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보로망 거장 알랭 로브그리예 내한…“소설은 열려 있다”
일흔 다섯살인 거장은 약간 들떠 있었다. 지난 10월16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10층 대강당에서 열린 문학 강연회 ‘누보 로망에서 새로운 자서전으로’에는 한국불어불문학회(회장 김치수) 회원과 시인·작가, 출판계 인사 4백여 명이 모였다. 누보 로망(反소설)의 대가이자 세계적인 영화 작가이기도 한 로브그리예는 “이렇게 청중이 많이 올 줄 몰랐다. 아마 내가 추구하는 문학을 많은 사람이 공유한다는 증거일 것이다”라며 예정된 강연 시간을 넘겼다.
그의 이날 강연은, 작가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으로 압축되었는데,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의 문학 생애에 대한 반추였으며, 발자크에서 누보 로망 이후 ‘새로운 자서전’에 이르는 프랑스 현대 문학의 변천사이기도 했다. 그 변화의 핵심은 작가와 독자의 위치 변화였다.
서른 살 이전까지 그는 생물학자였다. 그런데 서른 살이 되던 해 어느날, 생물학자라는 안정적 자리를 내팽개쳐 버리고 갑자기 글을 쓰게 되었다. 그 동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현대적 글쓰기에 적용되는 문제였다.
생물학자에서 문제 작가로 ‘고단한 투신’
그는 소설의 첫 문장을 분석하면서 자신이 왜 글쓰기라는 ‘문제적 작업’에 뛰어들게 되었는지를 풀어나갔다. 로브그리예가 보기에, 소설에서 첫 문장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계약일 뿐만 아니라 책과 독자, 세계와 독자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다. 그는 발자크 시대로 거슬러올라 그 시대 소설의 첫 문장이 갖고 있는 권능을 제시했다. 발자크의 소설 <루이 앙베르>는 ‘1897년 태어난 아버지는 당나귀를 기르는 축산업자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때 화자는 소설의 밖에 있고, 소설의 이야기를 전부 이해하고 있는 신의 위치이다.
발자크 시대에 작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로브그리예는 말했다. 그러나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 이르러 화자는 신의 자리에서 내려온다. <보바리 부인>의 첫 문장의 주어는 ‘우리’이며, ‘우리’가 장황하게 묘사하는 것은 모자이다. <보바리 부인>이 쓰인 지 백 년이 지나서 발표된 카뮈의 <이방인>은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 어쩌면 어제 돌아가셨는지도 모른다’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화자는 신의 자리에서 완벽하게 이탈했다고 로브-그리예는 말했다.
카뮈 이후 화자(작가)는 어떤 의미를 표현하는 대신,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고 로브그리예는 강조했다. 카뮈 이후의 소설들은 독자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작품이 되었다. 이때부터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문제에 참여’ 혹은 ‘의미에 대한 부름’을 요구했다. 50~60년대에 태어난 누보 로망은 카뮈의 ‘아들’이었다. “과학자로서 나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로브그리예는 말했다.
쿤데라랑 비슷한 생각이네
다만 카뮈보단 카프카를 중요하게 여겼지
아무 의미 도 없는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