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대학교의 전임강사 시절」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늦가을

  청년운동도 시인노릇도 너무나 배고파

  헌 옷가지를 충무로에서 팔고 돌아오는 길인데

  일정 말기의 인문사 사장 최재서 씨를 뜻밖에 만났다.

  부산에 '남조선대학'이라는 게 새로 생겼는데

  국문학의 전임강사로 가볼 생각이 없느냐고 해서

  이건 웬 떡이냐고 배짱좋게 승낙하고 말았다.

  일본말로 밖에는 노트도 할 줄 모르는 학생들이니

  무슨 과건 다 모아놓고

  우선 우리 말로 노트할 만한 능력만 만들어 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하여, 나는 11월 하순의 꽤나 치운 날,

  깃에 깜정 수달피 털을 단 근사한 외투를 입고

  그 대학 전임의 발령장을 받기 위해

  이불 보따리는 등에 메고 만원열차에 실려 갔는데

  이 귀골용의 수달피 깃의 외투로 말하면

  일정말기의 내 친구였던 일본인 시인 고다마 깅고[兒玉金吾]가

  이 나라 해방 뒤 자기 나라로 돌아갈 때

  '당신에게나 인제는 소용 되겠다'고

  내게 물려 주었던 것이다.

  하하하하….


  부산에 가서 만나 보니, 학장은

  지난 2차대전에 참가했던 미국 육군 중령 출신의 교포로

  이 때는 미국군 정부의 경남 지사직을 겸하고 있었는데,

  학교 교사라는 것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동대신동의 암담한 공장 창고였었네.

  이것이 뒤에 대 동아대학교가 된 것이지.


  내 강의 목적은 첫째 우리 말 맛에 재미를 붙이게 하여

  그걸로 노트의 문장을 꾸미게 하려는 것이었으니까

  우리 말의 조직적인 아름다움을 비교적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시인 정지용의 「달리아」라는 시를 하나 골라

  기세를 올려서 열변을 토하고,

  밤에는 이것도 일본잔재인 일본식 다다미의 하숙방에서

  엔간히는 파랗게 떨고 지냈다.


  솔직이 말해서

  이 때 내게는 그 대학 교수라는 것의 기분이 좋아서,

  또 사실은 따로 밥먹고 살 만한 일자리도 안 보여서

  이듬 해 봄의 새 학기에도

  흰 조끼를 갖춘 중고품 회색 양복 한 벌을 사 입고

  교수연한 보무를 옮겨왔던 것인데,

  이 때 새로 정한 하숙에서는

  내 그 중고품 단벌옷을 밤에 누가 훔쳐가 버려

  난생 처음의 대학교수 기분도 잡쳐버리고 말았다.

  하하하하.


  1947년의 신학기부터

  이 학교 교사는 또 먼 부산진으로 옮겨가서

  나는 그래도 당시 유행의 조랑말 마차를 타고

  그 딸랑거리는 말방울 소리를 듣고 가는 것이 첫째 재미였고,

  그 다음으론 자갈치시장 언저리에 나가서

  비쌀 것 없는 멍게나 해삼 같은 걸 사들고 가

  수수한 동동주에나 잠기는 게 가장 괜찮았나니,

  이 자리엔 약관시인 이봉래가 더러 끼어들어

  그런 술맛을 돋구기도 했다.


  그러자니 서울 식구들에겐 송금할 것도 없어

  아내는 이 때에는 수를 놓아 모자가 연명하고 지냈다 해.

  미군들이 그들의 파자마 같은 것에

  용이니 뭐니 그런 수를 놓는 것을 좋아해

  이것을 맡아 하는 여인들의 일터도 생겨서

  그 덕으로 한동안 부지하고 지냈다고 해.



- 『팔할이 바람』(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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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팔할이 바람』은 서정주가 낸 열여섯 권의 시집 가운데 최악의 작품으로 평가되곤 한다. 이는 대체로 두 가지 까닭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이 시집의 내용이 그가 불과 다섯 해 전에 냈던 『안 잊히는 일들』의 내용과 거의 동어반복되고 있는 데에 있다. 다른 하나는 이 시집에서 시인이 담시(譚詩)의 수다스러움에 매몰되는 바람에 작품으로서의 최소한의 균형조차 깨지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시집 속에는 상당히 괜찮게 읽히는 대목이 여럿 있지만, 그러한 대목들이 시인의 수다 속에서 엉뚱한 대목과 어색하게 결합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해서 전문을 놓고 읽기가 매우 곤란해지는 면이 있다.


그러나, 여러 번 읽느라 그렇게 느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팔할이 바람』의 수다에서도 매력 있는 부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야 격이 떨어지지만 일부 대목만을 놓고 비교한다면 『안 잊히는 일들』보다 낫게 느껴지는 부분들도 없지 않다. 위의 작품 같은 경우도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구호적으로는 일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면서, 실상은 해방 이전의 문화에서 아직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해방 직후의 풍경을 이보다 더 현장감 있게 그리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역시 마지막 대목이 이런 풍경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흠이다. 마지막 연의 '해'로 끝나는 어투는 그랬다고 하더라는 의미지만 중국인 흉내를 낼 때의 어투를 연상시키게 만들어 일종의 자기 희화화를 시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시의 전체 흐름으로 놓고 보자면 역시 매끄럽지 못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