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사상(pensée)을 좋아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사상에 관한 탁월한 전문가라는 것도, 혹은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직업이나 천직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감정일 뿐이다. 감정이란 아직 표명되지 않은 문장 같은 것이다.
우리는 (아주 드물지라도) 이 사상 「이후(après)」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penser)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이 사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생각을 계속 연결시켜 나가야 한다. 우리는 그 연결방식을 탐구한다. 그러나 이런 「이후」는 아직 확정되지 않고 있다. 확정된 것은, 이 사상이 고려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설명할 것이라는 것이다.
사상들에 있어 이런 연결들(enchaînements)은 항상 있어왔다. 이것들은 전통에 의해 규정된 유사성의 여정들을(trajets d'affinités) 나타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피스트 「이후」를 생각했고, 칸트는 라이프니츠적 합리주의의 위기 및 흄, 루소의 법 근거의 위기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고독한 사상가였다. 물론 그는 프레게·러셀·논리실증주의 및 쇼펜하우어와 슈펭글러 「이후」를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이후」 그 자체를 생각했다는 점에 그의 고독성이 있는 것이다.
—『지식인의 종언』 中
우리는 (아주 드물지라도) 이 사상 「이후(après)」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penser)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이 사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생각을 계속 연결시켜 나가야 한다. 우리는 그 연결방식을 탐구한다. 그러나 이런 「이후」는 아직 확정되지 않고 있다. 확정된 것은, 이 사상이 고려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설명할 것이라는 것이다.
사상들에 있어 이런 연결들(enchaînements)은 항상 있어왔다. 이것들은 전통에 의해 규정된 유사성의 여정들을(trajets d'affinités) 나타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피스트 「이후」를 생각했고, 칸트는 라이프니츠적 합리주의의 위기 및 흄, 루소의 법 근거의 위기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고독한 사상가였다. 물론 그는 프레게·러셀·논리실증주의 및 쇼펜하우어와 슈펭글러 「이후」를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이후」 그 자체를 생각했다는 점에 그의 고독성이 있는 것이다.
—『지식인의 종언』 中
도대체 뭔가 말한거같은데 모르겟는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