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풍류 일 년간 1」



  좋은 자연과 인정이 어우러져서 만드는 풍토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전주에 어느만큼의 연줄을 바라고

  큰 세간들을 서울에 놓아둔 채

  트럭에 실려 이리까지 온 우리--

  과부된 처이모와 두 딸, 그리고 우리 내외와 내 아들 승해는

  이리→전주 구십 리 길은 조랑말 마차에 보따리들을 싣고

  터덕터덕 그 뒤를 따라 걸어가기로 해서

  전시의 답답한 우리에게 산보의 여유를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사이에 늘 우리를 따라 우아하게 굽이치며 우리를 위로하던

  주위의 고운 산둘레들의 덕도 톡톡히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도중에 해가 저물어

  삼례(參禮)라는 곳의 마부집에서 호롱불과 함께 밝힌 하룻밤이

  조랑말이 발굽을 구르며 콧소리를 하는 것이 밤내 잘 들리던

  그 고전적이고 풍류적인 하룻밤을 나는 잊을 길이 없다.

  거기다가 이튿날 해돋이에 우리가 도착해본 대장촌(大場村)--

  정말로 아름다운 처녀들의 눈썹의 연속처럼

  곱게 곱게 뻐쳐 있는 산맥의 묘경(妙境)을 눈여겨서

  찾아와 내려 첼로 소리로 모든 것의 가슴을 울리는

  수만 마리의 기러기들의 집산지인 그 대장촌에 들어섰을 때에는

  우리의 이 보행을 나는 아! 소리쳐 축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구러 전시의 살 맛도 만드는 것인가?

  전주에 들어가자 나는 시우(詩友) 이철균(李轍均)과 하희주(河喜珠)를 만나

  그들의 교직이 있는 전주고등학교에 국어 교사 자리를 구했더니

  대장촌의 그 기러기들의 첼로 소리 영향인지

  교장 유청(柳靑) 씨의 호의로 재깍 그 한자리가 차례가 와서

  삼례 마구간의 조랑말이나

  대장촌의 기러기 만큼은

  팔자가 그만 괜찮게는 되었지.


  그러나 이 팔자의 풍류라는 것도

  늘 첼로의 태평한 소리 같기만 한 것도 아니니

  내가 전주고등학교에 선생자리를 얻어 놓은 다음에

  정읍의 처가에 좀 쉬러 갔다가 당한 일 그것은 또 꽤나 위험한 일이었네.

  2월 어느 날의 으시시 치운 해질녘

  나는 한복 바지 저고리 차림으로 처가집 방 아랫목에 누워 있는데

  때마침 이 곳 여고에 선생으로 있던 내 청소년 때 친구 한태석(韓太錫)이가

  "잘 된 밀주를 금방 개봉했으니 어서 와서 자시게" 하는

  쪽지를 인편에 보내어

  나는 입고 있던 한복에 오바코트만 걸치고 가서

  밤이 꽤나 깊을 무렵까지 그걸 고래 물마시듯 마시고 있었는데

  여기서 돌아가는 어두운 길에서 나는 헌병의 불심 검문에 걸렸으니,

  이 때 여기는 내장산의 좌익 빨치산들이 밤에 출몰하는 일이 있어

  비상 계엄령 치하였는 걸

  나는 취중에 그것마자 깡그리 잊고 흐느적흐느적 돌아가는 길이었다.

  거기다가 나는 주민등록증까지도 벗어둔 양복 저고리에 넣은 채 잊어버리고 나온 터라

  이것의 제시에 내가 속수무책이 되자

  헌병들은 "이 새끼 빨치산 앞잡이구나!" 하며

  나를 땅바닥에 쓰러뜨리고는

  총대로 마구잡이로 후려갈기며 또 군화로 차고 밟았다.

  나는 그저 얼얼하고 먹먹해 있었는데

  그들은 다시 나를 일어세워

  두 헌병이 나를 양쪽에서 부축해 서자

  그 상사인 듯한 사람이 저만치에서

  "너희들 그 자를 냇가로 끌고 가 즉결로 그만 처치해 버려라." 하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두 헌병에게 두 팔을 붙잡힌 채

  너무나도 허망하게 총 맞아 죽으러 가고 있었는데,

  이런 때에도 오실 수 있는 건 역시 천우신조라

  그 두 헌병 중에 하나가 인정이 두터운 사내여서

  "그래 영감아 잘 생각해 봐.

  이 정읍 천지에 영감을 보증할 만한 유력자가 하나도 없어?"

  물어주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이 곳 경찰서장도 나와는 중학 동창이기도 해

  그걸 더듬더듬 말했더니, 재깍

  이 말의 사실 여부를 밝히는 확인 과정을 거쳐

  비로소 또 한번 나는 살아남을 수가 있었네.

  운수는 좋았지만, 이 날 밤 얻어맞은 덕으로 나는 뒤에

  만성늑막염 환자가 되어 여러 해를 앓았지.






「전주 풍류 일 년간 2」



  전주고등학교에서의 수업은

  오전만 하기로 하고,

  대우는 교감과 동격,

  나는 여기 있는 동안에 이 학교 교가도 새로 지었고,

  1950년 6·25에 전몰한 이 학교 출신의 학도병들을 위해

  교정에 세운 충혼탑에는

  해공 신익희(申翼熙) 씨 글씨로 탑명(塔銘)의 글도 지었다.

  나는 또 당시의 전국 문화 단체 총연합회의 전북 지부장이기도 했던 관계로

  전주 시민을 위한 여러 연설장에도 나갔고,

  이 곳 전시 연합대학에서도 가람 이병기(李秉岐) 선배와 함께

  강좌도 가졌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보다도 내게 더 안 잊히는 일은

  체포되면 죽게 된 시인 신석정(辛夕汀) 씨를 살려내는 데 일조가 되었던 일이다.


  1951년의 3월인가 4월의 어느 날이던 것 같은데,

  이 때 전북일보의 주필이었던 내 대학생 때의 동기생 오명순(吳明淳) 군이

  북노송동의 내 숙소로 숨이 턱에 차 찾아와서 하는 말이

  "부안 신석정의 마음이 좌익이 아닌 건 자네도 알지?

  그런데 그 사람이 지난 여름의 북괴 남침 때

  부안에 별 인물이 없는 관계로 강제로 뽑히어 그 곳

  군인민위원장이 되었다나.

  그래 우리 국군이 수복해 오자

  어쩔 수 없이 변산 속으로 빨치산들을 따라 들어갔었는데

  가족들 생각에 얼마 전에 그 곳을 빠져나와

  부안에서 숨어다니다가 안 되게 생기니

  지금은 여기 전주에 숨어들어 나한테 도움을 청하고 있네.

  자네가 들면 살려낼 길이 있는데

  어떻게 하려나?" 하는 것이었네.

  "어떻게?" 하고 내가 물으니

  "이 곳 대한청년단 전북지원장겸 태백일보 사장 손권배(孫權培) 씨는 자네도 잘 알지?" 해서

  내가 "이름만은 알지" 하니

  "아직 면식이 없더래도

  그 사람이 익히 자네를 알고 존경하고 있으니

  그 사람을 지금 당장 나하고 같이 찾아가서

  내가 이제부터 말하는 대로만 하면 돼.

  손권배 씨더러 먼저 신석정의 본심이 좌익이 아닌 걸

  책임진다고 하고,

  그 다음엔 그 사람의 태백일보에

  신석정 작의 대한민국 예찬시를 한 1주일 연재시키라 하고

  고 다음에는 그 태백일보의 편집고문의 하나로 사령 광고만 내달라고 하게.

  손권배 씨는 지난 해 여름의 북괴군 전주 점령 때

  그의 단원들로 우익 빨치산을 꾸며 산 속에 숨어 살면서

  이 곳 북괴군 진지를 박살내기도 한 용사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도도 이만저만이 아니라

  이 전주에서는 그를 거역할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미당 알겠나? 내가 말한 대로만 해. 어서 가세!"

  그는 이렇게 주장하며 내 팔을 잡아 일어세우는 것이었네.


  그래 우리 둘이는 어린애들처럼 모처럼의 신바람을 내서

  오명순의 안(案)대로 해본 것이 들어맞아

  우리 시인 신석정은 이 때 말로 즉결이라는 것의

  그 고배를 면할 수가 있었던 걸세.

  어허허허!


  그러나 나 미당 이 사람으로 말하면

  2월에 헌병들에게 얻어맞은 상처가 속으로 곪느라 그랬던지

  늘 속이 아프고,

  길가에 새로 돋은 풀잎들이나

  그 곁에 있는 어린것들의 웃음에는 서글픈 대로 공명은 하면서도

  더 사는 것이 영 귀찮기만 해

  아조 조용한 적멸 속으로 들어가 버리려고

  5월 어느 날인가의 저녁때엔

  이 때 마침 내게 있던 학질을 핑계로

  그 치료제인 극약 '데라보르'든가 하는 것 100알들이 한 병을 구해

  그걸 몽땅 한꺼번에 다 먹어 버렸네.

  이것 열 개 이상은 치사량이라 했으니

  다섯 사람쯤이 적침(寂沈)에 잠길 만한 부유한 복용이셨지.

  거기다가 이건 자살이 아니라, '빨리 나으려고 많이 먹은'

  실수로 하기 위한

  거짓말을 내게 끝까지 시켜야 했으니

  정말 못나고도 또 못난 일이었지.


  허지만 이걸로도 나는 죽을 팔자는 아니라

  내가 음독하자 이내 시우 이철균이 쫌맞게 찾아와

  이 근방에 살던 그의 친구 의사를 곧 데려와서

  물과 토재를 몽땅 먹여 나를 우아래로 토해 내게 해

  진달래꽃 빛의 많은 것을 나는 토하고

  죽음을 그 한걸음 앞에서 또한번 면하게 되었네.

  그러고는 꽤 오랫동안 나는 기억상실의 몽롱한 안개 같은 의식 속에 잠겨 지냈네.



- 『팔할이 바람』(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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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평을 중복해서 하게 돼 민망하지만, '담시'를 내세운 『팔할이 바람』의 가장 큰 특징은 서술의 수다를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이고 거기서 발휘되는 가장 큰 장점은 현장감에서 오는 진실성이라고 생각한다. 시집을 다 읽고 나서 서두의 「사내자식 길들이기」를 다시 읽어보면 후반부에 비해 리듬이 훨씬 정제되어 있어, 시인이 처음부터 이러한 매력을 의도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몇 편 지나지 않아 역시 초반부인 「줄포」 같은 작품에서부터 리듬의 정돈이 완전히 풀린 서슴없는 산문체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고삐 풀린 말투의 채택은 결과적으로 많은 단점을 가져다주었지만, 와중에도 드물게나마 장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서정주 자신의 시적 재능에 기댄 것이었다. 요컨대 이 시집에서 뜨문뜨문 나타나는 수다의 매력은 정제를 사실상 포기한 상태에서 시인의 거의 본능적이라고 해도 좋을 입담이 용하게 번뜩인 결과나 다름없다고 생각된다. 대목과 대목 사이의 편차가 심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위의 작품을 비롯하여 「6·25 민족 상잔의 때를 만나서」, 「청산가리와 함께」, 「1950년 겨울--북괴와 중공 연합군 대거 침략의 때까지」 등 한국전쟁 당시의 일화를 소재로 다룬 작품들은 『팔할이 바람』에서 핍진성이 특히 잘 드러나는 파트 중의 하나다. 전후의 일화들을 다룬 것들이 이 뒤로 십여 편 정도가 있지만 대체로 맥이 빠지고 있어, 이 파트는 동시에 그런 핍진함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대목에 해당하기도 한다. 두 편이 한 쌍을 이루는 위의 「전주 풍류 일 년간」이라는 작품은 1950년 한 해 동안 서울에서 대구, 부산을 찍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가 1·4 후퇴로 다시 연고지인 전주로 내려와 살던 1951년 동안의 일화를 그린 것이다. 해방 이후 서정주의 자전적 기록은 대체로 평범하기보다는 예술가로서 또는 출세한 상류층으로서의 면모가 짙다. 전주에 피난 와서 인맥으로 교사 자리를 얻었다는 이야기는 그 전형이라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그 인맥으로 헌병 검문에서 풀려나거나 신석정의 신변을 구해주었다는 일화는 만만찮은 시사를 던져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