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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역적인 것이 존재한다면 반복적인 것, 중복이 존재한다. 중복은 바로 세계의 체계─이지러짐과 회귀는 당연히 식별할 수 없다─에 있다. 그것은 자기 공간 밖으로는 전혀 성적 재생산을 뻗치지 않는 메시지의 깊은 안정 속에 있다. 어느 누구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재규어를 생산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어느 누구도 눈처럼 흰 수정이 갑자기 초록의 에메랄드로 바뀌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중복이 존재한다. 이러한 동일성이 속박하는 시간을 따라서 a≡a가 존재한다. 동일한 것의 태양 같은 눈부심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소프트웨어적인 중복들, 기계적인 균형들, 유전적인 불변 요소들, 하드웨어적 안정성들.

이렇게 우리는 하얀 추락, 또는 층류적인 중복으로 되돌아왔다. 어떤 것도 그런 세계 안에서는 판별할 수 없다. 모든 것이 그 속에서는 가역적이고, 교환될 수 있다. 우리는 이 부동의 동체를 말하고 싶다. 신들은 이지러짐과 삭망의 고정된 공간에서 건배하고 웃는다. 우리는 그들이 말하지 않고 웃으며, 소음에 축배를 들고, 넥타르가 무궁무진하고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것을 납득한다. 항아리를 따르면 따를수록, 그것은 덜 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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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하얀 추락으로 되돌아가 보자. 목소리의 바람으로, 외침으로, 모음들의 흐름, 잘 울리고 개방적인 그 흐름으로 말이다. 부름 혹은 불평, 통합된 강, 층류적 숨결. 분절 언어는 자음의 파종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런데 자음은 목소리의 차단이다. 그것은 모음의 흐름의 단절, 중지, 양분(兩分)이다. 그렇다, 자음들은 기식자이다. 그것들은 숨결을 봉쇄하고, 끊고, 금지시키고, 폐쇄시키고, 추진하고, 돕고, 조정한다. 그것들은 보통의 기식자들이 그렇듯이 장애물이자 보조자이다. 그것들은 목소리에서 흐름에서 경사와 각을 증가시킨다. 그것들은 장벽과 장애물을 증가시키고, 그 결과 하얀 면을 코드화한다. 그것은 의미를 갑자기 증가시키고, 의미를 생산한다. 분절 언어들은 기식자들이 있는 숨결들이다. 고전주의 시대에 이야기되었듯이 모음은 영혼, 다시 말해 바람이고, 자음은 육체, 즉 영혼의 한계 및 일시적 감옥이다.

모음은 개방되어 있고, 침묵하는 자음은 폐쇄되어 있다. 통로의 위1상을 보아야 한다. 형태가 어떻든 통로는 모음에는 자유롭지만, 자음에는 구속적이고 혼잡하다. 목소리는 그물망과 창구들의 복잡한 관료적 방식 속에 갇혀 있다. 분절들은 목조임들의 전체이고, 자음은 목소리를 조인다. 그것은 목소리를 쥐어짠다.


─『기식자』 中




벩송은 플로티누스의 환생이라는 소리를 주변에서 종종 들었고, 그 자신도 플로티누스의 철학에 꽤 깊이 빠져 있었음. 다만, 벩송의 이러한 공명은 주로 이론적 측면에서 머무르는 경향이 있었지. 그런데 세르의 작업은 그런 수준을 훌쩍 넘어섬. 단순히 사유의 유사성에 머무르지 않고, 그 스타일 자체가 마치 루크레티우스를 현대적으로 변주한다는 인상임. 세르의 글을 눈으로 쫓아가다 보면, 분과학문의 경계를 비웃듯 이리저리 튀어오르는게 뚱딴지 같은 소리들 같다가도, 그동안 변주해온 우화들, 그리고 불쑥불쑥 등장하는 비유와 개념들이 어느 순간 그물망처럼 엮여서 솟아오르는 순간들이 찾아옴. 요컨대 도시쥐와 시골쥐 우화, 사티로스 설화, 신들의 향연 이미지들을 가져다가 흐름과 절단, 소통 체계와 소음, 불균형-왜곡-오류가 야기하는 역동성 등을 에워싸는 지도를 작성하는 셈. 여러모로 『천 개의 고원』의 사상적인 혈육 같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음. 독자들로 하여금 텍스트 너머로 파고들기 좋은 재료들을 마구 던져준다는 점에서 더더욱─가령 세르의 '제3자'를 퍼스의 '제3항'이나 헤겔의 '매개'와 비교해보는 스펙트럼을 그려본다던가...


예전에 벤야민을 읽으면서 "이 인간, 트락타트니 성좌니 하며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정작 글쓰는 꼴을 보면 독자들이 성좌를 구성하는 걸 방해하려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음. 벤야민의 개념들이 머리로는 흥미로웠지만, 가슴으로는 도통 와닿지 않았는데, 세르의 글 속에서는 그런 개념들이 행간에서 피어오르는 광경이... 참 뭐라 형언하기 힘드네. 장자의 남백자규와 여우 우화가 생각나기도 하고─도를 위해 언어로 발을 내딛을 수 있지만, 언어만으로는 도에 이를 수 없고, 또 그것을 전달할 수 없다는 그런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