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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주인공은 창녀인 아내의 일터이자 집인 유곽에 얹혀 산다. 그는 나름 지식인인 듯하지만, 집 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돈을 벌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장난감으로만 써먹는 거울처럼, 그는 실용성이 다한 인간이다.
"거울이란 제 얼굴을 비출 때만 실용품이다. 그 외의 경우에는 도무지 장난감인 것이다."
어쩌면 "날개"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글 깨나 쓰면서 조국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작가 본인의 죄의식이나 자괴감같은 걸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는진 모르겠다. 다만 내가 날개를 통해 보게 된 건, 바로 나였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럴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천재소년 콤플렉스에 대해 어떤 심리학자가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어릴 때 똑똑하단 소리를 많이 들은 아이들은 천재라는 이미지에 꽂혀 일부러 노력을 안한다고 한다. 만약 노력을 했다가 실패하면 자신이 천재가 아닌 것이 되니 처음부터 노력을 하지 않고, 실패한 뒤에 '열심히 했으면 쉽게 성공하는 건데, 열심히 안해서 그렇다'고 정신승리하고 마는 것이다.
인정욕구는 어린 시절 들은 칭찬에 우리 정신을 매어 놓고는 한다. 과거의 기쁨을 다시 느끼기 위해 현재를 포기하기도 한다. 어른이 된 '산낙지를 잘먹는 아이'는 어린 날의 특별함이 시간에 희석되어 평범함으로 변해 버렸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박제된 어린시절의 정신으로는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힘들다.
또한 어른에게는 짊어져야 할 책임이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책임감과 희생을 절절하게 느껴봐야 어른이 된다고 피터슨이 말했던가? 뭐, 누가 말했든 상관없다. 굳이 피터슨이 아니어도 흔한 꼰대 레파토리가 아닌가. 연애는 책임 없는 즐거움, 결혼은 책임감의 격랑이다. 연애까지만 유쾌한 이유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고, 어른이 될 준비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화자가 머릿속에서만 여러 편의 글을 만들어내고는 잠에 들며 모두 잊어버리는 쓸모없는 작가인 데다가 아내와 함꼐 사는 생활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임을 생각하면, 그에게 결혼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방 두개짜리 유곽에서 화자의 방에는 낡아빠진 양복 한벌과 이부자리가 전부다. 아내의 방에는 갖가지 화장품, 화려한 옷, 작지만 햇빛이 드는 창까지 달려 있다. 전혀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화자의 삶은 간단하다.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자리에 누워 머릿속으로만 갖가지 연구를 하고 글을 쓰고는 잠에 들면서 모두 잊어버리고, 아내가 외출한 틈이면 아내의 방으로 넘어가 화장품 냄새를 맡아보고, 돋보기를 꺼내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모아 종이를 그슬리며 논다. 하루 한두번 아내가 밥을 가져다 줄 때면 그는 누운 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는 탓에 아내를 제대로 본 지도 오래된 듯하다. 단지 아내의 화장품 냄새를 통해 아내를 상상해볼 뿐이다.
"... 고 가지각색의 화장품 병들을 들여다 본다. ... 나는 그 중의 하나만을 골라서 가만히 마개를 빼고 병 구멍을 내 코에 가져다 대이고 숨 죽이듯이 가벼운 호흡을 하여 본다. ... 확실히 아내의 체취의 파편이다. 나는 도로 병마개를 막고 생각해 본다. 아내의 어느 부분에서 요 내음새가 났던가를...... 그러나 그것은 분명치 않다. 왜? 아내의 체취는 요기 늘어섰는 가지각색 향기의 합계일 것이니까."
집 바깥의 진짜 세상은 아내의 방에서만, '책보'만한 햇빛이 드는 창을 통해 간접적이고 일시적으로나마 마주할 수 있고, 낮에 집을 나서는, 현실을 살고 있는 아내는 그나마 화자를 세상과 연결해주는 다리다. 그런데 그런 아내마저도 화자는 직접 마주하지 못하고 오직 파편들로만 만족한다. 그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바깥세상의 힌트들은 한낱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꿈을 꾸는 사람은 많고, 이루는 사람은 적다. 왜일까? 많은 사람들이 꿈을 위해 노력했다가 실패하고 좌절할까 두렵고, 책임감은 직접 안기엔 너무나 무거우며, 현실을 마주하기보단 엿보고, 상상하고, 그저 저 멀리서 반짝이는 것으로만 남겨두는 편이 더 안전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적어도 내게는 그런 모양이다.
그렇게 매일 집구석을 벗어나지 않던 화자는 일련의 사건을 겪는다. 아내의 애정을 느껴 보기도 하고, 아내의 영업을 방해하기도 하고, 아내가 자신에게 감기약이라고 먹인 게 수면제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받기도 한다. 그러다 백화점 옥상을 올라가서는, 바삐 오고가는 (당시의)현대인들을 바라본다. 거리의 사람들은 피곤에 찌든 모습이다. 하지만 그게 삶이다. 화자는 생각한다.
"우리들은 서로 오해하고 있느니라. 설마 아내가 아스피린 대신에 아달린의 정량을 나에게 먹여 왔을까? (......)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가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서머셋 모옴은 높은 이상과 처참한 현실을 빗대어 "달과 6펜스"라고 불렀다. 원래 이상과 현실은 발을 맞춰 갈 수 없다. 이상이 현실이 되면, 더이상 이상이 아니다. 그러니 그저 끝없이 절뚝이면서 살아가는 게 최선이다.
화자는 바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는 마치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다시 날아보고자 마음먹는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내가 처음 "날개"를 접한 건 수년 전 김태리가 녹음한 오디오북을 통해서다. 김태리의 목소리와 낭독이 책에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두어번 쯤은 들은 것 같다. 나중에는 책을 찾아 읽어 보았다. 김태리 목소리가 역시 사기인가 싶을 정도로 별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1,2년 쯤 후에 다시 읽어봤다. 이번엔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각자가 살아가는 시기에 따라 특별한 울림을 주는 책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주파수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 테마곡처럼, 인생에는 테마소설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한동안, 어쩌면 지금도, 내 테마소설은 "날개"다. 물론 나는 히키코모리도 백수도 아니지만, 이 작품이 주는 울림이 나를 조금 더 현실에 가까이 붙여 놓았다. 이상이 어떤 의미로 썼는지는 모르겠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하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힘들고 피곤할지라도 삶을 마주보고 나아가려는 용기를 읽어낸다. 그리고 나도 내 하찮은 날개를 열심히 푸드덕이며 살아가려고 한다
어린아이의 호기심과 정신을 유지하되 어른의 이성과 정갈함, 분석을 유지하고 살고 싶은데, 날개는 그런 조화에 실패한 피폐해진 어린아이같이 쭈그러들고 만 이상주의의 (작가 이름이 [이상]이라 굉장히 역설적인데) 어른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음 감상문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드네요
어른이란 단어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주는 느낌이 매번 다른거같음. 각자 살아가는 시기에 따라 울림을 주는 책이 있다는덴 크게 공감함… 잘읽고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