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존재론은 도대체 세계의 현상을 추구하고 있는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것은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아주 넓게 규정해 그 존재자에게서 그것의 세계적합성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가? 이 두 물음 모두에 대해서 '아니'라고 대단해야 할 것이다. 데카르트가 연장성을 가지고 존재론적으로 원치적으로 파악하려고 시도한 그 존재나는 오히려 우선 손안에 있는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를 거치는 통과에서 비로소 처음 발견될 수 있는 그런 존재자이다. 이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특정한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자연)에 대한 존재론저긴 성격부여가-실체성의 이념뿐만이 아니라 그것의 정의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재하다와 실재하기 위해서의 의미도-[우리를] 어두움 속으로 이끈다고 하자.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신, 자아, "세계'를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그 존재론이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인 문제를 어떤 의미로건 제기하고 촉진하게 된다는 가능성만은 성립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이 경우 데카르트가 이를테면 세계에 대해서 존재론적으로 잘못된 규정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해석과 이 해석의 기초가 세계의 현상과 마찬가지로 우선 손안에 있는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존재도 건너뛰도록 만들었따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성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이 현상으로 인도하는 적합한 통로를 획득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단초를 비판적으로 논의하면서 우리가 던져야할 물음은 이와 같다. 현존재의 어떤 존재양식이, 데카르트가 "세계"의 존재와 동일한 존재, 즉 연장을 지정해 놓은 그 존재자에게로 접근하는 적합한 적급양식으로서 확정되었는가? 이 존재자에 이르는 유일하고 진정한 접근 통로는 인식함, 그것도 수학적-물리학적 인식의 의미로서의 인식함이다. 수학적 인식은, 우리가 파악된 존재자의 존재를 확실히 잡았는가 하는 것을 어느 때이건 확실히 인식할 수 있는 그런 존재자의 파악양식으로 통용된다. 그 존재양식상 수학적 인식에서 접근 될 수 있는 존재를 충족시키고 있는 그것이 본래적인 의미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자는 언제나 그것이 무엇인 바로 그것인 그런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세계의 경험된 존재자에게서 이 존재자의 본래적인 존재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 존재에서부터 이 존재가 여러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남아있는 것으로서 지속적인 머무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제시될 수 있다.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속적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수학이 인식한다. 존재자에게서 수학을 통해서 접근될 수 있는 그것이 그 존재자의 존재를 형성한다. 이렇듯 실체성의 개념 속에 감싸여 놓여있는 존재의 한 특정한 이념에서부터 그리고 그렇게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는 인식의 이념에서부터 "세계"에게 그것의 존재가 흡사 선고되는 셈이다. 데카르트는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의 존재양식이 이 존재자에서부터 앞서 주어지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의 근원이 드러나지 않고 그것의 권리가 입증되지않은 그런 존재이념(존재=지속적으로 눈앞에 있음)에 그건해서 세계에 그것의 본래적인 존재를 흡사 지령하듯이 한다. 따라서 세계의 존재론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어떤 하나의 우연하게도 특별한 평가를 받게 된 학문, 즉 수학에 의존함이 아니고 오히려 지속적인 눈앞에 있음으로서의 존재-이것의 파악을 수학적 인식이 각별한 의미로 충족시키고 있다-에 원칙적으로 존재론적으로 방향을 잡음이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철학적으로 명백하게 전통적 존재론의 영향을 근세의 수학적 물리학과 그것의 초월론적 기초위로 옮겨놓는다. 데카르트는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에게로 인도하는 적합한 접근통로의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없었다. 끊기지 않은 전통 존재론의 지배 아래에서 본래적인 존재자의 진정한 파악양식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결정이 내려져 있었다. 그 파악양식은 노에인, 즉 가장 넓의 의미의 "직관"에 있다. 디아노에인, 즉 사유함은 단지 하나의 기초지어진 이행형태일 뿐이다. 이러한 원칙적인 존재론적 방향정립에서부터 데카르트는 여전히 가능한 직관을 인지하며 존재자에 이르는 접근양식에 자신의 비판의 화살을 겨냥한다. 즉 사유에 대비하여 감각을 비판한다. 데카르트는 존재자가 우선은 그것의 본래적인 존재에서 자신을내보이고 있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우선" 주어진 것은 이러한 특정한 색깔의, 맛의, 딱딱한, 차가운, 소리가 나는 밀랍 사물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니 도대체 감각적 지각이 단지 인간의 육체와 정신과의 저 결합만을 제공한다는 것 그리고 보통 어느정도로 외부의 물체가 저 결합에 도움이 되거나 해가 되는지를 말해준다는 것을 유의하기만 하면 충분할 것이다. 감각은 도대체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에 있어 인식하도록 해주지 않으며 단지 "외부의" 세계내부적인 사물들이 육체와 결합된 인간존재에 도움이 되느지 해가되는지만을 알려줄 뿐이다. 그러나 감각적 지각은 어떤 종류의 사물이 (물체가) 그것 자체에서 실재하는지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서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얻을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물질 또는 물체의 본성이, 보편적으로 관찰할때, 딱딱함, 무게, 색깔, 또는 다른 어떤 감각적인 속성에 성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길이, 넓이, 깊이에서의 그것의 연장되어 있음에 있따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감각에서 자신을 내보이고 있는 그것의 존재양식을 규정하는 것이 데카르트에게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이, 그가 행한 딱딱함과 저항에 대한 경험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에 명백해졌다. 딱딱함이 저항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저항도 딱딱함과 마찬가지로 현상적 의미로 그것 자체에서 경험된 어떤 것 그리고 그러한 경험에서 규정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이해되지않았따. 데카르트에게 저항이란 그 자리에서 비키지 않음 정도를 말하니, 장소의 변화 아래에 놓여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물이 저항한다는 것은, 자신의 자리를 바꾸는 다른 사물에 비해서 하나의 특정 장소에 머물러 있는 것, 또는 그 사물이 자리를 바꾸는 다른 사물에 의해서 추월되는 속도로 자리르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딱딱함의 경험에 대한 이런식의 해석으로 인해서 감각적인 인지함의 존재양식이 그리고 그로써 또한 그러한 인지함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에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져버린다. 데카르트는 어떤 것을 인지함의 존재양식을 그가 아는 유일한 존재양식으로 옮겨놓는다. 어떤 것을 인지함은 이제 눈앞에 있는 두개의 연장된 사물이 일정하게 나란히 눈앞에 있음이 된다. 그 두 사물의 운동관계 자체도, 일차적으로 물체적 사물이 눈앞에 있음을 성격규정하는 연장되어 있음의 양식 안에 있다. 만지는 행동관계가 "충족되기"위해서는 만져지는 것이 아주 "가까이"있어야 함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것은 접촉과 이 접촉에서 알려지고 있는 딱딱함이, 존재론적으로 파악될 때, 두 개의 물체사물의 상이한 속도에 성립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의 존재양식을 가진 또는 적어도 생명체의 존재양식을 가진 존재자가 있지 않다면, 도대체 딱딱함과 저항이 자신을 내보일 수 없다. 이렇게 데카르트에게서는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에 이르는 가능한 접근통로에 대한 논의가 하나의 존재이념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는데, 그 존재이념이란 이 존재자 자체의 한 특정한 영역에서 읽어진 것이다. 지속적인 눈앞에 있음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이념은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존재를 극단적으로 규정하고 그 존재자를 세계 자체와 동일시하게 하는 동기가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동시에 현존재의 행동관계를 존재론적으로 합당하게 시야에 끌고 오는 것도 방해한다. 그리고 그로써 심지어 모든 감각적인 인지와 지성에 적합한 인지의 기초지어진 성격을 보고 그것들이 세계-내-존재의 한 가능성임을 볼 수 있는 길이 완전히 차단된다. 그런데 그것의 근본구성틀에 세계-내-존재가 속하는 현존재의 존재를 데카르트는 연장된 사물의 존재와 동일한 방식으로 실체로 파악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데카르트에 대한 비판적 논의로써 전적으로 그의 지평 밖에 놓여 있는 과제를 그에게 떠넘겨주고서는 그가 해결하지 못한것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데카르트가 세계의 현상을 알지 못하고 그로써 세계내부성 같은 것도 도대체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가 한 특정한 세계내부적 존재자와 그것의 존재를 세계와 동일시 할 수 있단 말인가? 원칙적인 논쟁의 장에서는 논쟁이 그저 학설기록적으로 파악 가능한 테제에만 매달려서는 안되고 오히려 방향정립을 위해서 문제틀의 사태적인 경향을 취해야한다. 그 경향이 비록 통속적인 파악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데카르트가 사유하는 사물과 연장된 사물로써 "나의 세계"의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철저한 해결도 요구주장했다는 사실은 그의 성찰에서 명백해진다. 어떠한 적극적인 비판도 없이 전통에 존재론적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 그로 하여금 현존재의 근원적인 존재론적인 문제틀을 밝헤 파헤쳐 드러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 세계 현상에 대한 그의 시야를 차단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세계 존재론을 한 특정한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의 존재론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것 등을 여태까지의 논의가 증명해야 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실제로 세계의 문제 그리고 주위세계적으로 우선 만나게 되는 존재자의 존재 역시 은폐된 채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데카르트는 그것의 존재에서 다른 모든 존재자에 기초를 부여하는 그런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에 대한, 즉 물질적인 자연에 대한 존재론적인 성격부여를 위한 근거를 놓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니냐고. 그리고 바로 그 물질적인 자연 위에, 즉 기초가 되는 층 위에 세계내부적 현실의 여타 다른 층들이 구축된다. 연장된 사물 그 자체 안에 우선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은 자신을 성질로서 내보이기는 하지만 "근본에서는" 연장 자체의 양태의 양적인 변양들인 그런 규정성이다. 이러한 그 자체가 또 환원될 수 있는 성질들 안에 아름다운, 추한, 적합한, 부적합한, 필요한, 불필요한, 등과 같은 특수 성질들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러한 성질들은 일차적으로 사물성에 방향을 잡아 수량화 시킬 수 없는 가치술어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 가치술어에 의해서 처음에 그저 물질적인 사물이었던 것이 하나의 재화로 각인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계층화와 더불어 고찰은 분명히 우리가 손안에 있는 도구라고 존재론적으로 성격규정한 그 존재자에 이르게 된다. 데카르트의 세계에 대한 분석이 이렇게 비로소 우선적으로 손안에 있는 것의 구조를 확실하게 구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분석은 그저 자연사물을 전적인 사용사물로 보충하기만 하면 되는데, 이 일은 쉽게 수행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세계의 특수문제는 일단 접어둔다고 해도- 세계 내부적으로 우선 만나게 되는 것의 존재에 존재론적으로 도달 할 수 있는가? 물질적인 사물성과 함께 암묵적으로 일종의 존재가=즉 지속적인 사물의 눈앞에 있음이-정립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이때 존재자를 추가로 가치술어를 가지고 장식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존재론적인 보충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이러한 가치성격 자체가 단지 사물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존재자의 존재적 규정성으로 남을 뿐이다. 가치술어를 추가해도 재화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런 새로운 해명을 얻을 수 없고 그러한 추가는 이러한 재화를 위해서 단지 다시금 순전한 눈앞에 있음이라는 존재양식을 전제할 뿐이다. 가치란 한 사물이 가지고 있는 눈앞의 규정성이다. 가치는 결국에 가서 그것의 존재론적인 근원을 유일하게 기초층으로서의 사물현실이라는 선행적인 단초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상학 이전의 경험이 벌써 사물적으로 의미되고 있는 존재자에게서 사물성에 의해서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어떤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물적 존재는 보완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가치의 존재 또는 실체가 긍정의 한 양태로 파악한 가치의 타당성을 무엇을 말하는가? 가치가 사물에 붙어 있다 라는것은 존재론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거? 이러한 규정들이 어둠 속에 남아 있는 한, 사용사물을 자연사물에서부터 재구성하는 일은-문제의 원칙적인 전도를 전적으로 접어둔다고 해도- 존재론적으로 의심스러운 시도이다. 그리고 우선 가죽이 벗겨진 사용사ㅜㄹ을 이렇게 재구성하는 일은 언제나 이미 그것의 전체성을 재구성에서 다시금 산출해야할 그런 현상에 대한 선행적인 긍정적인 시야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그것의 가장 고유한 존재구성틀이 앞서 먼저 합당하게 설명되지 않았다면 이 재구성은 건축계획도 없이 건축하는가? 전통적인 세계 존재론을 이렇게 재구성하고 보충하는 일이 결과적으로 앞에서 행한 도구의 손안에 있음과 사용사태 전체성의 분석이 출발점으로 삼은 그 동일한 존재자에 이르고 있는 이상 그것은 마치 실제로 그 존재자의 존재가 해명되거나 단지 문제만 된 듯한 인상을 일꺠워 준다. 데카르트가 고유함으로서의 연장성을 가지고 실체의 존재를 적중시키지 못한 것과 같이, 가치있는 속성에로의 도피도 손안에 있음으로서의 존재를 시야로조차 데려오지 못했으니 존재론적으로 주제로삼지 못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데카르트는 세계에 대한 물음을 우선 접근 가능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로서의 자연사물성으로 축소시키는 것을 첨예화 시켰다. 그는 한 존재자의 추정적으로 가장 엄밀한 존재적 인식만이 그런 인식에서 발견된 존재자의 일차적 존재에 이르는 가능한 접근통로이기도 하다는 견해를 고정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사물 존재론의 "보충들"도 원치적으로 데카르트와 같이 동일한 독단적인 토대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미 세계와 우선 만나게 되는 존재자를 건너뛴 것이 우연이 아니며, 간단히 만회할 수 있는 간과가 아니고 오히려 현존재 자체의 본질적인 존재양식에 근거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현존재의 분석론이 이러한 문제틀의 테두리 안에서 가장 중요한 현존재의 주요 구조들을 투명하게 만들 떄, 존재 일반의 개념에 그것의 가능한 이해의 지평이 지정되고 그래서 또한 비로소 손안에 있음과 눈앞에 있음이 존재론적으로 근원적으로 이해 될 때, 그럴때 비로소 지금 수행된 데카르트 적이며 원칙적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세계존재론에 대한 비판이 철학적으로 정당했음을 인정받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1. 우리에게 결정적인 존재론적인 전통의 시원에-명시적으로 파르메니데스에게서-왜 세계의 현상이 건너뛰어졌는가? 이러한 건너뜀이 끊임없이 거듭되는 것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2. 왜 건너뛰어진 현상의 자리에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가 존재론적인 주제로서 끼어드는가? 3. 이러한 존재나는 왜 우선 자연에서 발견되고 있는가? 4. 필연적인 것으로 경험된 그러한 세계존재론의 보충이 왜 가치현상의 도움 아래에서 이행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비로소 세계 문제틀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에 도달하게 되고, 그 소홀의 근원이 제시되고 전통적인 세계존재론을 퇴치해야할 정당한 근거가 증명제시된다. 데카르트에 대한 고찰에서 통찰해야 할 점은, 얼핏 보아 자명한 세계의 사물들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추정상 가장 엄밀한 존재자에 대한 인식에 방향잡는 것과 같이 그 위에서 세계, 현존재 그리고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우선적인 존재론적 구성틀을 현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그런 지반의 획득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공간성이 분명히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를 함께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경우 종국에 가서는 "세계"에 대한 데카르트의 분석을 "구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연장성이 물체적 사물의 모든 규정성에 대한 전제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끄집어내옴으로써 데카르트는 일종의 선험적 토대에 대한 이해를 예비한 셈인데, 그 내용을 그후 칸트가 한층 더 철저히 확정했다. 연장성에 대한 분석은 일정한 한계에서는 연장된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명시적인 해석의 소홀과 무관한채 남아 있다. 비록 연장성으로의 소급에서 세계의 공간성도, 주위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의 발견된 공간성도, 심지어 현존재 자신의 공간성도 존재론적으로 개념파악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선 발견된 연장성을 "세계"의 근본규정성으로 정립하는 것은 그 나름의 현상적 권리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