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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쯤에 엄마가 어린이용으로 각색된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사주셨다. 어린이용으로 각색됐다고 하지만 작품들 속 비극적인 죽음들의 형태는 그대로 보존됐기에, 어린 나이에도 심각한 태도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리어 왕」을 가장 높게 평가했다. 리어 왕의 몰락과 글로스터 가의 몰락이 어우러지는 방대한 줄거리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취향이 바뀌어서 「맥베스」를 가장 좋아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리어 왕」은 거대한 줄거리를 가진 작품들의 모범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늦여름」을 읽다가 「리어 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이번 기회에 다시 읽어보았다.


어렸을 때는 「리어 왕」을 막연히 권선징악의 서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중의 리어 왕을 폭군 정도로 여겼다. 아첨에 눈이 멀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코딜리어와 켄트를 내쳤기 때문이다. 거너릴과 리건에게 받는 대우도 가슴 아프지만 인과응보라고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도 리어 왕은 경솔한 인물이며, 그를 새삼 동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전과는 달리 그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다. 통상 왕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력자로 묘사되고는 하지만, 사실 오히려 그의 막중한 책임과 그에게 기대려는 주변 세력들의 간계에 의해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즉 왕이란 권력은 있으나 주변 환경의 통제에 휘둘리는 신세다. 리어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왕으로서 주변을 통제한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남들이 주체성을 갖고 리어 왕을 조종하는 동안, 리어 왕 자신은 조종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주체적인 모습이라 여겼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줄 이 아무도 없느냐?" 이 탄식이 리어 왕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리어 왕'에서 '노왕 리어'로 변모하며 권력을 이양했기 때문에, 그에게 주체성이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 신하들조차 떨어져 나갔다. 권력이 없는 리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한편 어렸을 때 에드먼드에 대해서는 욕심에 눈이 먼 악당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에드먼드는 「리어 왕」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로 느껴졌다. 교활함과 지혜로움을 구분할 필요는 있겠지만, 에드먼드는 판도를 읽고 계책을 잘 짜내는 인물이다. 어찌 보면 에드먼드는 서자라는 불리한 신분을 딛고 일어선 입지전적인 인물이 될 뻔했다. "그들의 어리석은 정직함을 내 계략으로 편안하게 올라타는 거야. 할 일이 분명하다. 태생으로 안 된다면, 지략으로 땅을 차지하겠다. 목적에만 부합하면 무엇이든 정당화될 수 있어." "젊은이가 일어서는 순간은 늙은이가 쓰러지는 때니까." 이 대사들을 읽을 때는 악역으로서 에드먼드가 뿜는 카리스마에 매료됐다. 에드먼드는 분명 악한 인물이다. 하지만 서자로서 차별받는 현실이 가혹한 면도 있었다. 부정한 방법을 써서는 안 되겠지만, 부정한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야망을 못 이루고 평생 수동적으로 살다가 이름도 못 남기고 떠날 운명이다. 에드먼드는 악당이 되어 부당한 현실과 맞선 인물로, 그 자체가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리어 왕」은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코딜리어를 버리고 겪는 리어 왕의 끝없는 추락, 그리고 아버지와 형을 버리고 겪는 에드먼드의 상승. 두 축은 서로 약자와 강자로 대비되다가 결말에서 함께 몰락한다. 두 축의 대결에서 사실 절대적으로 불쌍한 사람은 몇 없다. 리어 왕은 충고와 진심을 무시했고, 그 대가를 친딸들의 무시로 돌려받는다. 글로스터는 부정을 저질러 낳은 자식의 부정한 계략에 휘말려 광명을 잃는다. 에드먼드는 상승을 겪는 동안 업보를 꾸준히 쌓은 덕에, 결국 나중에는 자신이 따돌린 에드거에게 죽는다. 나머지 인물들도 이런 식의 몰락을 겪는다. 살아남은 것은 별다른 업보 없이 살았던 올버니와 업보도 없는데 고생길을 걸었던 켄트, 에드거뿐이다. 해피 엔딩을 위해서 코딜리어라도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코딜리어도 아버지와 함께 영영 떠났다. 코딜리어의 무고한 죽음을 생각하면 더는 「리어 왕」을 이전처럼 권선징악의 서사로 해석할 수 없다.


대신 「리어 왕」 속 암투는 권력에 관한 메시지를 남긴다. 리어는 길바닥에서 수모를 겪는다. 이 과정에서 도피 중이던 에드거를 만나, 마침내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왕권이 없으면 리어 왕도 한낱 '인간 리어'일뿐이다. 사실 권력이라는 것 자체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자연은 인간을 모두 평등하게 만들었는데, 인간이 거기에 권력이라는 체계를 발명하여 덧붙였을 따름이다. 자연이 왕이 될 사람을 유독 특별하게 창조했는가? 자연이 서자에게 유독 열등한 형질을 주었던가? 전혀 그렇지 않다. 자연이 창조한 인간들에게는 동등함이라는 본질이 있다. 자연이 준 본질을 잊고, 인간끼리 만든 장난감인 권력을 탐했기에, 작품은 자연 상태를 벗어나 비극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자연이 자신의 근원을 경멸하면 스스로의 경계와 한계를 확정할 수 없는 것이오."


그런 의미에서 등장인물들의 죽음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정상화로 볼 수 있다. 자연은 사람을 나체로 낳는다. 살면서 사람은 여러 옷을 입고, 개중에는 왕이 입는 화려한 것도 있고 거지가 입는 초라한 것도 있다. 하지만 생이 끝나면 모든 옷은 평등하게 수의가 된다. 그나마 사람의 육신은 수의마저 남겨두고 자연으로 돌아간다. 「리어 왕」 속 인물들도 권력이라는 옷을 열심히 노렸지만, 운명은 그들에게 죽음을 선사해서 자연이 준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보낸다. "운명의 수레가 한 바퀴를 돌아, 내가 이 자리에 섰구나." 어찌 보면 그들에게 죽음은 구원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몸이 아닌 옷을 차지하려는 헛된 싸움에서 살아남는 것이 과연 승리라고 볼 수 있을까? 켄트는 리어 왕을 보내며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세상이란 가혹한 형틀에 자길 더 오래 묶어두려는 사람을 싫어하셨을 겁니다." 자연이 내린 본분이 아니라 인간이 저들끼리 부여한 제2의 가치에 집중하니, 개인은 개인으로서 살 수 없다. 리어가 자신의 정체성을 몰랐던 것도 자연이 내린 '인간 리어'가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리어 왕'으로서 살았기 때문이었지 않은가? 이런 수동적인 삶을 살다가 바닥 밑의 바닥까지 몰락했으니, 켄트의 말대로 차라리 떠나는 것이 행복했으리라.


결국 리어 왕은 허무주의적 비극이다. 해설은 이렇게 요약한다. "모든 것을 풀어놓는 폭풍우 장면이 함의하는 바는, 인간 세계의 위계질서를 유지해 주는 사회적 차별의 체계에는 아무런 자연적 근거가 없으며, 인간이란 자연 앞에서 그저 발가벗은 채 걸어 다니는 짐승일 따름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함의를 수긍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으며,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의 힘에 우리가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 속에 살면서 나름의 자리를 얻으려 분투하지만, 정작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평등했으며 죽음 앞에서도 평등하다는 사실을 잘 잊고는 한다. 「리어 왕」은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자들의 소란이었다. 현실에서도 그 사실을 잊고 다양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어서, 가뜩이나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더 어둡게 만든다. 역설적으로 이 암울한 현실에서 나도 한몫 챙길 수 있다는 불쾌한 기대감이 사람을 살게 만들기도 하지만... "아, 인생이란 달콤하여, 우리는 단번에 죽으려 하기보다는 죽음의 고통을 매시간 맛보려 하지요."


사람이 스스로 만드는 재앙에서 원천적으로 벗어나려면, 권력이라는 소꿉놀이 없이도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물론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불태우는 건강한 욕망이라면 칭찬해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삶이 동등하다는 사실을 잊고 권력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으면,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자리의 인물로서 사는 법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으로서 사는 법에 골몰해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광대의 입으로 독자에게 풍자 섞인 교훈을 전한다. "이득만을 찾아 섬기며, 형식만을 좇는 자는, 비가 오기 시작하면 짐을 싸고, 폭풍 속에 너를 버려둘 거야. 그러나 나는 바보라서 기다릴 테야. 똑똑한 놈은 달아나라지. 도망치는 나쁜 놈은 바보가 되지만 바보는 나쁜 놈이 될 리 없어."


그러므로 나는 에드거의 독백을 「리어 왕」의 전체 메시지로 생각하련다. "차라리 그게 낫다. 멸시와 아첨을 함께 겪는 것보다는 드러내놓고 멸시받는 것이. 최악의 상황에서 가장 비천하고 나락에 떨어진 운명이라도 여전히 희망은 있으며, 두려움에 떨며 살 일이 아니다. 최고에서 멀어지기에 변화를 애통해하는 것처럼, 최악이라면 앞으로 웃는 일밖에 없다. 그러니 어서 오라, 실체도 없는 바람아, 너를 기꺼이 받아들이마!" 나의 위치, 내가 얻을 수 있는 힘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해야겠다. 다른 조건 없이 오직 '나'라는 인간으로서 상황과 부딪쳐야겠다. 리어 왕처럼 내가 누군지 남에게 묻는 처지에 빠지고 싶지 않다. 모든 문제에 변함없이 '나'라는 인간으로서 대처하며, 또 그 과정에서 나와 부대끼는 '나'들을 똑같이 존중하고 싶다.


이상이 오랜만에 「리어 왕」을 읽고 든 생각들이다. 사실 최근 교훈을 주는 책들을 읽고 있던 터라, 이번에는 변화를 주어 셰익스피어의 문장이나 희곡의 이론을 다루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그쪽으로는 식견이 부족해서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결국 또다시 교훈적인 글을 쓰게 되어 개인적으로는 아쉽다. 그러나 내 옛 생각과 지금의 생각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고, 또 삶의 허무함과 자연 속의 인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어 즐거운 독서였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의 심오함을 모두 파악하기도 어렵고, 그나마 파악한 것들을 글로 옮기는 것도 어렵다. 부족한 솜씨로나마 도전할 따름이다.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4대 비극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맥베스」를 다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