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개념과 씨발보편성
*이따금 '어떤 대상의 본질'을 얘기하는 자들은, 그 대상의 근간이 되는 본질적 제약을 제거하는 시도를 하고나서 본질을 주창한다.
이를테면 사람에게 이족보행의 제약을 제거함으로써 날개가 돋친 사람을 상상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본질과 그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활용되는 ‘상상’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추가 개념을 만들 수 있다.
나는 이를 가상 개념이라 이른다.
이를테면 조류가 자연에서 다른 종 보다 스트레스를 적게 받으며, 그네가 푸른 하늘을 마음껏 비행하는 데 그 까닭이 있음을 발견한 조류학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위 가정에서의 발견이 실제적이 된다고 가정해두자).
그 조류학자는 인간도 설혹 날개가 돋쳤다면(생물학적 제약 제거/가상 개념) 조류와 같이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다는 상상을 한다.
그는 더나아가 인간이 받는 스트레스의 해악성을 설파하며, 앞서 상상한 날개가 돋친 인간들처럼 우리도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한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겠다(가상 개념).
이는 인간에게 ‘고작’ 날개가 돋치는 것만으로 신체적, 정신적 부하들을 능히 떨쳐낼 수 있다는 바를 상기하게하고 가상의 날개 돋친 인간과 작금의 인간에게 존재하는 신체적 차이는 날개의 존재 여부이므로 그 가상의 존재가 비행으로 즐기는 효험을 우리가 현재의 신체로 경험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주장에서는 고작 따위의 어휘를 사용하는 것으로 두 양자의 생물학적 이격 거리를 좁힌다.
이 자가 마음챙김의 신실한 목회자라면 날개 돋친 인간을 상상해보라는 주장을 더할 수도 있다.
이런 식의 가상 개념은 현대 사회에서 한 개인의 스트레스 극복이 자기 극복의 우수한 사례로 여겨지는데다 퍽 설득력을 가지는 때문에 다자로부터 쾌히 수락을 받는다. 날개 달린 인간을 상상하는 건 ‘전혀’ 지나친 상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때문이다. 그런 주장은 독자로 하여 날개 달린 인간이라니, 퍽 멋지군. 그처럼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건 모두가 동의하지. 차이라고 해봤자 날개가 돋쳤느냐 아니냐인데, 우리라고 안될 게 뭐 있겠어? 그래, 오늘부터 날개 돋친 사람처럼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지는 거야 따위의 감탄을 자아내게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물리 법칙 안에서 살아가고, 인간이 그 원리를 따르는 한 수 많은 제약 아래에서 사는 수 밖에 없다.
여기에는 정신적, 생물학적, 사회적 제한까지 두루 포함된다. 위 화두의 주체가 되는 당대 인간의 모든 생물학적 정보가 보전된 날개 돋친 인간 따위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런 게 자연에 존재할 수 있다손 쳐도 무궁한 시간이 거듭되고 무수한 요행적 수혜를 받고(세포 수준의 하위 기능들이 기능적 순환을 통하여 미세한 조정을 거치고, 거치고, 거치고, 거치고, 거치고, 거치고, 거치고···)나서야 그것은 비로소 출현할 여지를 가진다.
그러나 그 시기의 날개 돋친 무언가를 우리가 '인간'이라고 간주해야할 당위는 없다.
생물학적으로 우리와 얼마큼 가까울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때문이다.
생시 동안에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이 최선이기는 하나(본질) 우리네가 사회를 이루어 수많은 제약 아래에서 살아가는 한 날개돋친 인간만큼 낮은 수준의 스트레스를 유지할 수도 없을 터인 까닭에 허용된 외연을 벗어나 숱한 제약들을 제거하는 가상 개념은 그 가상 개념을 만든 자의 가상 세계(머리 속)에서만 유효하다.
위의 가상 개념을 만든 조류학자는 스트레스를 적게 받아야 한다는 본질을 주창하면서 인간으로부터 생물학적인 본질을 제거한 셈이다.
더불어 그 주장의 본질적 수준도 그러하다. 그런 세계는 ‘있을 법하거나’, ‘있을 법한 셈’이기는 하지만 응당 있어야만 하는 세계는 못된다. 하지만 그런 가상 세계(조류학자의 머리 속) 아래에서 생산된 가상 개념(날개 돋친 인간)은 타인을 속이려드는 아가리와 혀뿌리에서 생산되는, 그럴 듯한 말들과 있을 법한 상상을 덧붙이는 것으로 그 모양새가 제법 공고해진다.
때문에 그 개념은 다자의 동의를 얻기도 하며 사람들로부터 쉽게 실제 세계를 배척하게끔 만드는 관념으로 격상된다. 그런 가상 개념들이 결코 실재하는 세계(자연, 사회)의 한 축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지마는 그 개념에 호응하는 자들이 일삼는 어떤 느낌(그럴 것이다라는 느낌)에 바탕되어 그것이 이 세계에 요소되는, 본래의 축인 양 세계를 떠받들게 된다. 주장하는 자의 가상 세계가(가상 개념이) 실제 세계의 틈바구니로 틈입하는 사례이다.
그리고 이같은 가상 개념이 사회 내부에서 증폭되어 보편성을 획득하는 가짜 보편성의 사례를 ‘씨발보편성’이라 이른다. 떠받칠 수 없는 것이 무언가를 떠받칠 수 있다고 여기는 착각이 곧이 세계의 붕괴를 불러들인다는 바를 상기하라. 세상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산되어야 할 본질이나 개념이, 외려 이러한 쓸모 없는 양태로하여 우리의 이해를 해치곤 한다.
가상 개념도 그 개념을 세분할 수 있으며 그 대략의 분류는 아래와 같다.
*증폭적 가상 개념
*생물학적, 물리적 가상 개념
증폭적 가상 개념은 발생 빈도가 극히 적은 특정 사건의(혹 대상의) 발생 빈도를 과장시키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약화시킴으로써 만들어진 가상 개념을 총칭한다. 사회 구조상 나타나기 어렵거나 나타나기 쉬운 대상이나 사건의 발생 빈도에 조작을 가하는 사회적 가상 개념도 여기에 해당된다.
예컨대 개념의 창안자는 특정 가정의 형태를 ‘그럴듯 하게’ 조작하는 것으로 이 같은 가상 개념을 만들어내는데, 이렇게 하여 조작된 가정의 형태가 전체 가족 집단 내에서 극히 적은 비중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다자의 호응이 더해지는 것으로 씨발보편성을 취득게 된다. 오래지않아 그 가상 개념은 사회에 편입되어 특정 가족 집단의 보편적 양태로 통용된다.
생물학적, 물리적 가상 개념은 우리가 지니는 기질적 제약과 물리 세계의 제약을 한껏 제거하거나 거기에 반하는 사실들을 몇 가지 추가함으로써 달성된다.
우리는 만화 영화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의 손아귀로부터 쏘아지는 기를 응축한 파동의 형태가 창작물에서만 허용되는 '가상' 개념임을 직관적으로 안다. 우리는 그런 개념이 물리 세계에 편입될 것이라고 가늠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기질적 특성이나 물리적 특성이 위와 같은 직관을 수렴하지 않는다면 또는 그 사실을 수학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특정 개념이 창작물에 한하는 가상 개념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어렵게 된다.
아래는 19세기의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대표했던 바쿠닌과 마르크스의 각각의 사상에 대한 견해이다.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바쿠닌: 소수의 특권 계층을 위한 자리가 마련된다면 이들은 더 이상 노동자를 대표하거나 대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종내 노동자 위의 군림하기 마련이다. 공산주의자란 작자들은 이 같이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수반하지 않는다.
마르크스: 협동조합의 진정한 의지는 그런 기질적 제한을 초월한다. 협동조합에서 관리자가 도맡고 있는 아주 막중한 임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그런 사상적 종언을 선언하는 것이다.
두 사상가의 담화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바는 바쿠닌은 기질적인 결함 혹 제한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를 지니고 있었고 마르크스는 그렇지 않았다는 차이에 있다. 몰이해로부터 사상자의 '가상 개념'이 발족된 것과 같이 가상 개념이 어떻게 세계에 편입되는가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다자의 생물학적(물리적) 이해 수준에 좌우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가상' 개념(실재할 수 없다고 여기는)과 구분되는 '가상 개념(실재한다고 간주하는)'이 얼마나 쉽게 세상에 편입되는가를 배웠다. 이처럼 '가상 개념'과 '가상' 개념의 두 양자는 정의상 분별 가능한 개념이지마는 그것들이 복잡성을 띠면 띨 수록(그 개념에 대한 이해수준이 낮을 수록) 우리가 그것들에 분별력을 잃는다는 바를 염두에 두자.
끝으로 위의 '가상 개념'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개소리'이다.
*본문은 개념의 주창자가 어떠한 의도로 가상 개념을 만들었는가를 편들지 않는다.
의도란 객체로부터 탐구될 수 없는 주체적이고 주관적인 마음 상태인 때문이다.
어떤 대상의 높은 이해 수준을 까닭으로 하여 본질성에 의도적으로 조작이 가해진 경우와(해체하거나) 이에 반하는 낮은 이해 수준을 까닭으로 그 대상의 제약 요소를 고려할 수 조차 없어 그 요소가 자연히 탈락된 경우 가운데 어느 쪽을 현상 일반이라고 가정하지 않는다.
어떤 본질을 말하는 자의 본질성 제거는 그 자가 정말로 본질에 대해 몰랐던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
일 년 전에 쓴 거 구글 문서 뒤지다가 발견했는데
뭔가 좀 부족한 거 같아서 사흘 전부터 본문에 살을 덧붙이다보니
그 분량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샘
나도 독후감 쓰다보면 걍 책 한 권임 - dc App
ㄷㄷ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