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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모든 국가는 과두제(그리고 아마도 몇몇은 군주제와 독재제) 국가인가?
렙틸리언과 일루미나티를 믿지 않는 건전한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대개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이전까지의 대부분 사상가들이 현대 사회를 본다면, 아마도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19세기 말, 일본의 학자들은 영어 democracy의 역어로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창안해 내었다. 한자 뜻을 풀이하자면 민이 국가인 주의일 것이다. 하지만 democracy는 본래 어떤 주의가 아니라 정부 형태를 가리키는 말이며, 인민이 주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민이 다스린다는 뜻이다.
둘은 비슷해보이지만 전혀 다른 함의를 지닌다. 저자는 이를 주식과 펀드로 비유한다. 국민이 통치한다는 것이 주식(즉, 내 돈으로 내가 직접 투자하고 직접 책임을 진다)이라면,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은 펀드(즉, 내 돈으로 남이 투자하고 내가 책임을 진다)에 가깝다. 저자는 따라서 인민이 통치하는 정부 형태, 즉 민치정이 더 적절한 번역어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18세기 이전까지 통치와 주권은 항상 구별되는 것이었으며, 민주주의는 항상 전자-인민의 통치-를 의미해왔다. 더욱이, 민주주의는 항상 나쁜 결과만을 낳고, 더구나 산골 마을이나 고대 도시국가에서나 가능한, 순전히 가설적인 존재였다. 민주주의는 항상 불가능하면서도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오늘날 민주주의는 현실적이고 긍정적인 것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민주주의는 주권의 문제로 옮겨가, 한때 당연히 귀족정의 요소였던 것들, 즉 대의제와 투표를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여기게 되었다. 대체 무슨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 책이 다루는 것이 바로 이 전환이다. 저자는 지성사, 즉 과거의 사상들을, 그 맥락 안에서, 그들이 진정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밝히는 방법론을 통해 이를 조명하고자 한다.
민주주의는 고대 아테네에서 출발하지만, 알다시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그리스 사상가들은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대신 철인정치 (플라톤)이나 법치국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장했다. 왜냐하면 민중의 의지에는 이성과 합리가 없기 때문이다. 민중과 이성을 대비시키는 이 전통은 이후 서양 정치사상사에 오래도록 이어져내려오게 된다.
로마인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들 고유의 역사 순환론에 따라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군사 독재로 귀결된다는 이유에서 민주주의를 반대했다.
이들의 사상을 이어받은 근세 사상가들 역시 민주주의에 반대했다. 공화주의자들은 공화국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는 덕성이 필요하며, 소수의 덕성을 지닌 이들이 통치해야한다고 보았다.
자연법론자들은 (오늘날의 상식적인 자연법 이해와는 달리) 의무가 권리에 선행한다고 보았다.(그러니까 '천부인권'이 아니라, 의무를 지키기 위해 권리가 필요할 따름이다!) 이 의무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에 알맞는 법이 필요한데, 인민은 진리를 파악할 수 없으므로 소수가 법을 만들면 나머지가 그 법에 복종해야한다고 보았다.
흔히 민주주의자로 오해받는 루소 역시 민주정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핵심은 (정부형태론이 아니라) 인민주권론인데, 주권을 지닌, 대의될 수 없는 인민의 의지가 법을 제정하는 자유국가가 핵심이며, 민주정, 귀족정, 군주정은 그에 따라나올 뿐이다.
그런데 민주정은 '신들에게나 가능하며' 귀족정과 군주정 역시 각자의 이유에서 자유국가를 지킬 수 없다. 따라서 사회계약론은 일종의 비관론으로 끝난다.
따라서 많은 계몽사상가들은 군주정의 폭정과 민주주의 모두를 막기 위한 대안으로 인민주권론과 대의정부를 결합한 입헌군주체제를 구상했고,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들 또한 그랬다. 대의정부는 본래 민주주의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일단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혁명의 궤도는 예상을 벗어나, 민중의 의지가 정치적 힘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들은 본래 민중에게 권력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인민주권론을 전유하여 자신들이 직접 법을 만들고자 하는 거리 정치가 도래하게 되었다.
변화의 첫 삽을 뜬 것은 콩도르세와 로베스피에르였다. 혁명 이전부터 콩도르세는 이론상으로, 인민이 충분히 계몽되었다면 민주정이 가능할 수 있으며 그 과도기로서 대의제가 필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로베스피에르는, 이론화되지는 않았지만, 민중과 가까이 하며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한편, 동시에 민주적인 대의정부의 가능성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민주주의가 조금씩 긍정적인 함의를 갖기 시작했다.
1794년 테르미도르 10일, 로베스피에르와 민주정, 그리고 공포정치가 모두 끝을 고한다. 흔히 이 시기로부터 나폴레옹에 이르는 5년의 혁명의 하강기는 종종 무시되곤 하지만, 저자는 이 시기를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로 꼽는다.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성립한 보수공화파 정부에 반대하는 좌파 야당이었던 이른바 '민주파'들이 그 주인공이다.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민주주의는 공포정치의 원흉으로 비난받았지만, 이들은 로베스피에르와 공포정치를 불가피한 것으로 옹호하면서도 그들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대의민주주의' 개념을 도입했다. 루소와 같은 이들이 대국에서 현실적으로 민주정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을 반론하기 위해 이들은 민주주의에 대의정부를 도입하면서도, 이전까지 대의제가 민주주의를 억제하기 위한 장치로 도입된 것과는 달리 민주주의를 위한 장치로 여겼다.
이를 위해서 이들은 소생산자 경제, 언론의 자유, 소환권과 입법통제(국회가 통과시킬 법을 인민이 거부할 권리), 공교육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집권하는 일은 없었다. 민주주의와 대의제를 조화시키려던 노력은 가지 않은 길로 남았다. 민주주의는 옛 사상가들이 예언했듯 나폴레옹의 군사독재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상가들은 프랑스 혁명의 유산을 세 가지로 계승했다. 민주주의를 계승하거나, 방지하거나, 교정하는 방안으로 말이다.
민주파들과 사회주의자들은 계승 편에 섰던 이들이었다. 민주파들은 장기적으로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인민의 습속을 개선하고자 하는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이전에 먼저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혁명이나 급진적 경제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전통적 공화주의자들과 실증주의자들은 방지 편에 섰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우매한 대중을 다스릴 현명한 법, 혹은 기업인과 노동자들이 지도하는 영적 질서를 강구했다.
마지막으로 자유주의자들은 교정 편에 서서, 민주주의가 악하지만 장기적으로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민주주의가 불가피하지만, 투표로 뽑힌 선거인들이 대중의 여론이 아닌 이성의 법칙에 따라 법을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승리한 것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대의정부에 민주주의의 이름을 붙이고 민주주의를 위험하지도 급진적이지도 않도록 길들였다. 투표는 주권의 행사가 아니라 의사의 표명이 되었고, 민치는 민주가 되었으며, 민주주의는 (한때 민주주의의 대립항으로 간주되었던) 대의제 및 투표와 거의 동의어가 되었다. 민주주의의 형식을 띤 투표제 위에 자유주의 정부가 수립된 투표자유주의 체제를 이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라 부르게 되었다.
이 모든 기만은 20세기 냉전을 거치며 잊혀졌다.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에 익숙해졌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집어삼킨 것이다. 그럼으로서 한때 거부의 대상이었던 민주주의는 이제 당연히 좋은 것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럼에도 자유주의자들은 여전히 민주주의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때로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내걸고 인민을 '돼지같은 대중'이라 부르던 버크의 편에 서곤 한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항상 서양철학사에 면면히 내려오는, 무지몽매한 대중에 대한 혐오와 공포가 아직도 깔려있다.
그리하여, 이 긴 여정을 거쳐 우리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우리는 자유주의 귀족정에 살고 있다.
도서전에서 별 생각 없이 사왔는데(사고 보니 뒷면에 ㅎㄷㄷ한 추천사 목록에 놀랐음 ㅋㅋ) 간만에 진짜 재밌게 읽었음. 대중서라 어렵지도 않으면서 다루는 내용 자체가 굉장히 흥미로워서 관심 있으면 한번 읽어보기를 권함. 민주주의나 지성사 뿐 아니라, 프랑스 혁명기 민주파들의 사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는데, 이런 책이 잘 없으니 프랑스 혁명에 관심있어도 읽어볼만 할거임.
다만 한가지 아쉬운건 민주파 이후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서술되어 있어서, 어떻게 자유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두고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집어삼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다뤘으면 좋지 않았을까...싶은 생각은 좀 있음. 암튼 쉽고 명료하면서도 재밌는 책이니 정말 추천함!
ㄹㅇ 민주주의는 기만적인 귀족정이다 그놈의 대안없음 때문에 입을 닫을 수 밖에 없지만
프랑스 혁명에서 책이 사실상 끝맺음 되는게 아쉬운게, 이렇게 되면 현재의 민주정은 단지 귀족정에 불과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 너무 쉬운 것 같음. 그러나 저자가 말했듯 단어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변화하고 맥락속에서 규정되는 것이지 고정된 것이 아니잖음?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뒤에 어떻게 민주주의 개념이 전유되고 재전유되며 복잡한 길을 갔는지, 19세기와 20세기의 민주주의 지성사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싶은 개인적인 바람.
말을 예쁘게 잘하셔서 글 읽다 생겨난 정치에 대한 분노가 죽어버렸네 잘 읽었습니다 본문도 댓글도
저런 딜레마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에 대한 기준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인데, 자기가 생각하는 옳은 방향이 정말 좋은 결론을 가져올거라 믿는 버릇들을 고치면 그런 괴로움이 줄어들거임. 민주정의 관건은 어떻게 해야 '나'를 포함한 유권자들이 보다 더 현실적이고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할수 있을지에 관한 안목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라 생각
백신 분명히 맞았는데 빌 게이츠는 뭐하냐? 인류 통치 하기로 한거 아니었음? 기다리는것도 지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말하는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민치정)는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음. 의사결정은 하나이고 머리수는 수천만인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결국 저자는 앙토넬과 같은 민주파들의 가지 않은 길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어떻게 그들의 대의민주주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을지 묻는 것이라고 생각함..
이거 진짜 훌륭한 책이고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라 많이 읽혀야 되는데 쩝
ㄹㅇ 아주 조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