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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의 과학>, <태아의 세계>, <뼈운동>
철저히 개인의 입장에서, 본인의 흥미에 따라 현상을 탐구하고 사변을 이어가는 책들이 있다. 이런 책들은 근거와 논리가 탁월해서, 결과가 놀라워서 재밌는 책은 아니다. 검증되지 않은 사이비, 사짜라며 비판을 받기도 하고, 별 볼일 없는 변두리 야전의 논리일 뿐이라며 무시 받기도 한다. 나는 바로 그 매력에 끌린다. 그들 자신만이 가진 지적 고유성이라고 할까?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을 탐구의 방식과 열정, 그 결론들이 있다. 이미 검증된 지식들의 세계에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기어코 검증되지 않은 세계로 나아가며, 심지어 검증될 수 없는 세계에 터를 잡기도 한다.
그런데 이 세 권의 책들은 학문 서적이 아니다. 모두 가벼운 에세이일 뿐이다. 대기업 석박사들이 모여 만든 과학적 레시피도 아니고, 세계적인 셰프가 만든 유명 레스토랑의 주력 메뉴도 아니고, 내 입맛에 딱 맞는 라면 레시피 정도 되겠다. 위의 책 세 권은 모두 그러한 성격이 크다. 그리고 그 성격들이 또 각자 다 다르다.
MLB 올드 레전드인 테드 윌리엄스가 쓴 <타격의 과학>은 야구에서 배트로 공을 치는 행위 하나를 두고 다양하고 넓은 관점에서 사고한다. 그 사고의 폭은 몸의 쓰임에서부터 배트의 모양과 공의 구질, 투수와의 심리전, 관중과의 소통과 경기장의 물리적 조건까지 넓어진다. 공을 잘 치는 것이 목적인 타자로서 이 책은 지극히 실용적이다.
자연철학자인 미키 시게오가 쓴 <태야의 세계>는 태아의 발생 단계를 연구 관찰하면서 진화의 연대기를 발견하고, 자연 세계와 문화의 교차점에서 하나의 진리를 사변한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해 계체 발생에서 계통 발생을 관찰해내는 비교생물학적 이야기는 저자 개인의 생생한 체험이면서 동시에 인간 보편, 생물 보편의 진리를 담아낸다. 경험으로부터 철학을 이끌어내고, 철학을 과학으로 검증하고, 다시 경험으로 순환하려는 이 책은 미키 시게오라는 개인의 경험주의적 철학관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신체철학 연구소, 뼈운동 센터의 원장인 유자키 요시오가 쓴 <뼈 운동>은 서구의 기계적 관점에서 나온 근육에 대한 찬미가 인간의 몸 구조 그 자체인 뼈를 맹시한다는 지적으로 시작한다.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근육만 좋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되려 만성 통증과 질병을 유발한다는 지적은 자연스럽게 뼈의 건강이란 무엇인가? 자기 몸의 뼈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뼈 건강을 위한 동작들을 소개한다. 비록 얄팍한 책이기는 하나, 근육에서 뼈로, 외형에서 움직임으로 관점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관점의 전환.
“사물을 다각도로 바라보라” “다양한 관점을 가져라” 류의 말들은 “건강 검진 꼭 받으세요” “코로나 조심하세요 마스크 꼭 쓰시구 ㅎㅎ” 정도의 인사말 정도로 격하된 지 오래인 것 같다. 노파심 한 스푼 머금고 허세도 약간 탄 다음, 내심 상대가 내 말대로 해주길 바라는 강요 섞인 권유처럼... 그 내용이 쓸모가 없어져서가 아니라, 마치 안 하면 껄끄러운 관용어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이 말을 하는 사람들도 으레 끝말로 던져주는 덕담처럼 하고 만다. 왜 관점을 바꿔야 하는가? 이 이유에 대해서도 온갖 덕담들이 쏟아진다. 단적으로 말하면, 문제가 해결이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문제들의 왕이 있다면 “뭐가 문제인지를 모른다는 문제”일 것이다. 위의 책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직면한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점을 바꿔야만 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스윙을 올려칠 것인가, 내려칠 것인가, 가져다 댈 것인가? 직구는? 다른 공은? 각각의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타격폼은 무엇이며, 어떤 궤적을 형성하는가? 궤도의 시작점과 끝점은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가? 배트가 그려낸 궤적은 타자가 행한 움직임의 결과인데, 그것이 역으로 바른 자세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 아니라면 어떻게 접근해야하는가? 파워는 팔에서 오는가? 상체에서 오는가? 하체인가? 힘의 근원이 엉덩이임을 확인하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하였는가?
태아의 발달 단계를 직접 관찰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필요한가? 태아의 혈관에 먹물을 주입하는데 필요한 기술과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시행착오들이 있었는가? 인간의 태아에도 같은 방법을 시도할 것인가? 그 모든 실험의 결과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는 과학적 사실과 삶의 진실은 무엇인가? 반복된다 라는 생각에서 이끌어 낸 리듬이라는 키워드는 세상만사를 어떻게 조형하는가? 그렇게 조형된 세상사는 다시 한 개인의 인식을 어떻게 바꿔놓는가? 아니 바뀌기는 하는가?
인간의 움직임은 근육으로 행해지나 그 구조는 뼈에 종속되어있는데도 왜 우리는 뼈를 등한시하고 근육에만 집착하는가? 뼈의 건강은? 특징은? 쓰임은? 뼈를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뼈를 기준으로 다시 움직여본 자세의 결과는?
다양한 관점은 다양한 답변을 내놓는다. 그중 정답이, 진리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아무런 대답도 없으면 검증도 할 수 없다. 검증되지 않은 가설은 실전에서 무의미하다. 관점의 다각화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는 메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탐색의 여정이며, 곧 질문의 다양성을 필요로 한다. 풍부한 수사와 예리한 변증.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고란, 수사와 변증의 예술임을 진즉에 알았다. 그런데도 나는 생각을 하기 위해 다양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질문의 형식을 바꾸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주장하기 위해, 그 생각이 나의 일부가 아니라 나 자신이 그 생각의 일부가 되어 홍위병을 자초하고는 했다.
관점을 바꿔라. 다양한 관점을 갖자. 덕담과 소원 빌기에 머무는 이 명령어들은 해체될 필요가 있다. 자, 그럼 이 책들을 읽고 나는 더 똑똑하고 현명하고 다양한 질문을 던지며 검증하고 성과를 내는 사람이 되었을까? 전혀! 당연하게도 나는 이 책들의 내용을 모른 채로 이 책들을 집어 들었고, 읽고 난 후의 감상을 쓸 뿐이다. 그저 재밌게만 읽고 덮기는 아쉬워서 글을 쓸 뿐이다. 그럼으로써 책들의 가치, 적어도 독서의 가치를 정당화해볼 뿐이다. 고작 에세이 몇 권 읽고 뭐가 달라졌겠는가? 자아를 찾는답시고 룰루랄라 노나기만 하던 사람들처럼 자아를 찾으면, 좋은 책 몇 권 읽으면 마음의 평화를 찾겠는가? 부귀영화라도 누리겠는가? 인간의 자아란 비루하고 남루한, 고약한 녀석이 아니었던가? 자아 찾기 여행은 자아 회피하기 여행처럼 보일 지경이다. 책은 강화주문서가 아니다. 다만 관점을 다각화해보는 책을 읽음으로써, 다른 관점을 주장하는 책을 읽음으로써, 내 사고의 방향을 살짝 틀어볼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부분과 전체>를 쓴 하이젠베르크도 스승인 닐스가 즐겨 쓰던 수사적 표현을 등대 삼아 사고의 방향타를 바꾸지 않았던가? 그렇게함으로써 무언가를 발견하기를, 그게 도움이 되는 무언가이기를 기대할 뿐이다. 우리는 생각이 어디서 오는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생각은 떠오른다는 사실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누구의 말마따마 영감이 찾아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몽둥이를 들고 찾아가야 한다. 만약 당신이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면, 당신은 왜 무언가를 하고 있는가? 혹 다른 관점, 다른 대답, 다른 질문에 목말라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이 그 갈증을 채워줄 수도 있다. 다만 홍위병이 되지 말자는 "덕담"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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