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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은 《나》를 담당할 《나》가 있는가? 우리의 전 존재, 우리의 내면 존재를 제어할 이 모든 《나》의 《나》는 있는가? 노발리스는 쓰고 있다. 《문화의 지고한 임무는 자기의 초월적 자아를 소유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의 '나'의 '나'가 되는 것이다. Die höchste Aufgabe der Bildung ist, sich seines transzendantalen Selbst zu bemächtigen, das Ich seines Ichs zugleich zu sein.》 《나》가 존재의 음조에 따라 바뀐다면, 지배적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 중에서 《나》를 찾으면서, 우리는 노발리스가 꿈꾸듯이 《나》의 《나》, 초월적 《나》를 찾는 게 아닌가?

그러나 방에서만 심리학자인 우리는 인공낙원에서 무엇을 찾고있는가? 꿈인가 몽상인가? 어느것이 우리에게는 결정적인 자료인가? 책, 언제나 책이다. <글로 씌어지지> 않았다면 그 인공낙원이 낙원일 것인가? 우리 독자들에게는, 인공낙원이란 책읽기의 낙원이다.

(...)

앙리 미쇼는 쓰고 있다. 《마약은 필요 없다. 다른 측면에서 살기를 선택한 자에겐 모든 것이 마약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