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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망해야 했을까?


일제강점기 때문일까? 한반도를 구렁텅이에 넣어버린 조선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종종 들린다. 예전에는 자주 들렸지만, 요즘은 어느 정도 선조들의 판단을 양해를 해줘서 그런 걸까? 날선 비난보다는 차가운 비판이 많은 것 같다. 예전에 조선은 양란을 겪었을 때 망해야 했다고 말한다. 아니, 임진왜란 때 망하고, 새로운 국가가 들어서야 했다는 탄식을 들은 적 있다. 확실히 조선은 양란 전과 후가 너무나도 다른 나라다. 전에는 양반 계급이 공고했다면, 후에는 양반 계급이 느슨해졌다. 어쨌든 조선을 향한 우리들의 시선은 그렇게 곱지만은 않다.


광해군과 후금 그리고 신하


<아버지의 그림자>는 삼전도의 굴욕을 통한 국가정체성을 살펴보는 책이다. 쉽게 말하자면, 왜 떠오르는 청나라를 섬기지 않고, 망해가는 명나라를 섬겼을까? 외교에서는 영원한 적과 아군이 없다는데, 왜? 조선은 끝까지 명나라를 사대했을까? 저자 계승범은 이것은 '외교'라는 현대적인 관점이 아니라, 조선의 국가정체성을 따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배금(청나라를 배척)은 조선의 국가정체성이었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알았다. 명과 청나라 사이에서 조선은 양자택일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청나라의 말발굽은 명나라의 황제보다 가깝고 두려웠다. 광해군은 앞에서 청나라의 조건을 들어주며 소통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비변사는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은 국가의 위기 속에서 뭉치지 못하고 왕과 신하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광해군이 불쌍하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광해군도 많은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광해군이 하려고 하는 모든 외교활동을 신하들이 이행하지 않는다. 유명한 정충신 또한, 광해군이 몰래 후금으로 가라고 명령한다면 목숨을 잃더라도 불복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광해군은 후금과의 대화를 강조하였다. 그는 후금의 국서가 '조서'임을 알고서도 받아서 읽기를 개의치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즉시 차관을 파견하여 우호적으로 답하라고 명하는 한편, 계속 반대하는 비변사를 향하여 세상 물정 모르는 선비에 불과한 비변사 당상들이 군사 업무를 어찌 알겠느냐고 질책하였다. 광해군의 독총에도 비변사는 차관 파견은 가하지만 회신은 불가하다고 버텼다."


"만포첨사 정충신이 차관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정충신은 명 조정 몰래 후금에 들어가야 한다면 죽는 한이 있어도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정도로 조정 신료들은 대명 사대에 해가 될 소지가 있는 일을 극구 꺼렸다."


대표적으로 광해군과 비변사는 모문룡을 보는 인식이 달랐다. 광해군은 모문룡을 조선의 안위에 위협이 될 존재라 보았고, 비변사는 대명을 대신할 존재, 후금을 견제할 잠재력을 보았다. 이처럼 광해군과 비변사는 당시 국제정세를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 즉, 반정은 갑작스레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저자는 조선과 명나라 관계를 단순한 군신 관계가 아니라 본다. 저자는 중국적 질서에서 이루어진 예외적이고 특이한 관계로 보고자 한다고 말한다. 군신 관계를 넘어 부자 관계로 이해해야지 조선의 이해가 안 되는 사대를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


"대외관과 국내외 정세는 불가분의 관계다. 정세에 따라 수시로 변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래야 한다. 그러나 조선 신료들의 대명관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성격이었다. (중략) 더 나아가 책봉, 조공 관계를 군신 관계로만 보지 않고 부자 관계로 이해하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까지 한 예는 동아시아 역사상 조명 관계가 유일하다."


오랑캐의 기준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이 아직 제대로 수립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각종 역사관, 정치관 문제가 불거진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조선 후기에 존재했던 국가정체성으로 인해 식민지를 겪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책을 읽으면서 왜란보다는 호란이 국가정체성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던 것 같다. 오랑캐에게 결국 무릎을 꿇고, 대명이 망하면서 조선의 정체성이 흔들렸다.


명나라가 망하면서, 문명국과 오랑캐를 가르는 기준이 없어졌다. 조선은 이때 모습을 통해 문명국과 오랑캐를 가리려고 했다고 한다. 바로 상투다. 조선은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상투를 튼다. 그런데 청나라를 머리를 일정 부분을 밀어버린다. 그리고 복식 또한 다르다. 저자는 이러한 기준이 시간이 흘러 단발령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마무리


인조 이후, 조선의 왕들은 북벌론을 외치기도 했다. 저자에 따르면, 북벌론은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죽었다 깨어나도 청나라를 군사적으로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북벌론을 외친다? 당시 조선의 왕들은 '바보'는 아니었다. 북벌론은 하나의 수단이었다. 효종은 북벌론을 통해 추락한 왕권을 강화했다.


책에서 저자가 중요하게 꼬집는 부분이 있다. 바로 '기록 삭제와 왜곡'이다. 청나라는 조선에게 포수 파병을 요청하며, '나선 정벌'에 나선다. 당시 조선의 포수는 청나라도 무시 못 할 존재였다고 한다. 조선은 나선 정벌에서 공을 세웠다. 그런데 당시 참전한 장수들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착잡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당시 참전한 장수 '신류'의 시를 보면 심정이 잘 나타난다.


"이여간리 출정에서 성공하기는 세상에 드문 일이건만

(그걸 성공한) 이 나그네 마음은 어찌하여 또다시 장탄식인고,

이번 원정은 예전의 심하 원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니,

죽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김공이 오히려 부럽도다."


여기서 심하 원정은 명나라의 후금 원정에 파병 갔던 '강홍립'이고, '김공'은 심하 전투에서 운명한 '김응하'라고 한다.


당시 기록에서도 인조와 홍타이지 서신의 내용을 생략 또는 왜곡을 하기도 했고, 나선 정벌의 공의 기쁨도 표면적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서 오랑캐(러시아)를 격퇴했다는 기쁨을 표출하기도 하지만, 청나라가 요청해서 파병 갔다는 얘기는 숨기려고 한다.


이처럼 조선은 명나라를 단순한 군신 관계보다는 동아시아 문명 하에서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은 왜란의 은혜가 과장된 걸 수도 있고, 오랑캐의 밑에 들어갈 수 없다는 자존심일 수도 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계기는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 중요한 명분은 바로 '숭명배금'이었다. 글에서는 적지 않았지만, 인조의 삼전도 굴욕을 통한 왕권 추락은 광해군 때보다 심했다. 오히려, 광해군이 성군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서 당시 신하들이 명분을 다시 세우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었다. 이런 노력이 국가정체성으로 이어지고, 결국 극단의 척화론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책을 덮고 들었던 생각은 안타까움과 분노가 뒤섞인 오물 범벅인 심정이었다. 만약, 호란을 명나라에 기대서 극복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주적으로 극복하려 했다면 이후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흔히 영조와 정조가 다시 조선을 바로 세웠다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나라 안의 유교를 바로 세워서 정비했을 뿐이다. 그래서 본인은 영조와 정조가 명군인 것은 알겠지만, 결국에는 조선을 바꾸지 못하게 만든 왕들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저자의 마지막 당부를 끝으로 감상문을 마치겠다.


"외교란 상황에 따라 융통성이 있어야 하며, 실제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국제 무대에서 외교의 한 대상을 아버지로 여긴다면, 그래서 자식으로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저버릴 수 없는 절대적 존재로 규정한다면, 그 나라에 외교란 존재할 수 없을 테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일 외에는 달리 취할 행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그림자' 안에 거하면서는 주체적 외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식이라 해도 어릴 때라면 모를까 성인이 된 후에는 자기 노선을 펼 수 있어야 한다. 동맹 관계를 고려하면서도 자기 외교가 있어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제 무대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주권국의 모습이다. 이 책에서 다룬 17세기 조선은 국가정체성이 너무 절대 이념화한 나머지 국제 환경의 변화에 융통성 있게 대처하지 못했다. 몸은 성인인데도 정신적으로는 '아버지의 그림자' 밖으로 나서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배 엘리트들의 그런 선택은 이후 조선왕조의 진화 방향성마저 좌우해버렸다. 그렇다면 2024년 현재 대한민국이 외교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무엇일까?"



출판사 <사계절> 비문학을 볼 때마다 디자인이 너무 깔끔하고 예뻐서 소장 욕구가 오를 때가 있다. 비문학은 문학보다 많은 체력을 요구한다. 복잡하면 논리를 따라가야 하고, 방대하면 길을 잃지 않게 더듬거리며 가야 한다. <사계절>은 목차를 세세하게 정리하고, 인용문의 간격을 시원하게 늘려 가독성을 좋게 만든다.


표지 디자인은 용이 바다에 잠기는 듯한 모습이다. 용은 조선을 나타내고 바다는 아버지를 나타내는 것일까? 저자가 조선의 정체성은 결국 이념에 잡아먹혔다고 표현하는 부분이 있다. 표지 디자인은 그런 저자의 표현이 생각나는 디자인이다.


조선의 역사를 배우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답답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호란이라 생각한다. 왜 끝까지 명나라를 찾았을까? 왜 청나라를 배척했을까? 그러다가 결국 삼전도 굴욕을 당하고, 많은 백성이 끌려가지 않았는가? 이 책은 그런 답답한 문제에 송곳으로 푹 찌르는 듯한 해답을 제시한다. 그런 해답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이하 밑줄 문장


"이번 장에서 나는 정묘호란이 발생한 시점에 주목하려 한다. 누르하치가 죽고 홍타이지가 즉위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후금은 선전 포고도 없이 전광석화처럼 조선을 침공했다. 누르하치와 달리, 처음부터 대조선 강경 노선을 선호한 홍타이지의 즉위야말로 침공의 제일 동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조선 온건파인 누르하치가 죽고 강경파 홍타이지가 즉위한 사건, 곧 후금의 군주 교체가 정묘호란의 직접 동인이었다. 조선 침공이야말로 후금의 칸이 바뀌었음을 내외에 분명히 각인시키는 큰 '이벤트' 이자, 누르하치도 하지 못하던 일을 단번에 성취한 혁혁한 전과였다. 조선에 대한 군사 작전과 맹약 체결을 통해 홍타이지는 자신의 전략이 옳았음을 만천하에 증명할 수 있었다."


"오늘의 화친은 이름은 화친이지만 실은 항복입니다. (중략) 이에 천승의 존엄함으로써 더러운 오랑캐의 차인을 친히 접견하고, (저렇게) 거만하고 무례하며 모욕이 도를 넘었는데도 전하께서는 태연하여 부끄럽게 여길 줄을 모르시니, 신은 통곡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조빈의 요점은 두 가지였다. 조선왕조의 국시는 '존왕양이'이며, 천명을 받은 명을 공격하는 청은 양이의 대상 그 자체였다. 오랑캐 중의 오랑캐요, 심지어 극도로 참람한 오랑캐였다. 그런데 청을 오랑캐로 보는 시각을 더욱 드러내는 문구가 앞 인용문에 나온다. 명은 부모의 나라라는 인식을 당연하게 명시한 (d)가 바로 그것이다. 명과 조선의 관계가 단순히 군신 관계 범주를 넘어 부자 관계로 진전한 것이다. 우리 귀에 익은 이른바 군부 신자 관계로 진입한 상태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송시열의 분석)

"만일 '우리는 이미 저들에게 몸을 굽혀 절했으니 명분이 이미 새로 정해졌다'라고 말한다면, 홍광제 시해와 선조의 치욕은 곱씹어 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두렵습니다. 이런 얘기가 유행하면, 공자 이래 대경대법이 일체 땅을 쓴 듯 없어질 터입니다. 그러면 장차 삼강이 무너지고 구법이 두절되어, 자식은 아버지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신하는 임금이 있음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인심이 제멋대로 이반하고 온 세상이 꽉 막힐 것입니다. 오랑캐와 뒤섞여 금수의 무리가 될 터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송시열은 삼전도 항복을 합리화하게 되면, 일어나는 후폭풍을 염려했다.


"조선의 국가정체성을 동아시아 국제 질서 맥락에서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차이를 비교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은 16세기에 새롭게 이념화한 군부 신자 관계가 단순히 이론에 머물지 않고 현실에서도 작동함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온 국토가 황폐해졌어도 정체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기존의 군부 신자 관계에 재조지은이라는 경험이 배어들면서 정체성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명도 조선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북쪽으로는 만주 일대를, 남쪽으로는 일본열도를 견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