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페미니즘 문학의 한계와 남성과의 교차 지점을 찾아서

 

왜 비체는 오물이 되는 경험 후 이에 따라오는 초월에 집중해야 하는가? 우리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교차적인 아시아적 신체와 그 밖 몸이라고 추산되는 신체 미시 세계는 고약함을 감히 말해 보려 한다. 교차적 신체는 아시아인이 정형적이지 않고 정념적이므로 분열병에 취약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신체에서의 미시 체계는 몸이라는 것이 자본화 과정 또는 물성애로 견인되지 않음을 말한다. 동시다발로 남성 독자 또는 작가들이 여성주의 문학인들에게 사회 유지를 위한 모성과 동반한 횡단성, 복합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 다원성을 퍼뜨려 놓을 수 없음도 같다. 그것은 다름아닌 어긋난 톱니바퀴이며 이것은 여자는 여자 일이나 해라, 와 여자들은 왜 여자 일만 하냐, 가 대립되는 구간이다. 여기서의 다원성은 아동의 움직임과 같다. 이를 여성에게 강조하는 것은 신체에 정신을 이룩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음을 제시해 두고 싶다.


미국의 해체비평가가 말하듯 문학비평에서의 정치적 입장은 그 형태를 달리하는 순간에 남성들의 결집을 만든다고 한다. 욕망의 객체가 되자마자 남성들의 결집을 도모하는 아시아인 여성의 몸은 서발턴이자 아브젝시옹으로써, 기능하지 못하는 덩어리와 같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며 그 자조와 원형적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적 테제에 우리 문학 특히 여성시학은 자리해 왔다. 그러므로 여성은 욕망의 대상이므로 이에 익숙해진 여성이 주체가 되지 못함을 슬퍼하면서도 주체 되기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체라는 것은 타인의 실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몸에 자신의 욕망을 강조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 강조하는 몸글 자체는 이상(Queer, Odd)한 몸이라는 것이다. 이 자체가 여성적 퀴어 서사가 남성 독자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와 상통한다. 인정투쟁에 결부한 여자하기 자체는 부정형성과 비정상성을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객체가 되는 것은 사물이 된다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여성은 짧은 순간 남성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여성됨을 두고 오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은 대개 페미니즘 문학 자체가 나오지 않고 팔리지도 않았으면 하는 정념을 보편적으로 갖는데 이것은 김훈이 여자는 남자보다 미개하다라고 인터뷰를 한 것과 갈라지는 추이다. 아버지 세대의 문인들은 보편적으로 이 생각을 갖고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 이것으로 여성 문학인들은 독자와 함께 가려 하지만 남성 대중이 여성 공동체와 함께 가지 않으려 한다는 일례는 제시된다. 정희진이 <정희진처럼 읽기> 서 말하듯 여자는 주제 파악을 해야 그것을 다시 짚고 나갈 수 있는 성원을 획득한다. 남성이 자체에 불신과 거부감을 갖는 것을 권명아는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서 여성 다중에 대한 공포라고 주지한다. 알다시피 문학은 남성과 함께 걸어가는 주체이다. 이는 하나의 단으로써 기능하기에 계층, 장애 유무, 연령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문학에서의 페미니즘은 상호교차적인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문학은 비 - 성공에 대해 말하므로 이에 레토릭하자면 비정형과 실패됨을 말한다고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읽는 이가 말하는 대로 한국 여자 특히 한녀세대 는 기가 세다. 이미 아시안 여성에 중성적 얼굴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반도인 지리적 위치서 동년배 남성들이 의무 입영하는 환경에서 자라났는대도 안 억세지겠냐는질문을 던진다


물론 강했던 가부장의 아들들인 현 20대 남성은 그들에게 열패감을 가지며 왜 그들이 될 수 없는지와 동시에 개인주의의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미국의 수잔 팔루디가 이미 <스티프트>에서 적어내린 바가 있다. 일독을 권장드린다.


한국 남성이 의무 입영하는 이유는 중국과 일본에 있음이 크다. 역사적으로 대치되어 온 위치와 침략의 동아시아적 도가니로 기한 한국은 군 내 처우 개선 찬성자 중 여성이 더 많은 나라이다. 이것을 국방이라는 미명 하에 말하지만 그것은 허례허식이며 일본에 지배받아 온 역사를 기반으로 한국식 가부장제를 답습하는 것이다. 그것은 까라면 무조건 까며 집에 들어와야지만 목소리가 커지는 식민지 남성성으로 대표된다, 사실은 그 아버지 세대가 집안 사람들에게 가하는 폭력이 아니라고는 볼 수 없다. 말하자면 아시아국 전체 중 군국(일본)에 이 나날까지 투쟁하고 약간의 유감이나마 드러낸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에 유감 표시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알고 있느냐, 모르느냐는 둘쨰치고 젊은 세대의 남성들이 국방부를 원망하기보다 여성가족부를 원망하는 일은 여성에게 농민연대적 사회 모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 군대식 위계 문화는 강약약강으로 대표되는 심한 요구와 여성 집단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굴절적 혐오표현이다. 당신을 입영하는 것은 여자가 아닌 윗대가리 남자임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말해 두지만 동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 여자는 생각보다 착하지 않고 사실 그대만큼 속이 새까만 사람들임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억척의 기원> 을 집필한 최현숙과 같은 세대가 아니다. 복지사회에서 말하듯 아동 복지는 성인 남성을 복지하는 방식과 같다. 맨박스를 차라는 말이 아닌 기득권에게 갈 비판이 여성 집단을 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어린이가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에 화를 내는 것과 같은 회로이다. 성인 남성을 주체로 한 예시를 하나 들자면 군인권센터 소장 또한 성소수자이다. 여성단체서 군인권에 연대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봐도 무방하다. 모니카 위티그에 따르면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말하지 않기에 우리는 여기서 슬픈 미래 서사를 연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여성이 남성을 동포로써 알고 있음으로 제시될 수 있다.


미학서에 적시되는 시인은 기초적으로 소년소녀이다. 그것을 밀접하게 조사할 수 있을 때 그 말 안에서, 거기서 바리데기 - 되기를 자처하는 김혜순은 모친으로의 회귀와 또 어머니가 여성임을, 그조차 물화되지만 그 Flesh - body를 갖고 나아갈 것이 나을 정도로 살아갈 수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문학은 단일 어족으로써 보호받는 배타적 영역으로써 자리하고 최근 한국 여성시가 해외에 자주 번역되는 예시를 말하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자랄 수 없고 다만 소설을 쓰는 사람은 어릴 때 이후로 자랄 수 있다. 이것은 체의 주객체가 전도되고 횡단할 때 문제삼아지는 것이 시와 소설의 양극화이지만 그것이 한국 문학서의 오리지널리티라고 말할 수가 있다. 직업적으로 즉각적인 업데이트가 요구되는 직종이라면 더 부각되는 특성이다. 여성 작가들은 그것을 씀으로써 엘렌 식수가 주창한 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éminine) 을 실현하는 것이다. 여자는 고계층과 고학력이 없으면 남성과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바에 다름없다. 한국에서의 여성주의 소설은 발전할 수 있으며 교조성을 줄일 필요가 있고 더불어 작가와 독자는 비슷한 보폭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일견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