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첫 번째 작품집 「납함」을 읽고 날카로운 풍자에 감탄했다. 그런데 두 번째 작품집인 「방황」은 더욱 놀라웠다. 기존보다 풍자성은 약간 줄었지만, 사건들을 겪는 개인의 심리를 더 깊게 파고들어 공감을 유도한다. 제목이 '방황'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집에는 급변하는 시대와 신구(新舊)의 대립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도태되는 회색분자들의 이야기이다. 루쉰은 제사(題詞)로 굴원의 「이소」를 인용했는데, 이 시구가 기억에 남는다. "나는 오르고 내리며 (나를 이해하는 군을) 찾아 구하노라." 어려운 시대에 모두가 뜻을 모아 문제를 타개해가면 좋으련만, 각자의 사정이 다른 만큼 각자가 길을 잃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목표가 있어도 목표를 향할 수 없는 개인들의 삶은 필연적으로 고독하다. 이 쓸쓸함이 정말 진하게 느껴지는 독서였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질문들을 마주한다. 가령, '옛것을 포기하고 새것을 받아들여야 할까?', '이상과 현실 중 어느 것을 좇아야 할까?' 같은 질문들이 있다. 이런 질문들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선택의 책임을 자신의 인생을 통해 고스란히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결단이 두려워서 사람들은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일단 모호한 태도를 보인 뒤 상황을 봐가며 구체적으로 정하기 위해 한발 물러서는 것이다.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라는 한 마디로 결말을 지어 두면 모든 일에 거리낌이 없게 된다." 그러나 이 기다림에는 끝이 없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인생이 걸린 사리분별에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앞으로? …… 나도 모르겠어. 자넨 우리가 미리 예상했던 일 중에 마음먹었던 대로 된 게 하나라도 있나? 난 지금 아무것도 모르겠네. 바로 내일의 일도 모르겠고, 당장 1분 후의 일도……." 이런 망설임은 비겁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선택의 대가를 생각하면 망설임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그래서 꿈을 꾸면서도 선뜻 변하지 못한다. 당장 꿈을 위해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이미 인생에 가해지는 압박이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다. 「고독한 사람」에서 이 씁쓸한 체념이 잘 드러난다. 작중에서 웨이렌수는 개혁 사상을 갖고 있지만, 개혁 사상이 그를 먹여살리지는 못한다. 결국 그는 꿈꾸던 신시대의 생활을 포기하고 구체제에 안주한다. 웨이렌수의 자조가 인상적이다. "나는 이미 나 자신이 이전에 증오하던 것, 반대하던 것들 전부를 몸소 실행했고, 내가 이전에 존경하고 주장했던 모든 것을 거부했소. 나는 이제 완전히 실패한 것이오. - 하지만 난 승리하였소." 결국 내일을 맞을 이유를 잃은 웨이렌수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흥청망청 살다가 별것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 「죽음을 슬퍼하며」의 화자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호기롭게 쯔쥔과 자유결혼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당장 기존의 질서에 안주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전혀 나아지지 않는 생활이 그를 압박한다. 결국 그는 변절한다. "첫째는 생활이다. 사람은 반드시 생활을 해야만 사랑도 비로소 따르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결코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살길을 열어 주는 일은 없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이 생활이란 자신이 한때 극복했던 구식의 질서에 다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시대의 질서가 아니면 생활고를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변절은 그의 삶을 어느 정도 안정시켰지만, 처음의 의지와는 결별한 셈이므로 쯔쥔과도 결별하는 셈이 됐다. 나중에 생계를 제외한 모든 것을 잃은 화자는 뒤늦게 깨닫는다. "사랑 없는 인간은 사멸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삶을 위해 사랑을 걷어찼으니 사멸할 운명이리라.


나는 저번에 「납함」을 읽고 '시대의 올바른 변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라고 결론지었다. 지금 「방황」을 읽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목소리를 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남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면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이 인간 사회의 실상이다. 사회를 위해 앞장서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문득 「납함」에 있던 이 문장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자네들은 황금시대의 출현을 자손들에게 약속하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아아, 조물주의 채찍이 중국의 등판 위에 내려쳐지지 않는 한, 중국은 영원히 이런 식의 중국이지, 결코 스스로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바꾸려 하지 않을 걸세." 과연 나는 자신을 버려가며 옳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일까? 말이야 늘 쉬운 것이 아니던가.


다만 루쉰은 이런 고뇌를 겪으면서도 꾸준히 소설을 통해 목소리를 냈다. 민중의 어리석은 모습을 꼬집으면서 루쉰은 적을 많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거울을 보여주며 깨달음을 주고자 했고, 그 덕에 루쉰의 문학은 불멸성을 얻게 됐다. 시대가 변해도 인간성이 변하지 않듯, 세대가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깨닫고서도 침묵하다가 내키지 않는 현실에 휩쓸리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지는 않을까. "조심한다는 것은 일종의 고달픈 고통이다." 안정은 결코 발전을 가로막는 타당한 변명이 될 수 없다. 나는 아직 진리를 깨닫지도 못했고 무언가를 일깨운 대가로 고통을 겪은 적이 없다. 그러니 일단 그때가 오기까지는 이것저것 떠벌여보려 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 마음에 응어리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상으로 「방황」에 관한 감상을 마친다. 루쉰의 소설들을 읽으며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많은 깨달음을 얻고 있다. 이제 소설집은 「고사신편」 하나가 남았는데, 신화와 역사를 변용하여 만든 작품이라니 굉장히 기대된다. 끝까지 좋은 교훈을 얻으며 「루쉰 소설 전집」을 덮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