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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붕괴보다 그 직전이 더 아픈 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차라리 무너져버렸다면 다시 쌓아올릴 수라도 있지만, 그 직전의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바라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조너선 프랜즌의 소설 <크로스로드>는 그 무력까지의 과정을 섬세한 감정과 스침의 묘사로 표현해내어 끝내 흔들림을 독자의 시선에 박아넣는다. 스쳐지나가며 목격되는 감정과 일탈의 군상, 그들은 조금씩 얽히고설키며 하나의 초상이 된다. 프랜즌은 이를 향하여 질문하는 듯하다. 그 초상을 우리는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가족 구성원 저마다가 저지르고 목격한 감정적 일탈들로 인하여 무너져가던 힐데브란트 가는 후반으로 갈수록 가족의 모습을 되찾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붕괴보다도 못한 비극이자 현대 가족의 현주소인지도 모른다. 겹치고 겹친 병신짓이 초래한 최대의 무력, 그것은 가족이라는 틀만을 유지한 채 최소한의 겉치레만을 유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도, 관계도, 최소한의 정조차도 사라져간다. 나는 그 무력을 오랫동안 지켜봐왔기에 잘 알고 있다. 핵가족의 틀에서 우리 집은 화목하다. 하지만 대가족의 틀에서 우리 집은 개차반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나는 <크로스로드>를 읽으며 슬펐다. 외눈박이 마을에서 두눈박이는 배척받는다고 했던가, 홀로 올바르셨던 아버지가 그렇지 못했던 부모와(나에게는 조부모겠다) 형제로부터 밀려나고 최소한의 틀만을 유지하시는 모습을 보았기에, 나는 힐데브란트 가의 비극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베키의 딸 그레이시와 나는 어딘가 닮았다. 그레이시는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곤 하고, 실제로도 확실하게 존재한다고들 말하는 조부모와 손주의 애틋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장벽을 친 부모와 조부모, 그 사이에서 나는 무력을 초래한 조부모에게 분노하면서도, 주변인들이 자랑하곤 하는 애틋한 관계를 이해할 수 없어 슬프다. 나는 어디에 속해야 할까…? 

결국 내겐 갈림길, 크로스로드만이 남고, 평생을 그 위에서 선택하지 못한 채 서 있을 뿐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