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동아사이언스, [박진영의 사회심리학]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
무언가, 인생의 빈 자리가 느껴진다.
살아있다는 감각은 있지만, 어쩐지 공허하다.
가슴 한 구석이 진공상태인 듯한, 이 느낌은 무얼까.
심장의 나침반이 북극점에 선 것처럼 뱅뱅 돌고만 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무얼 해야 할까. 모르겠다.
결국 나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날아가는 저 나뭇잎처럼.
오늘도, 목적지를 찾아, 이정표 없는 길을 따라 걷는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이 무력감에서 벗어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눈치 챘겠지만, 오늘 이야기할 것은 만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줄거리
무난한 스타일, 무난한 교우관계, 무난한 성적.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 오사와 유.
어느 날, 무뚝뚝하고 말이 없어 속을 알 수도 친구도 없는, 그러나 예쁘고 매력있는 전학생 고이즈미가 라멘집에 줄을 서고 있는 걸 발견한다.
전학생 고이즈미의 취미는 바로 라멘 미식 기행!
유는 고이즈미와 친해지기 위해 같이 줄을 서고, 먹고, 일방적 대화도 하며 친구가 되자고 하지만, 고이즈미의 대답은 NO!
하지만, 이미 고이즈미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오사와 유는, 그런 냉랭한 거절에도 아랑곳 않고 오늘도 고이즈미와 친해지기 위해 오늘도 고이즈미를 쫓아 라멘집으로 따라간다.
오늘도 고이즈미와 유의 알콩달콩한 라멘 탐방 기행기!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오피니언뉴스, "일본 총리 9명 중 호감도 1위 고이즈미···기시다 6위"
소개만 봐서는 알기 어렵지만, 사실, 이 만화는 등장인물부터 좀 맛이 갔다.
고이즈미는 라멘 마니아인데, 라멘을 먹기 위해 시험 기간에 결석을 하고 저 멀리 지방까지 가거나, 살갑게 다가오는 친구를 거절하는데,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 혼자 라멘 기행하는 데 방해가 되니까. 심지어 라멘 잘 안 먹는다는 말에 곧장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는 등. 오로지 라멘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Action/Aid
평범한 캐릭터로 소개된 오사와 유도 역시 정상이 아니다. 고이즈미에게 거절당해도 계속 다가간다. 두 번 거절 당해도 '어쨌든 오늘은 말을 많이 나눴다'는 이유로 기뻐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보면 그냥 친구가 고픈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고이즈미와 학교 친구 미사가 같이 라멘집에서 나온 걸 보고, 마치 바람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정색을 하고 분노한다.
그래서 만화의 내용은 유가 스토킹에 가까울 정도로 쫓아다니고, 고이즈미는 귀찮다고 거절하면서도 시간이 지날 수록 받아들이는. 그런 알콩달콩한 내용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주요 내용은 라멘 소개이지만. 어쨌든.
그런데 좀 희한한 건, 유가 고이즈미에게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것. 처음 부분만 보면 그냥 예뻐서 반한 것 같지만, 그런 것 치고는 납득이 안 간다. 단순히 예뻐서라면, 학급 반장이나, 잘 꾸미고 다니는 친구 미사도 있는데. 왜 하필 고이즈미일까?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MedpageTodat, Gay, Lesbian Adults Vaxxed Against COVID at Higher Clip
사람은 가면을 쓰기에 무력하다
유가 처음 고이즈미를 제대로 보게 된 건 어느 날 방과 후.
어머니도 집에 없고, 끼니는 때워야겠고. 마침 라멘은 먹고 싶지만, 라멘이라는 요리는 여학생이 혼자 가서 먹기엔 눈치가 보이는 음식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갈팡질팡할 때, 그냥 아무렇잖게 교복 차림으로 서서 기다리는 전학생 고이즈미를 보게 된다. 그렇게 같이 서서 맛있는 라멘도 먹고, 전부터 말이 없어 알기 어려운 고이즈미를 눈 앞에 두고, 친구의 취미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렇게 유는, 여태 해왔던 식사 중 가장 행복한 식사를 만끽하게 된다.
다른 인물이 고이즈미와 가까워지는 것도 비슷하다.
미사는 남자친구에게 '너무 인기가 많은 아이와 사귀는 건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데이트 약속 장소에서 차이고 만다. 절망하며 소리지르던 미사는 지나가던 동급생 고이즈미를 보게 된다. 행여 고이즈미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본 걸까. 그런 걸 물으려고 따라갔다가 얼떨결에 고이즈미와 함께 무진장 매운 라멘을 먹고, 비로소 눈물을 흘리게 된다.
반장 다카하시 준은 기대받는 학생이다. 성적이 높게 나오자 '역시 반장' 이라는 말이 반에서 공공연하게 나올 정도로, 흠 잡을 데 없는 우등생이다. 그런 와중에, 선생님 대신 낙제점을 받은 고이즈미에 대해 알아보게 되다, 같이 라멘집에 가서 함께 라멘을 먹게 된다. 마침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하지만, 잘 안 먹는다고 했었는데, 이유는 단순하게도 안경에 김이 서린 걸 보고 놀림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 결국 반장은 고이즈미와 함께 식사를 하며, 안경을 벗어놓는다.
그러니까 요는,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없었던 아이들이, 고이즈미를 계기로 자신에게 솔직해지면서 기쁨을 느꼈다, 이 말이다.
고이즈미도 마찬가지로, 사람 귀찮게 여기고, 방해된다 여기지만, 막상 친구들에게 라멘을 주제로 얘기할 땐 아주 열성적인 데다, 친구가 라멘을 먹여줬다고 친구 사물함에 라멘 가게 쿠폰을 잔뜩 넣은 걸 보면, 그냥 사람과의 관계가 서툴어 포기하고 취미에 집중할 뿐이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에드 스태포드의 미지를 향해서』 中.
백합 장르에서의 소녀는 '연약하고 대상화되어 있는, '어머니'이자 '아내'가 되기 이전의 존재이자 훼손되지 않은 순결한 존재. 그렇기 때문에 늘 훼손당할 가능성을 가진 존재¹'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 말과 같이, 여기에 등장하는 소녀들도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세상을 배우는 아이들에 불과하다.
인용¹: 신현아, 「한일 '백합물' 서사 속 소녀 표상의 시차」, 동서대학교 일본연구센터, 『차세대 인문사회연구』, vol., no.18, 2022, p.173.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teleSUR, Bolivia's First Out Lesbian Talks An/archism and Feminism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에리히 프롬은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진정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해 타인과 자신에게 가짜 자아를 내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열등감과 무력감의 뿌리'라고 말한 바 있다.
자발적인 것은 솔직함이 있어야만 성립한다. 내가 먼저 행동했다고 해서, 그건 솔직한 게 아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일 지를 고민하면서 했다면, 그건 남의 명령대로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현대인들은, 분주하게 살면서도, 계속 노력하면서도 무력하다. 솔직하게 살아본 적도, 솔직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으니까. 살아 숨쉴 지라도 남의 일을 하기 위한 기계에 불과하다.
꼭 무슨, 이루지 못한 자신만의 꿈을 괜히 찾아 떠돌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뭐든지 좋다. 뭐라도 좋으니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내보이고, 자신의 자발성을 획득하자.
마침 여기 인물들도,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도 솔직해질 수 없기에, 우울을 느끼다, 우연찮은 계기로 자기 마음에 솔직해지면서 행복을 얻는다.
만약, 무력감을 느낀다면, 오늘 하루는 솔직하게, 자기 욕망대로라도 먹어보는 게 어떨까.
오늘은 한 끼에 불과한 나의 솔직함이, 점차 내 인생 전체로 번지게 될 큰 첫 걸음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백합물 분석하는 논문도 있네
이글보고 오늘부터 자발적으로 백합에 난입하기로 했다 나는 솔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