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
15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어 그 곳을 관리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동산에 있는 과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나
17 단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만은 먹지 말아라. 그것을 먹으면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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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이 창설되고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심긴 그곳은
중동을 비옥하게 했던 네 강의 근원이 됩니다.
모든 것이 현재보다 더 비옥하고 아름답고 살기 좋았던 '황금 시대'에 대한 인류 공통의 그리움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노화와 죽음 앞에서 청춘과 유년 시절을 그리워할 수 밖에 없는 생명체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겠고 긴 호흡으로 보면 늘 생명체를 괴롭혀 왔던 지리나 기후 같은 환경적 변화 앞에서 느끼는 공포와 절망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약 1만 년 전의 중동의 모습은 지금 같은 사막이 아니라 목축과 농경 모두에 적합한 지역이었다고 하니, 창세기의 저자도 선대의 전설이나 자신의 관찰로 한때는 생명으로 푸르렀던 중동 지역이 현재와 같은 메마른 땅이 된 이유를 찾으려 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선악과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창세기가 완성되어 읽힌 순간부터 현재까지 신자와 비 신자를 막론하고 논란의 대상이 된 이 모순. 이 이야기를 직접 쓴 저자가 이 모순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신령을 넣어 다른 피조물과 격이 다른 존재로 창조한 신이 인간에게 명백한 갈등의 소재가 될 선악과를 의도적으로 배치했다는 이야기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창세기의 저자가 황금 시대로 시작된 생명체와 인간의 삶이 현재처럼 고통스럽고 힘들게 전락한 이유를 선악과로 설명하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죄악과'나 '타락과'가 아닌, 하나님과 뱀이 공통으로 설명하듯 선함과 악함을 분별할 수 있는 선악과라는 이름에서도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이 창조주가 허락한 '본능'의 영역 안에서만 머물 때 그 삶은 편안할 것입니다. 아직 자신이나 주변 상황을 이성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영아나 동물의 삶처럼, 본능적 결핍의 고통과 본능의 충족이 주는 만족만 반복되는 삶. 기억도 향수도,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없는 상태의 생존에 크거나 복잡한 고민거리나 갈등 따윈 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창세기의 저자 역시 동물의 삶, 영아의 삶을 보며 모든 생명체의 기원적 삶은 생물학적 본능에 충실한 얄팍하지만 안온한 것이었다고 추측했을 것입니다.
본능의 충족을 위해 창조된 아담의 아내, 그리고 서로를 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최초의 인류. 아직은 자의식도 성욕 같은 보다 성숙한 욕망도 발현되지 않은 아이와 같은 최초의 인간들 위로, 선악과가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듯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결국 악의 문제 패치노트의 중 가장 오래된 항목중 하나가 아닌가 싶네요 아직도 안 고쳐진 거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