문의 connotation을 파악 못하고 축자번역을 한 경우가 많더라고. 그걸 파악한 번역가들은 유려하게 자기 역량을 자유롭게 발휘해 잘 읽히는 번역을 하더라고.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렇게 분해하고 뜯어고쳤으니까 '잘 읽힐 수밖에' 없는 글이 되는 거지. '잘 읽혀야 한다'는 주장에는 '분해'라는 성질이 잘 들어맞을 수밖에 없음. 이중부정문을 긍정문으로 바꾸는 등 입맛에 따라 재단해버리는데 당연히 잘 읽히지.
외국어의 구조가 한국어 구조와 정확히 매치되지 않는데 어느 정도의 분해와 결합은 피할 수 없는게 아닐까?
나도 거기에 대해선 어느정도 공감함. '원문을 살린다는 책임감' 보다는 '그렇게(지역)말고는 할 줄 모르니까' 직역에 가까운 번역을 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으니. 근데 첫 번째 댓글의 태도에는 공감을 못한다 이거.
모든 번역 자체가 그런 위험을 안고 있음. '어느 정도나 약간의'는 감수해야 하는 거겠지.
지역->직역
이를테면 한국어엔 영어와 달리 관계대명사가 없잖아.
그렇게 어쩔 수 없는 건 번역가의 손을 탈 수밖에 없겠지 당연하게도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근본적인 문제는 어쩔 수 없으나 충분히 비슷하게 옮길 수 있는 문장들도 "이해가 잘 되도록"이라는 이유로 끊어버리고 어휘를 교체하는 번역가는 그저 자만심만 가득할 뿐. 번역가는 원서를 소개해주는 존재이지 원서를 이해시켜주는 존재가 아님.
번역에 문학과 동등한 예술적 지위를 부여하고 싶다면 그건 번역가들의 몫이지
독자가 무엇을 중시하냐차이
역할이 다를뿐 - dc App
작가는 대체할 수 없지만 번역가 한 놈 없으면 대체할 인간 셀 수 없이 많은 것만 봐도 답 나옴
돈을 더달라는 걸까? 그건 시장이 결정을 하는거지
서로 역할이 다른 분얀데 그걸 왜 우월하고 열등함을 가림?
역할은 다르지만 우열이 분명한 것도 사실이지.
직역이냐 의역이냐 하는 건 번역가의 영원한 난제임. 아무리 원문에 충실한다고 해도 도저히 목표언어로 뜻이 통하지 않는다면 합목적적이지 않아. 아무리 목표언어로 수월하게 읽힌다고 해도 의역이 지나치면 원문의 의도를 떠나버릴 수 있지. 그 사이에서 적절한 지점을 찾아가는 기예가 번역임. 번역에 대한 자기 취향이 있을 수는 있지만, 어느 하나도 백퍼 정답은 아니야.
목표언어로 뜻이 통하지 않으면 역자가 그것을 '고쳐써'야 하나? 난 역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목표언어로 뜻이 통하지 않는 건 위에서 말한 특정 언어의 한계도 있겠으나 원저자의 탓이 먼저 아님? 그리고 그게 원저자의 의도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고. '텍스트'라는 것이 저자가 가진 애초의 의도를 백프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하나마나 한 얘기는 더 할 게 없는 거 같지만, 그걸 '번역'으로 갖고 오는 와중에 한번 더 '윤색'을 거친다? 본문 아래에다 설명충짓을 하는 게 낫지 원문을 '훼손'하는 건 직권남용임.
아니야 원작의 언어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그대로 번역기 돌린 듯 언어만 바꿔놓으면 좆같은 문장 정말 많음. 번역을 직접 해 봐야 이해할듯. 니 말대로라면 번역기로 충분하지 인간이 번역할 이유가 없음. - dc App
번역기처럼 기계적인 직역으로 충분하다는 게 아니라 '윤색'도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말하는 거. 위해서 말한 해체는 당연히 지양해야 하는 거고.
그리고 번역기 번역이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어색한 부분이 많은데 번역기로 충분하다는 말은 성립할 수가 없음. 밑에 댓글에 일본문학 얘기를 해놨는데 다자이 오사무의 [미남자와 부랑자]를 홍성필이란 역자가 번역했음. 다자이 오사무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일본문학 번역서는 그 넘쳐나는 쉼표를 제각기 역자가 조절했겠지. 근데 이 책은 그대로 갖다 씀 그래서 "절뚝거리는 느낌"이 있고. 이런 경우엔 양보를 해야겠지. 더군다나 그 쉼표가 띄어쓰기 역할을 갖고 있다는 게 분명하니까 받아들이기도 쉽고.
언어 자체의 특성이 있어서 문장을 나누거나 붙여 손보거나 순서를 아예 바꿔버리는 것도 어떤 때는 필요한 작업임. 이를테면 일본어는 문장 사이에 쉼표를 워낙 많이 쓰기 때문에 (띄어쓰기가 없다는 걸 감안해야 함) 한국어로 쓸 때 그걸 그대로 쓰면 절뚝거리는 느낌이 됨. 영어는 반대로 몇 문장씩 될 법한 내용을 쉼표나 --, ; 같은 걸 써서 줄창 이어버리기도 하는데, 이걸 한 문장으로 그대로 번역해버리는 번역가는 '원문에 충실'한 게 아니라 그냥 병신새끼임. 번역을 실제로 해 봐야 무슨 말인지 알 거다.
시장이 커져서 많은 번역가들이 나오는 게 가장 좋을듯 의역한 역본도 있고 직역한 역본도 있으면.. 개인적으로는 의역을 선호하는데 독갤러들은 원본을 많이 중시하네. 번역 티가 뚝뚝 묻어나는 소설이나 비문학 보자면, 이럴 거면 내가 영어로 읽고 말지 왜 굳이 한국어로 이런 문장 읽어야 하는지 짜증남..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돈이 문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