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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공의 도보로 소설이 시작된다. 소세키는 화공의 입을 빌려 자신의 예술론을 설파한다. 소세키가 상념해온 의지가 화공의 마음에서 피어난다. 그렇게 피어난 문장과 짧고 긴 문단들이 제각각의 크기를 지닌 회화로 눈 앞에 나타난다. 연상된 그림들은 화공이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어서야 잠시 숨돌릴 틈을 준다. 문장의 필치가, 독선적으로 읽힐 수도 있는 문장이 독자를 끈끈하게 잡아당긴다. 읽은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던 나 때문에 화공은 한동안 넘어진 채로 가만히 있어야 했다.

  넘어졌던 화공은 일어나 숙소를 향하면서 눈 앞의 정경을 묘사한다. 생각하고 뱉기만 해도 그의 심상이 눈앞에 펼쳐지니, 역시 화공이다.

  산중을 도보하다 들은 종달새의 울음에 답가로 셸리의 시를 암송한다. 사람은 본연적으로 기쁨 뒤의 슬픔, 슬픔 앞의 기쁨을 지각하는 존재임에 아쉬움을 표한다. 순수한 기쁨으로 노래하는 종달새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자연에 심취하면 기쁨의 이면은 사라지고, 따라서 괴로움을 느낄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자연을 느끼면, 순수한 시경에 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중론이다.

이러한 상태에 이를 수 없게 하는 게 인정(人精)이다. 서양의 소설이나 연극은 인정으로 가득해 사람의 마음을 세속에다 내리꽂는다. 근간이 돈 계산에 있기에, 시비와 인정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동양의 시가는 그것을 해탈한 것이 있다. 오관에 들어온 자연을 곧바로 필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동양의 시가는 세속이 끌어당기지 못할 만큼 높은 곳에 넝실넝실 흐르고 있다.

  그러나 화공은 속세의 사람이다. 비인정을 갈구함이 오히려 속세에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를 탈피하려 오히려 서양의 예술론을 끌어오기도 한다. 정이 동보다 우월한 것이니, 멈춘 상태에서 하는 움직임의 망설임이, 느껴지는 이전 움직임의 잔상이 미의 필수 요소라고 되뇌이던 순간, 그의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난다. 여인은 그의 시선을 빼앗는다. 여인을 둘러싼 음흉한 소문도, 그녀의 움직임이나 그녀가 뱉는 말에 요상한 면이 있어도 그는 그녀만을 주시한다. 그녀를 보는 것, 그녀를 듣는 것. 화공은 여자에게서 묘한 기운을 받기 시작한다.

그는 시구를 지을 때도 레싱을 떠올리며 시구를 지으려 든다. 서양을 경멸하지만 서양에 영향받고 있다. 허나 곧 비인정을 갈구함으로서 레싱을 탈피하고 순수한 자신의 감상을 적어낸다. 이렇게 조금씩 서양의 것들을 탈피하고 왕유와 도연명의 세계에 발을 딛는다. 그러나 서양의 시론을 탈피해도 어딘가 부족하다. 그림의 제재가 되기에도 부족하다. 부족하고 부족해서 자꾸 시구를 짓는다. 회화를 그리려 떠난 도보 여행에서 마땅한 제재를 찾지 못 해 시구를 짓고 있다. 좋은 제재를 찾아도 그 부족함 때문에 그림 한 점 그리지 못 한다.

  진전없는 상황에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온천장에 몸을 담근다. 수면 아래에 몸을 담구고 물살의 방향을 느낀다. 흐르듯이 사는 것이 이리 편하다면 익사자는 풍류 아니겠는가. 이런 식으로 보면, 익사핱 오필리아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여인은 또 한 번 모습을 비춘다. 그 모습은 뇌리에 진한 음각으로 새겨진다. 그녀는 온천을 즐기려 나신으로 이 온천에 들어왔다. 그녀의 나신은 수증기에 가려 실루엣만으로도 아름답다. 아름답게 보이는 데에만 치중해 천박해진 서양의 나체화와는 다르다. 벗어서 천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벗은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속세의 잔향을 느낄 수 없는 나신. 그 나신에 화공은 매료된다.

  "나는 이 윤곽이 눈에 들어왔을 때 계수나무의 도읍에서 도망쳐온 달나라의 선녀가, 뒤쫓아 오는 무지개에 둘러싸여 잠시 주저하는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이후 화공은 여자의 모습을, 떨어지는 동백꽃의 영원한 느낌과 결부한 그림으로 그려내려는 생각을 한다. 허나 구상에서부터 막히게 된다. 길어봤자 100년 남짓 사는 인간으로 영원을 표현하려니, 인간의 무엇이 영원함을 내포하겠는가? 그 무엇을 얼굴의 표정, 그 중에서도 '연민'의 표정이라 화공은 답을 내린다. 그러나 요상한 그녀의 내면은 그녀의 얼굴에 '연민'이 드러나지 못 하게 한다. 그는 그렇게, 그녀의 옆에서 생활하며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연민'을 포착하기만을 기다린다.

  얼마 후 여인의 남동생은 러일전쟁을 위해, 어린 나이에 군으로 동원된다. 여인의 전남편 또한 동생과 같은 기차를 타고 만주로 떠난다. 두 번의 헤어짐을 간극 없이 겪은 여인은 망연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망연함이 가슴에 꽂혀 얼굴에 '연민'으로서 드러난다. 고대하던 그 연민을 직시한 화공은, 화제를 찾았음에 기뻐하며 연민에 동감하기보다는 감탄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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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우월하고 편리한 문물과 문화는 만국을 서양의 성격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기상부터 취침까지 서양의 것들로 가득 차있다.
음식과 언어를 제외하면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대한민국 국위선양에 일조한다는 에스파, BTS.. 이들의 음악도 서양 음악에 한국어 가사를 덧붙였을 뿐이다.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에서도, 가창에서도 우리의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우리 것이라 할 수 있는 가사마저도 해가 갈수록 타국의 언어로 점철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위가 아니라, 서양의 음악을 선양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성은 희석되고 있다. 방언, 음식, 의복, 설화, 주거. 모든 것이 기록으로만 남는다.
머잖아 민족성이라 할만할 것이 국적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지도 모른다.

남은 빈약한 민족성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의 선택을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이미 침범당한 부분은 놔두되, 남은 부분만이라도 온전히 할 것인지.
두 번째는 주류인 서양문화에 편승해, 우리의 것들을 잃을 지라도 어느 정도 편안함을 추구할 것인지.

잃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시대가 요구하는 바가 늘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전의 시대가 제각각의 개성을 요구했다면,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가 연결된 시대는
소통의 편리함을 위해 언어도, 문화도 모두 비슷하게 변하기를 요구하는 게 아닐까.
무엇이 우월하고 열등한지, 무엇이 친숙하고 낯선지의 문제는 나중에 자연스레 해결되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의 민족성을 희석하는 것은 시대일 수도 있겠다.

'풀베개'가 담고 있는 소세키의 회한은, 자문화를 지키고픈 모두에게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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