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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턴스나 체계는 오직 블랙박스일 뿐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의 지식을 후일로 미룰 때, 사물이 현재 가진 수단으로는 너무 복잡할 때, 우리가 모든 것을 임시적인 블랙박스에 넣을 때, 우리는 그것이 체계라고 속단한다. 우리가 마침내 그 상자를 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변환의 공간처럼 작동하는 것을 본다. 체계, 인스턴스, 실체는 오직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체계는 비지식이다. 그것은 비지식의 다른 측면이다. 비지식은 혼돈의 측면과 체계의 측면이 있다. 지식은 이 두 연안을 잇는 다리를 놓는다. 지식은 그 자체로서 변환의 공간이다.


이 모든 문제는 프랙털적이다.


라이프니츠는 이미 프랙탈적 실재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연못과 물고기로 이루어지고, 그 안에 또다시 물고기와 연못이 가득한, 무한히 계속되는 실재이다. 망델브로는 이 단어를 고안하고, 아마도 그 개념을 창안하면서, 세계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 나는 지식의 과정에 대해 그것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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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언어의 분기(分岐)를 배우는 인간적 특성이 미개인들에게 도래하게 된다. 지켜진 사랑의 경이로움, 자유로운 사랑과 열정적인 말의 기적 말이다.


이러한 편차를 없애 보라. 그러면 사랑은 배설이고, 양식은 뱉어낸 침이고, 토사물이고, 여자는 말처럼 하나의 재화이다. 동일한 등가치이고, 동일한 교환 결산이다. 철학은 비록 최근일지라도 구식적 사고들로부터 많이 벗어났는가? 깨끗하고/더러운 이 육체와, 전유의 공통적 꿈으로부터 말이다.


모든 관념론의 강력한 정리는 다음과 같이 씌어진다. 즉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것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세계는 표시가 된 나의 영역이고, 세계는 나의 시장이다. 탁월한 관념론자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물건들은 그들의 육체로부터 나오는 것들이다. 침·피·오줌·땀·토사물·정액 그리고 기타 다른 즐거운 배설물들 말이다. 이러한 배설물들은 그것들의 액체로 영역을 표시해 주고, 그들을 제왕과 같은 소유주로 만들어 준다. 관념론은 똥과 같고, 똥 같은 이론이 관념론을 발견한다.


아니다. 세계는 나 없이, 내 앞에, 나 다음에도 존재한다. 배타적인 존재로서의 나는 나의 성기와 혀에 불과하다. 이것들은 장소가 없는 불꽃이다.


─미셸 세르, 『기식자』 中




분과학문들의 경계를 종횡무진하며 별자리들을 번뜩이는 전령신 헤르메스의 손길...


비슷한 결의 『천 개의 고원』은 발췌독이긴 했어도 꽤나 독했는데, 세르는 염도 조절을 잘하는 편이라 '상대적으로' 읽을만함



다만 번역은 그리 좋다고는 생각이 안들어서 원문과 영문판 대조해가며 번역기들의 안내와 함께 더듬거리며 읽어가는 중


가령 instance의 경우 개체, 실체, 사례, 인스턴스 등 여러 단어가 있음에도 굳이 맥락과 동떨어진 법정으로 번역한다거나,,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때도 읽히질 않아서 어찌저찌 김현 번역본을 빌려 겨우 읽어갔는데 『기식자』는 다른 판본도 없으니 쩝...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기계번역들을 대조하가며 단락 하나하나를 곱씹다 보니 세르의 논의들을 되짚어보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