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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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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어릴 적 이따금씩 교회에 가면 나는 예수상을 바라보곤 했다. 당시 나에게 기독교란 교회와 성당이 조금 다르다는 것. 예수와 성모 마리아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불교, 절 그런 곳과 비슷한 종류인 것. 엄숙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 신기한 공간. 그 정도였다. 기독교가 가지는 종교적, 사회문화적, 사상적 내용이며 가치는 무슨..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뭣도 모르고 따라간 미사도 그저 제사 비슷한 행사겠거니 하며 조용히 앉아있었을 뿐이고 그 와중에 내 관심을 끄는 형상이 예수상이었을 뿐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받으시는 그분을 동정하려 쳐다보았을까 절대 아니지. 하물며 그게 신앙에 의한 호기심이었을까, 차라리 저게 어떻게 지탱이 되느냐는 물리학적 의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았다. 나는 그 형상 자체의 흥미로움에 끌렸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형상과 의례 자체가 주는 거룩한, 적어도 그 진지함만은 특별했다. 종교는 조금은 거북하면서도 마치 바다와 하늘처럼, 내 심상에 그 부정할 수 없는 존재감을 어긋남 없이 새겨넣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때의 내 눈에도 종교는 인생살이 쓸모와는 당최 관련이 없어 보였지만 필요한 일이겠다 싶은 느낌, 짐작만은 있었다. 종교가 주는 그 막연하지만 신비한 존재감은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그 비범한 형상과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종교 외에 그리 많지는 않았다. 아마 종교의 기능 중에는 더 크고 좋은 것에 대한 경험을 주는 목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경외감일까? 아무튼 무교적 가풍에서 자란 나에게 종교 의례는 그만큼 막연하면서도 신기하고 신비한, 꽤 재미난 행사일 따름이었고, 그때의 나보다 박식하고 신실하다는 점만 빼면 파이도 마찬가지였으리라고 본다.


<파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어린 파이는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동시에 믿는다. 신과 종교에 대한 깊은 탐구심 때문이 아니라 종교 의례가 주는 신비함과 정서적 만족감 때문에 말이다.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은데 그 세 종교가 모두 사랑과 평화를 추구한다면 왜 셋을 한꺼번에 믿으면 안되냐는 식이다. 참으로 순진하지만 합리적이다. 자기네 종교만 믿었으면 하는 교인들로서는 깝깝한 노릇이지만 파이에겐 마냥 재밌는 일이면서 실리적이기까지 하다. 이렇듯 파이는 종교 세 개 믿는 것 쯤이야 뭐 대수냐는 태도로 이 세계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사랑한다. 그가 사랑하는 세계에는 부모 형제, 친구, 서로 이름이 같은 못난 두 어른이 있고, 종교와 성직자, 입고 먹을 것들, 재미난 것들, 동물원의 동물들과 아버지의 어려운 교훈 덕택에 친구가 아닌 짐승에 불과함을 일찍이 알았던 호랑이가 있다. 그리고 신이 있다. 파이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한순간에 그들 모두를 잃어버린다.


태평양 한 가운데서 벌어진 선박 사고는 파이의 고향이며, 부모 형제며, 동물원의 동물들까지 모두 앗아갔다. 망망대해 위에 홀로 남은 파이의 세계에 신은 아직 존재하는가? 파이가 독실하게도 지켰던 의례들은 무엇을 위함이었는가? 파이의 생존기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처절하다. 남은 거라곤 구명보트와 얼마간의 구호품들, 말 대신 이빨을 내세우는 호랑이, 고통의 재료가 되는 추억들과 셋씩이나 믿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종교 뿐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종교가 무슨 소용이랴. <파이 이야기>가 묘사하는 현실은 비범한 종교적 표현들만큼이나 처절하다. 아니 오히려 종교적 표현을 써야만 할 정도로 극단적이라는 말이 맞으리라. 퍽하고 깨져버리는 턱뼈와 두개골, 처연하게 이어지다 툭 하고 끊어져 버리는 숨통, 망망대해 위에서 벌어진 죽음의 순간들은 모두 허망하고 엄숙하다. 땡볕으로 헐떡거리는 호흡과 극심한 갈증은 되려 치열하고 장엄한 삶의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과 바다 사이에 끼어 짜디짠 공기에 압사해버릴 것 같은 파이에게 한 모금 물은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그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생리적인 조건들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인식의 초점을 극단적으로 좁힌다. 담수를 만들고 낚시를 하기 위한 도구의 제작, 식량의 비축, 고작 몇 미터를 두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호랑이와의 영역 다툼, 짐승 길들이기, 지극히 현실적이고 극도로 위험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인식의 초점은 송곳처럼 모아져야 한다. 그러나 파도로 인해 뒤집힌 인식은 광활한 수평선을 넘어 천공을 향하고, 신이라는 하나의 존재를 찌른다. 신이시여 왜 이러십니까? 신이시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왜 바다 위에서 신을 찾는가? 파이는 여전히 신을 믿고 있다. 인식을 좁히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고, 인식을 넓히지 않으면 이 삶을 받아들일 수 없다. 파이는 우습게도, 스스로 선택한 신을 스스로 버릴 수가 없었다.


한때는 의심도 쓸모 있는 법. 우리 모두 겟세마네 동산을 거쳐야 한다. 예수가 의심했다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 예수가 기도하며 분노에 찬 밤을 보냈으니, 십자가 매달려 '주여,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울부짖었으니, 우리도 의심해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나아가야 한다. 의심을 인생 철학으로 선택하는 것은, 운송수단으로 '정지'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다.”


의심이 쓸모가 있다면, 믿음도 쓸모가 있을까? 파이는 죽기보다 삶을 택했고, 목숨을 위협하는 현실의 조건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되 믿음으로 삶을 영위한다. 그 순간 신은 그저 원망의 대상이 되어줄 뿐이었으나, 결국 죽음조차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한 용기를 내어준다. 파이는 겟세마네 동산이 아닌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신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결국 믿음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살아남아 땅에 발을 디딘다.


왜 우리는 대답을 끌어낼 수 있는 이상으로 질문을 하는 거지? 잡을 고기가 없는데 왜 그렇게 큰 어망을 갖고 있냐구?”


망망대해에서 살아남으려면 고기를 잡아야 한다. 고기를 잡기 위한 가장 적절한 질문은 무엇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오줌싸개라는 별명으로부터 무한을 은유하는 파이로 대체한 이야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물리적 시행착오, 원망의 대상이 용기의 근원임을 깨닫는 생존기를 지나, 리처드 파커를 향한 분노와 사랑이 통곡으로 끝나버릴 때까지, 거대한 파도가 출렁대는 파이의 삶 속에서 인식의 초점은 이리로 저리로 끊임없이 밀려다니며 확장되고 재구성된다. 인간은 질문을 바꿈으로써 인식을 바꾸고, 대답을 끌어낼 수 있을 만큼 적절한 어망을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파이 이야기>는 독자들로 하여금, 저마다의 대답을 이끌어내는 이중 삼중의 질문 같다. 파이의 이야기는 진실인가? 허구인가? ‘파이’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의 의미는? 구명보트에 올라탔던 짐승들은 무엇을 은유하는가? 비유가 맞긴한가? 이 책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이야기인가? 신을 믿는 아이의 생존기, 어른이 된 생존자의 회고, 믿어지는 이야기와 믿고 싶은 이야기, 각기 다른 시점의 파이가 들려주는 세 가지 이야기 중 어느 것이 진실인가? 만약 이야기가 제대로 이야기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으로써 우리에게 벌어진다. <파이 이야기>는 나에게 벌어진일이다. 그래서 나는 파이의 이야기를 믿게 된다. 이미 믿어지는 것은 버릴 수 없다. 보험회사 직원들이 끝내 파이의 원래 이야기를 그냥 버릴 수는 없었던 이유처럼, 파이가 신을 버릴 수 없었던 이유도 신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벌어진 탓이리라. 그러나 작중에 신은 등장하지 않고, 묘사되는 것이라곤 파이가 감각하는 모든 현상들 뿐이다. 그렇다면 거대한 식인 섬은 과연 진짜인가? 눈이 먼 채로 이야기를 나눈 요리사의 목소리는 진짜인가? 리처드 파커의 목소리는? 짐승들 간의 다툼은? 생존의 이야기 자체는?


단순한 것도 못 믿는다면, 왜 살아가고 있죠? 사랑이라는 건 믿기 힘들지 않나요?”


작중 파이의 삶은 사실상 그 자체로 범신론이 되어 신의 존재를 체현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저 쓰여진 이야기만을 읽을 뿐이다. 그래서 독자는 파텔을 인터뷰하는 작가일 수도, 믿어질 만한 이야기를 요구하는 보험회사 직원일 수도, 파이 자신일 수도 있다. 어떤 이야기가 믿어지는가? 어떤 이야기를 믿고 싶은가?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가? 파이는 종교를 셋이나 믿었다. 형식적으로는 모두 저마다의 정서적 만족감을 위한 종교 의례일 따름이지만, 결국은 모두 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이 세계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던가? 그 수많은 고통이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말이다. <파이 이야기>가 구조하고 있는 세 개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각각 종교와 현실과 문학의 차원에서 지어진 그 세 개의 이야기는, 삶이란 고통과 사랑을 모두 긍정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고통만으로도 사랑만으로도 삶은 긍정되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이 세계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사랑하라. 그러기 위해 신을, 존재를 경외하라. 그리하여 삶은 긍정될 수 있다. 평화를 찾은 파텔이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일지 모른다. 굳이어 결론지어버리는 것이 저자의 바람은 아니겠지. 다만 하나 분명한 것은, 나는 <파이 이야기>가 아주 마음에 든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