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에 따르면, 고급 쾌락은 저급 쾌락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 고급 쾌락은 지적이고 도덕적인 만족감을 주며, 장기적으로 더 큰 행복을 제공한다. 세상의 지식을 이해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행위는 밀의 관점에서 고급 쾌락에 속한다. 이러한 활동은 나의 지적 능력을 자극하고, 깊은 이해와 통찰을 제공하며, 장기적으로 더 큰 만족감을 준다.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본능을 내재하고 있다. 학습을 하다 보면 일정 시점부터는 학습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게 되며, 이러한 쾌감은 일시적인 즐거움을 넘어선다. 학습을 통해 얻게 되는 지식과 통찰력은 개인의 발전과 성공을 위한 핵심 요소로 작용하며, 이는 근본적인 인간 본성을 충족시키는 깊은 만족감을 제공한다.
또한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을 통해 자신에게 피드백을 제공하고, 잘못된 점을 고쳐나가며, 실수를 통해 배운다. 이는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며, 할 수 없거나 가치가 없는 것들을 신속하게 포기함으로써 시간을 절약하게 한다. 이러한 사고 과정은 행동, 반성, 사고, 되새김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며, 매 순간의 반성과 신중한 재고, 과거 실수에서 얻은 교훈이 시간이 지나면서 지식과 통찰력의 기초를 형성한다.
학습과 피드백을 반복하는 루프를 통해 나는 성장하고 혁신하며, 궁극적으로 지식 추구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다. 보다 원초적이고 육체적인 쾌락도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지만, 세상의 구조를 해석하고 그 요소들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얻는 만족감은 나에게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이는 일시적인 기쁨을 넘어, 장기적인 행복과 만족을 제공하며, 나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했을 때, 고도의 지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말초적인 저급 쾌락을 추구하는 것보다 지적 역량을 요하는 고급 쾌락을 추구하는 편이 인류에 이롭다. 정보를 빠르게 처리하고 소화할 수 있으며, 책을 읽고 학습하는 것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인생에서 유일하게 유의미한 자산인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가치를 생산해낼 수 있는 고급 쾌락인 학습에 투자함이 바람직하다. 이를 통해 얻는 깊은 만족감과 지적 성장은 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며, 이를 통해 더 나아가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을 파악하고 그것을 만들어내 역사의 흐름에 돌려넣음으로써 인류의 공리에 기여할 수 있다. 밀의 공리주의를 읽고, 이러한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쾌락의 질적 차이가 무슨 뜻이냐, 또는 양이 더 많다는 것을 제외하고 어떤 쾌락을 다른 쾌락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만일 두 가지 쾌락이 있는데, 이 둘을 모두 경험해본 사람 전부 또는 거의 전부가 도덕적 의무 같은 것과 관계없이 그중 하나를 더 뚜렷하게 선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더욱 바람직한 쾌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둘에 대해 확실하게 잘 아는 사람들이 쾌락의 양이 적고 엄청난 불만족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리고 쾌락의 양이 적더라도 어떤 하나를 분명하게 더 원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더욱 선호되는 즐거움enjoyment이 양의 많고 적음을 사소하게 만들 정도로 질적으로 훨씬 우월하다고 규정해도 될 것이다. 두 가지 쾌락에 대해 똑같이 잘 알고, 그 둘을 똑같이 즐기고 음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보다 높은 능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특정 삶의 방식을 훨씬 더 선호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짐승이 누리는 쾌락을 마음껏 즐기게 해준다고 해서 하급 동물이 되겠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령 바보, 멍청이 또는 무뢰한이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의 팔자에 더 만족을 느낀다고 아무리 그럴듯하게 설득하더라도, 지성을 갖춘 사람이 바보가 되고, 교양 있는 사람이 무식한 사람이 되며, 느낌과 양심을 가진 사람이 이기적이고 저급한 사람이 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인간들이 가진 모든 욕망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왜 자신의 것을 포기하겠는가. 만에 하나 그런 것을 꿈꾼다면, 그것은 어떤 극단적인 불행에 시달리는 까닭에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도피하고 싶은 충동 때문일 것이다. 타고난 능력이 월등한 존재일수록 어지간한 것에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보통 사람보다 더 예민하게 고통을 느낄 뿐 아니라 고통을 당하기도 훨씬 쉽다. 이런 어려움에도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낮은 등급의 삶의 방식에 빠져들 생각을 결코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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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고상한 감정을 향유하는 능력은 말하자면 성질이 매우 연약한 나무와도 같다. 그래서 적대적인 영향 아래서는 물론, 영양분이 조금만 부족해도 쉽게 죽고 만다.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 매달려야 하는 직업과 각자의 사회적 상황이 그와 같이 높은 능력을 발휘하는 데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면, 다수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러한 능력은 쉽게 사라지고 만다. 사람은 지적 호기심을 잃고 나면 보다 높은 것에 빠져들 시간이나 기회가 없어지고 그에 따라 그런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도 사그라지게 된다. 그 대신 열등한 쾌락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는다. 이것은 그런 쾌락을 의식적으로 더 선호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들이 접근 가능한 또는 그나마 비교적 오래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틀어 많은 사람들이 두 종류의 쾌락을 함께 취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둘에 대해 똑같이 평가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 의도적으로, 그리고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더 낮은 것을 선호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존 스튜어트 밀 - <공리주의>
일기같은 느낌이니 약간의 스노비즘(?)은 걸러들으삼
나도 밀을 좋아합니다. 질적 공리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