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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몇 년 전 「아Q정전」의 치밀한 풍자를 보며 혀를 내두른 기억이 있다. 아Q라는 인물의 기행을 자꾸 내가 본 주변 사람들의 행동에 대입해서 생각하게 됐다. 이번에 우연찮게 루쉰의 전집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분량이 꽤 길어서 다 읽지는 못했고, 첫 번째 작품집인 「납함」만 읽었다. '납함'이라는 단어가 생소해서 뜻을 찾아보니 '적진으로 돌진하며 내지르는 고함'이라는 뜻이었다. 당대의 중국은 건전하게 근대화하지 못하여 힘도 위세도 잃어가던 처지였다. 루쉰은 「자서」에서 자신의 명분을 이렇게 밝힌다. "무릇 우매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멀쩡하고 건장하더라도 하잘것없는 본보기의 재료나 관객이 될 수밖에 없으며, 병으로 죽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불행하다고 여길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첫 번째 중요한 일은 그들의 정신을 고치는 데 있다." 즉 루쉰의 소설 자체가 당대 중국의 부조리한 면을 고발하는 투쟁이었으니, '납함'은 굉장히 어울리는 제목이다.


「납함」은 그야말로 기인들의 문학이다. 고골의 소설처럼 상궤를 벗어나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삼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런데 기인들에게도 나름대로 현실적인 이유가 있어서, 그 이유에 따라 몇 부류로 기인들을 분류할 수 있다.


우선 과거의 영광 속에 사는 부류가 있다. 물론 과거의 영광이라 해봤자 당장 처한 상황에 비교하면 전혀 별 볼일 없지만, 당사자들은 그때 삶에 비쳤던 작은 빛을 도저히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스울 정도로 보수적이다. 옛날에 행하던 방식을 고수하며, 합리적인 발상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은 변하지 않는 자신들 대신에 날이 갈수록 변하는 세상을 원망한다. "정말이지, 대대로 못해져만 간다니까!" 정작 그들이 고수하는 것은 지금 시대의 눈으로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쿵이지」의 쿵이지는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유교 경전에나 나올 법한 어투를 고수한다. 「머리털 이야기」 속 민중들은 변발 외의 다른 두발은 죄악시한다. (사실 이건 조선도 그랬다. 변발이 아니라 상투를 고수했을 뿐.) 「광인일기」에서, 루쉰은 옛 경전 속에 나오는 '인의도덕'이라는 말을 억지로 지키려 발버둥 치면서 당대의 병폐는 방치하려는 태도를 '식인'에 비유하며 이렇게 지적한다. "옛날부터 그래 왔다고 해서 옳은 거요?" 물론 기인들은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한다고 변할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광인일기」의 후속작들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부류로 융통성과 비겁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부류가 있다. 이들은 바뀌는 현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는 통찰력은 그나마 갖고 있다. 하지만 사회의 진보가 아니라 개인의 야욕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시대를 해석하는 이들의 눈도 굉장히 편향적으로 왜곡돼있다. 방식은 다르지만 이들도 결국 첫 번째 부류처럼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다. 시대에 영합하여 남들의 부러움과 복종을 사려는 목적이기 때문에, 근대화의 주요 표어인 '평등'을 생각하지 못한다. 「아Q정전」의 아Q가 정확히 이런 부류이다. 아Q는 폭력을 당하는 자신을 '폭력을 당해주는 군자'로 포장하던 작자였다. 그의 '정신적 승리법'은 간단히 부조리를 가하는 상대를 정신적으로 비하하고 이를 당하는 자신을 정신적으로 높이는 수법이다. 하지만 자신보다 명백히 약한 비구니 같은 상대를 만나면 '정신적 승리법'은 제쳐두고 공연히 시비를 걸어서 이긴다. 아Q가 갑작스레 성 안에 들어갔던 것도, 혁명의 바람을 읽고 혁명 세력에 합류하려 애쓰던 것도,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높이기 위한 어설픈 야욕이 분수에 맞지도 않는 일을 시켜서 벌어진 일이다. 아Q는 자신의 자존심을 높일 방법만 궁리했지 당대의 '혁명'이 갖는 무게에 대해 전혀 생각지도 않았기에, 역설적으로 어울리지도 않는 '혁명' 혐의로 최후를 맞았다. 루쉰은 「단오절」에서 아Q의 부류를 이렇게 비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매번 '스스로를 아는 밝은 지혜(自知之明)'가 없음을 괴로워한다."


한데 기인들의 기행에 사회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대 사회가 외세의 무력에 치여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국가의 명맥을 잇기 위해서 정통성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급변이 두려워 쇄국 정책을 펼치는 것도 부당한 처사다. 두 선택지를 두고 사람들이 저마다의 선택을 하다가 양쪽 다 무너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또 선택을 강요하는 시국에서 '그게 그것'이라고 믿으며 회색분자로 살다가 영영 도태되는 불쌍한 사람도 발생하기 마련이다. 「단오절」에서 그런 인물의 비애가 잘 드러난다. 냉정히 말하면 「단오절」의 주인공은 우유부단한 것이 맞다. 하지만 시국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예상하기도 어렵고, 변해봤자 정작 민생은 나아지지 않는데, 무엇이 좋은지 빠르게 판단하는 일이 오히려 기이하지 않은가? 또 이렇게 변해가는 세상에 삶이 적응한다고 해도, 마음은 적응하지 못할 수 있다. 변화란 과거를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좋은 모습을 아예 없던 것으로 칠 정도로 결단력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고향」의 화자가 친구에서 하급자로 변한 룬투를 보며 애수를 느끼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시대의 변화는 개인의 감성과 철저히 별개로 벌어진다. 돌이킬 수 없는 거리에서 사람은 괴리를 느끼게 된다. 이렇게 보면 급변하는 시대에 태어나 사는 것 자체가 저주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이 시대에도 아Q의 후손들이 산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다. 사실 어느 시대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망가지는 사람은 나오지만, 근대화가 끝난 지금은 변화의 속도가 더 빨라져서 문제가 더욱 두드러진다. 한국에서 길을 중국어로 묻는 중국인들, "나 때는 말이야~"라며 젊은 시절 겪은 병폐를 후대에 강요하는 상사들, 키보드 위에 손을 얹고 아Q의 승리법을 연습하는 사람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인간 군상에 진저리가 나서 정치에 관심을 끊는 사람들... 「아Q정전」은 아Q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아직 아Q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20세기부터 명맥을 이어온 세대를 '아Q 세대'로 명명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아Q 세대에 묶이는 것을 유쾌하게 넘길 수는 없다.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앞서 루쉰이 손수 말했듯이 스스로를 아는 밝은 지혜를 갖추는 것이 우선 필요할 것이다. 자신이 국가에 비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자신의 국가가 세계에 비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인간이 자연에 비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는 것으로 사람은 오만을 멈추고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있다. 또 급변하는 세상과 극단적인 태도들에 진절머리가 나더라도 침묵을 택해서는 안 된다. 「자서」에서 루쉰은 중국의 처지를 쇠로 된 밀실 속에 많은 사람들이 혼수상태로 죽어가는 꼴에 비유한다. 하지만 루쉰의 친구는 이렇게 반박하며 루쉰을 일깨운다. "그러나 몇 사람이 깨어 일어난다면, 방을 부술 수 있는 희망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걸세." 즉 우리의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고발하고 사람들의 각성을 이끄는 존재가 필요하다. 군중의 어리석은 소란을 멈추기 위해 선각자들이 납함을 내질러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선각자들은 소수일 것이다. 다수 앞에 소수는 겁을 먹고 희망을 포기하기 십상이다. 루쉰은 이렇게 격려한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사실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곧 길이 된 것이다." 일단 발을 떼며 길을 만들려는 시도가 없으면 아무도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승리할 확률이 아니라 길을 개척할 의지다.


이상이 시대에 관한 루쉰의 처방이다. 내가 그의 처방을 처방전에 잘 옮겼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시대도, 그 시대를 사는 내 꼴도 우스운 면이 많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신에게 떳떳한 삶과 만인에게 떳떳한 시대가 도래할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다만 그 시대가 올 때까지 「납함」을 거울삼아 매무새를 가다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