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절되지 않은 세계에서의 관계맺음


청소년기를 다룬 작품들, 특히나 여성 등장인물들이 주를 이루는 작품들에서 흔히 인물들 사이에 동성애적 뉘앙스가 저변에 깔려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것은 독자들의 수요에 맞추고자 하는 지극히 경제적인 산물일 수도 있다. 특히 만화의 경우, 지금도 서비스컷이란 게 오롯이 성횡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을 오타쿠 시장의 근본적인 구조로 들어가봄으로써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오타쿠 경제학에서 우회하여, 청소년들의 세계관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마냥 경제학적인 산물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청소년들이 맺는 관계가 가지는 특성, 아직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기에 필연적으로 모든 것이 긴밀한 상호작용으로 연결되는 특성과 관련이 있다.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981fa1bd625312be8fceefc78018db5c464a7d594b77bea57d0826c9fa479360d16d55757176c44176fe61fadd21c28034aec1a7793105a7315


청소년이란 존재가 과도기적인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청소년은 성장을 겪으며 이전의 유아적 세계. 감각과 생각, 말과 행동이 하나처럼 유기성을 띤 세계로부터 미끄러져 나오게 된다. 본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요소들이 차츰차츰 뚜렷한 윤곽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의 세계다. 그건 혼란에서 구조로 나아가는 하나의 신화와 다름 아니다.


일례로 우에시바 리이치의 만화는 청소년 세계가 가진 혼란성을 잘 대변해준다. <가면속의 수수께끼>로 번역된 <디스커뮤니케이션>은 우에시바 리이치식의 에로틱한 환상이 곁들여진 연애 만화다. 초반부 정도까지는 전파계 남주인공에게 끌린 여주인공 좌충우돌 러브코미디처럼 전개되지만, 이 만화의 진짜 면모는 여주인공이 이끌림근원을 찾아다니다가 서로 반대의 입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세계에 떨어지면서 나타난다. 이것은 청소년들이 관계맺음의 진실성을 찾아나서는 긴 서사시로 읽을 수 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괴스럽지만 흥미로운 만화이니 나처럼 변태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읽어보길 권다.


무엇보다 우에시바의 만화가 가장 압권인 점은 컷의 밀도성이다. 어떠한 분별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무의식'의 사물들로 꽉찬 은 인물들의 내면을 표상하는 혼란 그 자체에 가깝다. 위의 춤추는 씬은 <수수께끼 그녀X>라는 연애 만화에 나오는 컷으로, 여주인공과 긴밀한 관계를 되리라는, 그러니까 여주인공을 자신의 세계에 '편입'하게 되리라는 일종의 계시가 남주인공의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에시바의 만화에는 춤추는 장면이 꼭 나오는데 최신작인 <오쿠모의 플래시백>에서도 마찬가지다. 춤은 환상, 추억, 꿈과 항상 연결되어 있는 동작인데, 그런 사변적인 설명과는 별개로 나는 우에시바가 그려내는 몽상적인 춤 장면을 정말 좋아한다. 거기에는 또한 하나의 환상에서 폭발하는 '만화적인 힘'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결국 청소년은 아무것도 불변되지 않는 세계로부터 뚜렷이 분절된 세계로 나아가는 서사를 완성하는 존재다. 성장한다는 건 적어도 이제는 세계와 내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 모든 말을 대변하는 옹알이 대신 '또박또박' 말을 해야한다는 사실, 그러한 세계에는 무수한 사람과 감정이 있고 그것들이 봉합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것이다.


우정과 사랑이라는 관계맺음의 문제가 이 한복판에 가로놓여있다. 본래 아이들의 세계를 대변하는 감정은 '울음'이며, 그것은 유일한 의사소통 체계였다. 그러나 관계 맺는 방식이 변화하면서 또렷한 말을 배우고, 부모의 세계와 분리되면서 새로운 관계맺음을 배운다. 이때 또래집단이라는 처음 보는 존재가 세계에 등장하는데, 이들은 아직은 친구와 연인으로 분절되지 않은, 하나된 존재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이제 동성애적 성향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아직 분절되지 않은 세계에서의 관계맺음이다.


{사족으로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강스포 있음)를 이러한 관점을 투과하여 읽어보면 좋겠다. 성장이 우정과 사랑의 분절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한스는 그러한 성장에 반하는 행동을 한 셈이고, 그것은 사회가 원하는 '어른'의 정의에 부적합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 세계로의 진입에 실패한 한스가 맞이할 수 있는 결말은 자명하다.}




2. 분절하지 못하는 마음가짐


여기까지 오면 의문점이 남는데,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모든 백합물의 결말은 반드시 비극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린 아직 백합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했다.


청소년물에 등장하는 갈등은 대개 '나와 세계 사이의 접합성'이란 문제로 귀결되는데 이는 '세카이계'라는 장르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유년기에는 둘의 양립에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제 세계와 나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이때 겪는 분절의 경험 덕분에 몇몇 청춘물에서 '청소년기란 좋은 시절의 모든 것을 두고온 그런 시기'로 표현되는 것이다.


우리가 성장을 말할 때 그것은 개인의 내면적인 성장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건 내면이 바깥 세계에 융화되는 과정이며 그동안 유지해온 세계를 사회와 접합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렇기에 성장은 매우 사회적인 활동이며 성장한다는 것은 결국 사회가 가진 보편 의식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성장이라 부르는 것의 정체인지 모른다.


이때 동성애는 가장 반사회적인 활동이 된다.(이러한 전제로 미시마 유키오를 이해해보아도 흥미로울 것이다.) 우리는 이제 또래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한때 긴밀했던 관계들을 낭만적으로 투과하지 못하고 조소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너도 어른이 될 거란다라는 진부한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말이다.


동성애, 넓게는 러브코미디/순정 그리고 청춘물은 이러한 사회적 통념을 거슬러 아직 세계가 하나였던 때의 낭만을 간직하는 일종의 병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내심 다른 사람과 관계맺음에 있어서 긴밀성을 갈망한다. 그런 낭만적인 긴밀성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청춘물의 근원이다.


백합 역시 세계의 긴밀성을 붙잡아두고자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관계맺음에 있어서 서로 구분되지 않는 감정들은 당연 강한 긴밀성을 띄고 있다. 성장이라는 사회적 활동에 반(反)함으로 인해 그러한 긴밀성은 도리어 더욱 짙어진다. 차츰차츰 분절되어 갈 운명의 세계에서 긴밀성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백합이 지키고자 하는 낭만이다. 그것은 분절되는 세계로부터 분절하지 못하는 마음가짐이다.




3. 충돌, 환상, 성장, <그래마을>


그래서 백합의 주요 문제는 청소년기에 으레 겪는 세계와의 충돌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백합 역시 모든 청소년 문학처럼 '어른이라는 낯섦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가 주요한 문제거리로 작동하는 것이다.


<가면속의 수수께끼>가 그랬던 것처럼 청소년의 세계에는 어느 정도든 환상성이 가미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건 환상문학이 청소년의 세계와 공유하는 '충돌'이라는 주제 때문이기도 하다. (토도로프는 환상 문학을 실재 층위와 환상 층위의 충돌이라고 설명했으며, 이 충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환상문학의 장르를 가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것이 많은 청소년물이 환상과 결합되는 이유다. 그것들의 근저는 분명 '환상'이다.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981fa1bd625312be8fceefc78018db5c464a7d594b77bea57d0826c9fa479360d16b83b54156a5aea79cafe89274396e726ca3ddbe13b08b7bc75


(오늘 소개할 만화는 아니지만) 이시구로 마사카즈의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가 무수한 장르와 연결되는 지점이 거기에 있다. 주인공 호토리가 살아가는 마루코 상점가는 그 자체로 이미 호토리의 세계이며, 거기에서 호토리는 각양각색의 미스테리, SF, 로맨스, 청춘물 등등과의 낯선 충돌을 경험한다. 당연히 그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성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호토리가 또 다른 주인공인 콘 후타바와 맺는 긴밀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981fa1bd625312be8fceefc78018db5c464a7d594b77bea57d0826c9fa479360d16d55757176c44176fe61fadd24a79581ae21220c11024707c


콘은 일련의 사건들로 작중에서 가장 고립적인 인물이며, 이때 호토리는 콘의 고립을 돌파하고 세계와 접목시키는 역할이다. 이는 청소년 성장기의 정통적인 구도에 가깝다. (비슷한 구도는 물론이고 심지어 어느 정도 비슷한 연출을 <연민의 굴레>라는 웹툰에서 엿볼 수 있다.) 이들의 관계성은 백합과 우정 사이에 가로놓여 있으나 백합으로 진입하기 전에 콘의 상처가 해소되면서 '걷는 새' 호토리를 떠나 '나는 새'가 되어 성장을 완성한다.


결과적으로 <그래 마을>은 비교적 명쾌하고 낙관적인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어른'을 선물한다. 마치 시장가처럼 얽혀있는 호토리의 학창시절 3년을, 정말 시장가의 길목처럼 파편적으로 배치한 것은 마을의 이야기가 곧 호토리의 이야기와 하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호토리는 앞으로도 이 마을에서 살아갈 것이며, 그럼에도 어찌 되었든 마을은 돌아가기에, 호토리의 성장은 긴밀성을 잃지 않고 낙관적일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안정적인 세계에서는 백합 또한 발생하지 않는다.




4. 역성장의 시작, <제7여자회 방황>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981fa1bd625312be8fceefc78018db5c464a7d594b77bea57d0826c9fa479360d16d55757176c44176fe61fadd24f2f5f1fef4e7c951060cf4d


이제 이 만화를 보라. 이시구로의 문하생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기에, 이시구로와 상당히 비스무리한 측면을 공유하는, 그러면서도 한층 괴기하고 뒤틀린 상상력에 순정적인 감성까지 얹은 츠바나 작가다.


제7여자회 방황은 본래 10권까지 정발되었어야 하나 6권까지 정발된 후 멈춰버린 비운의 작품이다. 그외에 <겉보기 이중성>이나 <혹성 클로젯> 같이 대표작으로 꼽히면서도 여전히 번역되지 못하는 작품들도 많지만, 여기에선 최소한 정발 빛은 보다가 꺼진 제7여자회 방황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안타깝게도 이 만화도 백합이 주류는 아니다. 만화는 세상 모든 사람이 '운명'에 의해 통제되는 근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배정받은 번호에 따라 짝궁을 맺는 '친구 시스템'이 있는 학교에서, 타카기와 카네라는 두 주인공이 만나며 겪는 일들을 그려내고 있다. 이시구로와 비슷하게 기본적으로 일상물에 여러 장르가 결합되는 방식이다.


일단 세계관부터 제정신이 아닌데, 이 '운명'이란 시스템은 (마치 어른들의 정형적인 세계인듯) 부조리하게 다가오며, 작중에는 '디지털 천국'이란 곳이 있어 사람이 죽어도 디지털 천국에 인격을 옮기면 '유령'처럼 살아갈 수 있다. (실제로 츠보이라는 죽은 친구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덕분에 타카기와 카네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반적으로 가장된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이곳에서는 '긴밀성'이란 게 이미 제거되어 있다.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981fa1bd625312be8fceefc78018db5c464a7d594b77bea57d0826c9fa479360d16b83b54156a5aea79cafe8927439bb67ace3884ec3f25485951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981fa1bd625312be8fceefc78018db5c464a7d594b77bea57d0826c9fa479360d16b83b54156a5aea79cafe89274397b57bce688bef388afea768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981fa1bd625312be8fceefc78018db5c464a7d594b77bea57d0826c9fa479360d16b83b54156a5aea79cafe892743c9e121ce3e8bbb38722c831a


사실상 작품의 진짜 주인공쪽인 타카기는 살면서 한 번도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타카기의 세계는 위선적인 이 세계와 같이 결핍투성이며, 이는 이시구로가 그려낸 '본래 유기적인 세계'와는 반대로 '본래 분절되어 있는 세계'다. 그렇기에 유기적인 세계에서의 분절을 겪는 성장과는 반대로 타카기가 행하는 것은 (차라리 퇴행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역성장'이다.


기존 성장의 공식을 뒤집는 <제7여자회 '방황'>의 전체적인 골자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는 <가면속의 수수께끼>처럼 긴밀한 관계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결핍에서 긴밀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성장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불안정하고, 치열하다. 성장이 사회적인 세계를 온전히 내면화 하는 과정이었다면, 역성장은 사회적인 세계를 극복하여 내면의 세계를 되찾아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금단의 사랑'이라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세계와 '나'라는 선택 사이에서 세계 대신 긴밀성을 잉태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안정과 치열함에서 형성되는 '긴밀성' 자체가 바로 백합적인 요소다.(일례로 <소녀종말여행>에 나타난 백합 요소는 포스트아포칼립스라는 상황하에서 여정, 생존, 삶과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그 긴밀성이 깊어진다.)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981fa1bd625312be8fceefc78018db5c464a7d594b77bea57d0826c9fa479360d16b83b54156a5aea79cafe892743cee177cf648bbb3d5afe282a


인간을 나무로 만드는 혹성에게 납치되는 에피소드에서, 타카기와 카네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은 '안도감'이다. 그것은 '세계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믿음, 또는 소망'으로 타카기와 카네가 불안정한 세계의 환상과 충돌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그러나 '운명'이 지배하는 세계관인 이상, 두 사람에게는 필연적으로 어른의 세계가 다가오며, 타카기가 믿는 안도감은 다소 환영적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게, 그들의 긴밀성 사이에는 '제7여자회'라는 인위적인 시스템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981fa1bd625312be8fceefc78018db5c464a7d594b77bea57d0826c9fa479360d16b83b54156a5aea79cafe89274398b572c7648dbf34342b0f2c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981fa1bd625312be8fceefc78018db5c464a7d594b77bea57d0826c9fa479360d16b83b54156a5aea79cafe89274399e0259e6ad9e03d008015c8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기저에 깔린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만화는 유독 타카기와 카네가 엇갈리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데, 이는 카네는 '어른'을 받아들이기 위한 순행적인 성장을 겪고, 타카기는 지금의 긴밀성을 계속해서 심화시키며 이 세계의 '운명'을 역행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이 엇갈림이 자아내는 것 자체가 바로 제7여자회 '방황'인 셈이다.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981fa1bd625312be8fceefc78018db5c464a7d594b77bea57d0826c9fa479360d16b83b54156a5aea79cafe8927439ee570cc6f85bb3df91532d3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981fa1bd625312be8fceefc78018db5c464a7d594b77bea57d0826c9fa479360d16b83b54156a5aea79cafe892743c9b225ce6fd8ed6f8b3efe49


<그래마을>이 그랬던 것처럼 작품은 중간중간 파편적인 시공선을 삽입하여 작품을 흐트러뜨린다.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처럼 이 기억들은 파편화된 단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카기는 이러한 단상들을 되찾아나가는 존재다. 과거부터 미래까지 어지러이 연결된 '제7여자회'의 방황은 분절된 세계를 유기적인 긴밀성으로 봉합하고자 하는 긴 여정과 다르지 않다. 작품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깊어지는 후반부에서 성장과 역성장의 엇갈림이 극에 달하며 두 사람, 7여자회의 세계를 벗어나 성장하려는 카네와 이 긴밀성을 지속하고자 하는 타카기는 결국 충돌한다. 이것은 기존의 '나'와 세계를 선택하는 문제의 연장이면서도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현실이냐 낭만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도피한 연인의 딜레마를 떠올리게 한다.


<제7여자회 방황>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겠지만 일단 내용적인 부분은 여기서 그치기로 한다. 이제 중요한 건 타카기와 카네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다. 이들은 과연 엄밀한 의미에서 백합이라고 할 수 있을까?




5. 역성장에서 과성장으로, '백합'에서 '엄밀한 백합'으로


실상 타카기와 카네는 여기에서 설명한 조건은 전부 갖춘 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작품은 상호의존적인 호토리-콘의 구도를 가져오면서도 그 기저에 깔린 전제는 완전히 뒤집었으며, 차라리 <소녀종말여행>과 같은 구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우정과 사랑 사이에 분별을 간직하지 않은 존재라면, 이 작품에서 표방한 둘 사이의 우정은 사랑과 구분되지 않는 백합이었어야 한다.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981fa1bd625312be8fceefc78018db5c464a7d594b77bea57d0826c9fa479360d16d55757176c44176fe61fadd2497a5d4abe48279010e7917d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981fa1bd625312be8fceefc78018db5c464a7d594b77bea57d0826c9fa479360d16d55757176c44176fe61fadd24e2c5e4bed4b219710bbcb28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백합이 아니다. 분명 그러한 기질이 존재하는데도 이것이 백합이 될 수 없는 건 아마 우정과 사랑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모호성'이 오히려 '사랑', 특히 '에로티시즘'적인 성격을 무마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백합적인 작품들'은 모순적으로 백합과 명확한 경계선에 의해 엄밀하게 규정된 장르 바깥으로 퉁겨져나간다.(재밌는 점은 이 장르의 시초인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는 우정과 사랑이 구분되지 않는 형태의, 지금 기준으로 '덜 엄밀한' 백합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빙하의 녹는점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다시 말해 어떻게 이곳에 '사랑(더 강하게는 에로티시즘)'이 개입될 수 있는가?


그것은 긴밀한 두 사람의 세계에 사랑이라는 분절이 나타날 때에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분절은 세계를 거부하고 다시 유기성으로 퇴행하는 역성장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상투적인 표현을 쓰자면) '어른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깨닫게 되는 성장이며, 그것을 너무나 일찍이, 과하게 겪는 '과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백합으로 많이들 일컬어진 <이윽고 네가 된다>와 <시트러스> 같은 작품들이 다루는 것은 오히려 인물들의 성장이다. 두 작품 모두 반대격에 있는 인물들이 교차하며 발생하는 충돌을 다루는데, 이러한 충돌은 이미 언급했듯 '어른이라는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에 대한 고민이다. 재밌는 것은 두 인물이 내면적으로나 상호 간에나 상반되는 지점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내면에 이미 분절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두 분절이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과성장으로부터 본격 백합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변증법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 자신이 이미 자신의 반테제이며, 서로가 서로의 반테제인 동시에 진테제다.


그래서 본격 백합에서 성장은 오히려 세상을 받아들이는 이질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옌롄커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에서 그러했고 케루악이 침대 위의 여자들에게 삶을 물었듯,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작가들이 에로티시즘에 의미를 부여했듯, 그들은 백합을 통해서 세계의 의미를 양산하고 나름대로 세계를 상징화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세계가 완성되는 지점은 서로의 몸에 존재한다.




결론.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981fa1bd625312be8fceefc78018db5c464a7d594b07bee39ce22beae5251c207f217b75ca9bf4025eb52ccb9a3c65519e7bbda1b0c12082ae1


어쩌다보니 백합 총론이 되어버렸지만, 다시 <제7여자회>로 돌아오면서,


이 작품은 분명 본격 백합이라고 할 수 없으나 만화가 표현할 수 있는 낭만적인 힘을 잘 보여준다. 만화는 아마 다른 매체에서는 좌절된 '낭만'이라는 힘을 가장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매체일지 모른다. 비록 그것이 문화산업이 만들어낸 환상일지 모르나, 그곳에 있는 소년소녀들의 이야기는 누군가 긴밀하게 간직하려 했던 어떤 세계의 편린임에는 틀림없다.


백합은, 특히 본격 백합은 분명 매니악한 장르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플라토닉한 특성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다. 이는 나쁘게 말해서 지극히 일차원적인 욕구일 수도, 좋게 말해서 잃은 순수에 대한 원초적인 갈망일 수도 있다. 소녀들이 손을 잡고 웃음 짓는 모습은 우리에겐 다분히 환상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제시한 백합의 정리는 실제로 애호하는 사람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모든 것에는 항상 다양한 양상이 있다. 세상은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와 <미안하지만 나는 백합이 아니야>가 함께 공존하는 그런 것이기에.


그걸 하나의 혼란이라 한다면 우린 아직 유년기를 벗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앞으로 만화같은 삶이 주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무수히 많은 삶을 그려낸 무수히 많은 만화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거면 충분히 낭만적인 삶이 아닌가.




7cea8274b28268f039e998a518d604038b5aef34567076155c19




분명 간편하게 쓰려고 했는데 총론을 써버렸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원래는 그냥 <제7여자회>가 좋은 작품이라는 걸 소개하고 싶었음.

다른 쓰고 싶은 작품도 많았고 쓸만한 것도 많았는데 뭔가 <제7여자회>를 쓰고 싶었음.

그냥 츠바나 상태임.


혹시 마음에 들었으면 검색하면 나오니까 한 번 봐보셈

비슷한 감성 좋아하면 위에 소개한 이시구로 마사카즈랑 우에시바 리이치, 이런 작가 보고

재밌음


만화를

좋아하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