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7ae88476e48a39a23dee8fe643d0226d04c9c7d08dc92ed2f0dc1f2735c83b629f0159eb9c4f005dfc050ea218b8d3

카다레 옹이 타계하셨다길래 추모하는 뜻으로 미뤄오던 부사진 사월 읽었음

내용은 알바니아의 오랜 세속법 카눈에 속한 보복 살인에 대한 이야기임

소설은 집을 찾아온 손님을 죽였다는 이유로 원수지간이 된 생판 남과 70년간 복수혈전을 펼치는 알바니아의 묘한 명예 의식을 보여주는데, 이야기는 주인공 그조르그가 형의 원수를 갚으면서 시작됨

시작부터 살인이라 자극적이여서 그런지 몰입감이 좋았던 거 같음. 아무튼 그조르그는 보복을 앞두고 의례대로 1달간의 삶을 마무리할 기간을 얻고, 그 명예로운 한 달간의 삶을 그린 작품임.

어이없게도 시골 사람들은 원수를 갚지 않는 삶은 무의미하며, 원수를 갚고 명예를 회복해 얻은 최후의 30일만이 정말 살아있는 날로 생각하는데, 이게 처음엔 무슨 판타지에 나오는 전투종족 이야기가 아니라 엄연히 현실에 존재했다는 게 참 놀라웠음

현대 도시민으로써는 명예라는 것이 가족의 멸족만큼이나 중요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거 같기도 하고

정작 살인을 강요받은 그조르그도 평범한 청년에 불과해서 보복 당하기 전에 길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최후의 여행을 떠나가는 모습도 안타까웠음

여러모로 무력과 명예, 보복에 집착하는 알바니아의 풍습을 죽은 군대의 장군보다 잘 묘사했다고 느껴짐.

예를 들어, 살인의 벌금을 내러 온 명예로운 남자들이 곧 보복당해 죽을 거라는 암시나, 복수의 벌금으로 먹고사느라 카눈의 약화를 두려워하는 지방 수구 세력, 카눈을 벌이고 남은 명예로운 평생을 탑에 숨어 사는 남자들, 그리고 시골 사람들을 원시인처럼 구경하는 문명화된 지식인들 등, 알바니아의 근대화된 수도와는 달리 수백년간 전근대 세습법이 군림한다던지, 알바니아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그려냈음

전에 읽은 죽은 군대의 장군에서야 알바니아의 명예를 향한 투신을 군대를 단신으로 맞선 시골 사람들의 용기로 보여줘서 맥락을 몰라 그냥 엄청 용감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들의 배후에 이를 충동질하는 명예 의식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감상이 새롭다 ㅇㅇ

다 읽고 나니 과장 좀 보태서 알바니아의 독재자 엔베르 호자가 1가정 1벙커를 보급하려고 노력했던 게 조금 이해가 됨. 어차피 알바니아 시골 사람들은 명예 때문에 절대 싸움을 피하지 않는 데다가, 집을 요새화하고 틀어박히는 데 이미 익숙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네ㅋㅋ

여러모로 폐쇄적이고, 잔혹하며, 한편으로는 숭고하기까지 한 알바니아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좋은 작품이었음.

대표작인 죽은 군대의 장군보다, 오히려 더 알바니아답고 직관적인 작품인 게 마음에 듦

그나저나 관습법에 따라 보복하기 전에 원수의 이름을 불러 자신의 누구의 보복으로 죽는지 알려야 한다던지, 습격에 대비해 언제나 총을 휴대하는 모습을 보면 나름의 기사도와 상무 정신이 투철해 낭만 있다면 낭만 있는데, 거기서 살고 싶진 않다ㅋㅋ

개인적으로는 그조르그의 복수 이야기와 말년은 재밌었는데, 티라나에서 온 신혼부부의 여행 얘기는 좀 노잼이었음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