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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의레 소설이 보여주듯이, 마치 우연적 사건의 연쇄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작가의 놀음에 불과했던, 필연의 단편인가.


나는 낮에 온전한 집중을 다해 비문학을 읽고, 자기 전 침대 맡에 누워 소설책을 읽는다. 공교롭게도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고 잠자리에 들기 전 이 소설을 마저 읽게 되었다. 이제 막 다 읽어 미처 정리하지 못한 <도피>의 여운이 <고래>로부터 정리가 된 것은 아직 신을 내려 놓지 못한 내 입장에서 작가의 놀음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반편이 춘희, 말 못하는 네안데르탈인으로 묘사되고, ‘여자’에 걸맞지 않는 완력과 덩치를 소유한 사람. 작가가 붙여준 ‘반편이’라는 별명에 걸맞는 모자라 보이는 사람. 일반적 잣대로 봤을 때 사람에 반쯤 미치지 못하는, 그럼에도 사람은 사람이다. 말은 못하지만 자연과 교감하고, 타인의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작중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춘희의 행위다.


춘희는 벽돌을 굽는다. 자신의 육체의 욕구를 채우는 것 일체를 제외한 모든 시간은 벽돌을 굽는데 사용한다. 벽돌을 굽는 행위, 화폐의 의미도 모르는 춘희에게 어떤 경제적 이득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합리적 개인 안에 포함시킬 수 없는 그러한 행위를 죽을 때 까지 반복한다. 누군가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의미 없는 행위의 반복으로, 누군가는 누군가를 기다림을 표현한 행위로, 누군가는 장인의 행위로, 예술가적 행위로, 종교적 행위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그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 설명과 해석을 유예함으로써 그녀의 행위가 단순히 평가적 명제 안에 머물지 않도록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 오히려 진실에 부합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작가의 편을 들어주지는 못하겠다. 춘희의 행위를 프롬의 말을 빌려 말해보고자 한다. 프롬의 견해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자신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인간은 ‘원초적 유대’로 부터 벗어나 점차 개인화되었다. 인간은 파편화되어 가면서 자유는 늘어났지만, 그와 동시에 고독과 무력감이 발아하여 불안에 휩싸인다. 개인은 그러한 부정적 감정을 참지 못해 또 다른 유대로 도피하게 된다는 것이 인간의 한 측면이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적 토대가 파시즘 태동의 일부를 설명한다고 프롬은 주장한다. 이와 다른 측면으로는 자신의 온전한 개성을 바탕으로 통합된 인격의 자발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있다. 그렇게 실현함으로써 나와 다른 인간, 그리고 자연과 통합하면서 부정적 감정을 극복하여 진정한 자유를 향할 수 있다.


다시 춘희로 돌아가보자. 머릿발이 하얘지고 백킬로에 가깝던 몸뚱아리가 삼분의 일이 되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 젊음에서 죽음으로 다가가는 내내 벽돌을 굽는다. 고독에 휩싸인 춘희는 자기 자신만의 행위로 자신을 온전히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세계와 지속적으로 통합시키고 있던 것이다. 벽돌을 구우면 누군가 올 것이라는 기대감, 벽돌을 구울 때 스쳐지나가 듯 생각나는 의부와 쌍둥이 자매들, 그리고 엄마. 그것들이 동력이 되어 세계와 결합됨으로써 춘희는 고독과 불안을 지워 나간다. 물론 춘희도 그 시절 여타 국민들처럼 권위에 기대어 불안을 해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권위에 기대지 않으면서 자신의 오롯한 모습을 보여주는 춘희를 보여줌으로써 한 인간의 이상적 모습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 ‘반편이’로 모사되는 춘희가, 반편이로부터 비롯된 부조리가 안쓰러웠나보다. 내 그 상황의 해법은 모르지만, 그녀에게 비하된 표현은 약간이나마 덜어 주고싶다. 반편이, 모자란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사람들의 우연적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본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우연적 성질일 뿐이다. 외적 평범함의 잣대에 미달된 모자람이 아니라, 그녀가 사람의 본질적 특성을, 더 나아가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으로 ‘반편이’의 모습을 기억하고싶어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