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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리안 데이즈>
회고하는 글이야말로 저자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맛볼 수 있는 형식 중 하나다. 기억에 의해 왜곡된 경험이라 할지라도 그 기억의 형식 자체가 저자의 정신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며. 그 분량이 책 한 권 쯤 되면 모든 표현을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억압하기도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좋든 나쁘든 저자의 세계관이 거칠고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특히나 삶을 회고하는 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2016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바바리안 데이즈>는 서퍼의 삶을 살았던 저널리스트, 윌리엄 피네건의 자서전이다. 피네건은 하와이에서 괴롭힘 받던 어린 시절부터 중년의 뉴욕 서퍼로 남기까지, 자신의 경험과 추억, 합리화, 모순, 타인을 향한 약간은 가식적인 연민과 질투를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다. 무척이나 사적인 일들로 가득한 이 책은 저자의 학창 시절과 무책임한 연애들, 친구와의 우정, 툭하면 시동이 꺼지는 트럭을 타고 떠난 낭만 넘치는 여행기로부터 서핑과 파도의 문화사를, 아파르트헤이트를 포함한 인종과 민족 간 차별의 격정사를 넘나든다. 개인의 시야에서 다시 쓴 사회적, 시대적 격정과 변화, 분노, 체념, 적응은 저자의 몽롱한 태도가 무색하리만치 현실감 있었다. 그는 감수성의 바다 위에서 파도를 탄다.
그는 “차별”을 향한 정치사회적인 욕망을 가감 없이 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터트리듯 묘사되는 그의 욕망은 그저 투정에 그친다. 가난을 미덕 삼고 빈자를 성자 취급하는 것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기독교적 관점인가? 히피 문화로부터 녹아든 공산주의적 관점인가? 그것도 아니면 지구 반대편에서 끌어왔을 리는 없는 청빈낙도한 유교적 관점인가? 유토피아나 다름없던 비밀 서핑 포인트를 싸구려 관광지로 만들어버린 자본주의는 응당 비판의 대상이겠지만, 가난에 찌들어 살던 제 3세계 마을의 산업화적 발전까지 불평하는 것은 누굴 위한 떼쓰기인가? 멀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인간 관계들은 그들이 일상과 자본에 굴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피네건의 미성숙함 때문이 아니었는가? 피네건은 뉴욕에 살며 여전히 서핑을 즐긴다. 그는 피터팬의 섬 네버랜드에서 영원히 파도를 타고 싶어했다. 서퍼의 세계, 이끌림, 안식처, 도피, 그 천착한 세계에 대한 애정 어린 탐구. 소박한 공동체적 삶에 대한 바람은 미성숙의 증거인가? 자본주의적이고 물질적인 문화의 번영에, 일부는 취하면서도 일부는 토해내버린 이유는 그 소박한 바람이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비릿한 바닷바람을 쐰 탓일까? 그는 사회의 불의를 목격했기 때문에 그 집단을 증오하는 것인가? 그 집단을 증오하기 때문에 그 불의를 목격한 것인가? 차별을 향한 그의 투쟁은 칭송받아 마땅한 영웅적 행동일 때가 있었으나, 히피 출신 맑스 계열 리버럴의 가난한 유토피아를 향한 유아적 욕망에 불과할 때도 있었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가 눈앞에서 벌어질 때에도 시간 맞춰 파도를 타러 나갔노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이런 식으로 고깝게 읽어버리는 것은 오독일테다. 그는 자기 혐오를 세상에 투영하며 삶의 모순을 증오했으나 정작 삶의 모순은 연민해야 할 요소였다. 그가 파도를 타며 영원성을 갈망한 이유도, 세상을 증오하지 않기 위한 발버둥의 한 모습이었으리라.
“아직도 의심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땅이 무너지고 산이 흔들려 바다의 심장에 빠진다 해도, 바다가 포효하고 거품이 인다고 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나의 의심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만을 바랐다.”
파도와 서핑은 그가 겪는 삶의 애환과 정치사회적 갈등들을, 자기 혐오를, 그 “야만스러운 나날들”을 모두 집어삼켜 가라앉히는 신화적 이상향이자 도피처였다. 시대를 파도에 빗대는 말은 많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시대가 아니라 시대를 집어삼킨 파도와의 추억을 그린다. 저자가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동안 시대는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저자의 자아도 똑같이 한다. 그리고 기어코 바다의 파도는 그 시대의 모습을, 자아를 집어삼킨다. 그 시대가 어떤 파도였던 게 아니라 그 파도들이 저자가 겪은 시대였다. 파도와 서핑의 문화사를 1인칭의 시야로 회고하는 방식을 택했던 이유도, 파도가 집어삼킨 시대의 격정과 자신의 삶을 다시 드러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삶은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다.”
독자로서는 약간 비극처럼 느껴졌던 이 회고를, 피네건 자신은 희극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뉴욕의 서퍼 친구로부터 취재와 기록에 대한 허락을 구했던 에피소드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 친구의 쿨함은 겨울 바다만큼 차가웠다. 평생 자신과 시대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을 갈망했던 피네건에게 이 책이 어쩌면 하나의 만족스러운 설명이 된 셈이다.
“물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체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언어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파도의 판단은 본질적이지만, 그걸 어떻게 풀어놓을 것인가?”
“너무나 미묘하고 덧없이 스쳐 가서 표현할 순 없지만 피부 아래서 수없이 감각되는 것들. 이 마지막 요소들은 고대 폴리네시아의 항해사가 탁 트인 바다 위에 나갔을 때 의존했던 감각들과 같았다. 카누의 노 받침대 사이 물을 향해 허리를 숙여 손을 뻗으면. 이 거대한 대양의 어디에 있는지 방향을 알려주던 그런 감각들 말이다.”
“할 말이 너무 많았고, 감정이 너무 벅차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거 봐’라는 말 한마디도 허세처럼 느껴졌다. ‘맙소사, 이번 걸 봐’ 라는 말을 서투르게 줄여서 한 말일 뿐이었다. 파도가 언어를 망쳐버렸다는 게 아니다. 파도가 언어를 흩어놓았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다.”
“그저 온통 맑은 물뿐이었다. 나는 느낌으로만 서핑해야 했다. 정말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가면 뒤에 소년 SAM>, <이전 세계의 연대기>를 이어 세 번째로 읽어본 퓰리처상 수상작인 <바바리안 데이즈>는, 이전 두 작품에서 느껴 본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그 상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을 한번 더 높여주기에 충분했다. 몽환적인, 약간은 LSD적인 느낌까지 감도는 피네건의 글은, 빠져들기에 충분하리만치 아름다웠고 몰입하기에 충분할 만큼 진정성 있었다. 서핑과의 추억을 사랑스럽게 되새겨본다는 표현만으로는 이 책을 정의하기가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 파도의 소리가, 물이 찰방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난 소서리스 데이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