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 하느님과 나」



  세상 새끼들 지랄하는 게

  하도나 꼴보기가 싫어서

  티베트의 하느님은

  히말라야 산맥 위의 하늘의 거실에서

  매양 두 눈뚜껑을 덮고만 지내기에

  인제는 그게 너무나 무거워져

  눈 뜨고 무얼 꼭 봐야 할 마련이면

  승지놈들을 시켜

  대막대기로 그걸 열게 해

  떠받들게 하고서야

  겨우 보신다지만


  어유

  여(余)에겐

  대막대기도

  승지도

  귀찮기만 해,

  소대성이의 조으름만이

  그래도 그중 달가웁고녀.



- 『산시』(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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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엣비슥히 비기어 누워' '잠이나 들까' 한다는 「저무는 황혼」의 한 구절을 언급하기도 했지만,(사실 이 구절은 이남호의 글에서 처음 주목된 것이다) 이 비껴 가는 삶의 태도와 관련하여 종종 엿보게 되는 소재가 바로 잠자기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낮잠」과 함께 위의 시를 들 수 있어 보인다. 「낮잠」은 그냥 보면 알쏭달쏭한 시지만 서정주가 그의 산문 「자하문」에서 밝힌 것처럼 역시 역사적 설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법화경의 글자 하나를 까먹은 사미(沙彌)가 그 내력을 알게 되는 것은 꿈속에서이다. 그러므로 「낮잠」에서의 잠자는 행위 역시 단순히 문제를 내버려두거나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찾아가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맥락을 살피(려 하)지 않는 독자는 서정주가 말하는 잠자기의 뜻을 회피 이상의 것으로 보지 않을 수밖에 없다.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은데도 말이다.


위의 시에서 소대성을 말한 것은 「낮잠」에서보다도 직접적이다. 소대성은 잠만 퍼자다가도 할 일은 또 다 하는 인물이라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허생이 큰일 벌이기 전에 하던 백수 노릇이나 『사기』에서 시작해 흥선 대원군의 야담으로 옮겨 간 상갓집 개라는 표현을 연상케 한다. 이 시는 보다시피 더러운 세상을 보려는 두 태도에 대해 노래한 것이다. 히말라야에 앉은 '티베트의 하느님'이나 화자 자신이나 '세상 새끼들 지랄하는 게/ 하도나 꼴보기가 싫'은 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하느님은 보아야 할 것이 있으면 승지와 대막대기를 써서라도 눈꺼풀을 열어야 한다. 그러나 여(余)는 당연히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에 눈뜸의 의미보다도 승지와 대막대기를 꾸려야 하는 것의 거추장스러움을 더 느낀다. 기왕이면 대인이 되는 것도 좋겠지만 소인은 소인대로의 해결책이 또 있는 것이다. 왜 소대성의 영웅으로서의 행동이 좋겠다고 하지 않고 소대성의 졸음이 좋겠다고 하겠는가? 당연히 전자처럼 말하는 건 키치적이기 때문이다. 그저 자고 싶지만 잔 뒤에는 깨서 뭔가를 하려고는 할 다짐이 있는 것 같은, 그러나 실제로는 그냥 자고 말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기에 서정주의 리얼리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