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0.들어가기에 앞서
1. 학교
2. 방
3. 세계
4. 만화
5. 쿄모토의 방
0. 들어가기에 앞서
후지노와 쿄모토는 학급신문에 실리는 4컷 만화를 계기로 만났다. 둘은 함께 만화를 그렸고, 서로의 길을 가기 위해 헤어졌다.
룩백, 후지노가 줄곧 보여줬던 뒷모습과 쿄모토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이었다. 룩백은 후지노가 실천하는 자기형성의 기술이었다. 밑의 글은 이 '기술'에 촛점을 둔 글이다.
https://gall.dcinside.com/m/reading/604429
*이 글은 룩 백 애니화 기념으로 쓴 분석글입니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이론에 기반해 분석했으나 이론 설명은 최소화 간소화 했다. 룩 백 - 자기의 테크놀로지 그림을 그리는 뒷모습, 늘어가는 공책, 바뀌는 계절. 후지
gall.dcinside.com
이번에는 그들이 있던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룩백에서는 공간 자체의 만화적(서사적) 활용도 훌륭하지만 그 공간이 가지는 의미 또한 뜻 깊다. 둘은 학교라는 계기를 갖고 있음에도 학교에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후지노가 쿄모토의 방 앞까지 갔음에도 집 밖에서 만난다. 후지노는 쿄모토가 죽고나서야 그녀의 방에 들어가 본다.
공간을 디자인하는 사람들은 공간이 특정한 방향성, 목적을 추구하는 기계가 되도록한다. 마치 방직기를 돌리면 실이 천이 되는 것처럼 특정한 공간이 특정한 효과를 발생시키는 기계장치로서 작동하도록. 하지만 기계장치로서의 공간은 불가능하다. 엽총이 둔기가 되기도 하듯이 공간은 그 공간을 활용하는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결국 공간은 인간의 의지와 결합함으로써 작동한다. 공간 속의 인간이 공간을 규정한다.
근대라는 말이 특정한 시기, 대충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전하는 시기를 의미하는 단어라고 볼 때 근대는 아직도 그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물로 이런 의미가 아니더라도 근대는(따라서 근대성은)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후지노와 쿄모토도 그러한 근대성의 공간 위에 서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의지가 있다. 그것을 어떨게 표현해야할까?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곳에 만화가 있었다.
메가박스에서 단독으로 개봉했으니까 봐주라. 1시간 짜리 영화에 12000원 태우는 거 아까울 수 있는데 5~6000원 자리 만화책 2권 읽는다고 생각하면 나름 괜찮을지도?
1. 학교
학교는 병원, 군대와 더불어 근대국가의 가장 핵심적인 통치 수단이자 관리 대상이다. 인격은 생명, 폭력과 더불어 근대국가가 손에 쥐고 있어야할 가장 중요한 수단인 것이다.
학교에서 사람은 근대적 인간으로서의 자기형성을 거친다. 근대적 인간이란 말 그대로 생산적인 인간이다. 시간을 준수하고, 근면하고, 성실하며, 성과를 창출하는 기계장치의 부품과도 같은 인간. 근대문명과 전근대문명이 접촉했을때 나오는 흔한 레파토리가 있지 않은가? 게으르다느니, 시간을 안지킨다느니.
따라서 학교에서는 딱 2가지의 가치만이 인정된다. 그것은 노력과 재능이다. 노력은 말 그대로 근대적 인간의 표상이다. 재능은 두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하나는 보다 훌륭한 근대적 인간이 될 가능서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적 인간의 유일한 예외를 구성하는 예술가다. 후지노와 쿄모토는 예술가로서 근대적 공간인 학교를 거부한다.
쿄모토는 아주 대놓고 학교에 나오지 않지만 후지노는 꽤나 고민한다. 그 이유는 좀 아이러니 하게도 코모토의 그림에 벽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후지노의 '만화'의 재능을 쿄모토가 인정하므로써 후지노는 근대적 공간인 학교를 거부한다. 학교 친구들과는 소원해지고 학교에서도 그림만 그린다. 그 이후로 후지노가 학교에 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근대적 체제의 무서운 점은 그 확장성에 있다. 근대적 체제의 대표주자인 자본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를 보라. 이들은 자신의 시스템은 외부에 이식한다. 근대적 체제의 핵심으로 볼 수 있는 관료제도 그러하다. 어느새 근대 교육은 예술의 범위에도 미친다. 근대성은 자신의 예외마저도 포섭한다.
쿄모토는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어서 대학교에 간다. 등교를 거부한 쿄모토가 자신의 끔과 재능을 좇아 다시 학교로 가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그곳에서 죽는 것도 참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쿄모토의 죽음은 근대성이 지배하는 지금의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는 자의 비극은 아니었을까? 후지노는 그곳에 녹아들 수 있음에도 거부했다면, 쿄모토는 단지 그곳에 섞일 수 없는 이물질이었기 때문에 예술을 택해야만 했던건 아닐까? 쿄모토에게 그림은 집에서 할게 없어서 시작한 것이기도 했다.
2. 방
후지노가 쿄모토를 만나기 전에 그녀의 방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언니로 못 들어오게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후지노를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 친구들도 만화를 재밌게 봤지만 중학교에 들어갈 즘에는 만화를 졸업하라고 한다. 후지노의 누나도 언제까지 만화나 그릴거냐고 타박한다.
방은 타인을 거부할 수 있을 정도로 사적인 공간이다. 후지노의 책장은 만화로 채워져 있지만 빈 공간도 있다. 그림공부를 하고자 했을 땐 그림 잘 그리는 법으로 채워졌고, 그림을 그만두고는 전부 비웠다. 후지노의 방은(후에는 작업실까지 포함해서) 후지노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는 쿄모토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진정으로 그녀의 재능을 인정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방에서 후지노가 보여주는 뒷모습은 그녀가 스스로와 관계 맺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녀는 만화가가 되고자했고 만화가가 되었다. 그녀의 방에 앉을 자리가 있는 것은 사람 후지노가 아니라 만화가 후지노를 긍정 할 수 있는 사람이다.
3. 세계
학교와 방이 갖는 중요성에 불구하고 변화는 그곳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언제나 불확실성과 불안은 세계에 대한 감정이었고 실존적 감상이었다.
졸업증서를 가져다 주라는 선생님의 부탁에(등교거부자가 왜 졸업이 되는지는 제처두고) 후지노는 쿄모토의 집에 갔고, 충동적으로 그 앞에가서 만화까지 그렸다. 후술하겠지만 쿄모토의 공간에 후지노의 만화가 침투하므로써 쿄모토는 세계를 향해 나갈 계기가 생겼다. 그리고 그 계기에 보답하듯 쿄모토의 집 앞,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거리에서 후지노는 쿄모토와 만나고 자신의 만화를 인정받았다. 그 순간 후지노의 세계는 감상에 젖어있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처럼 강렬한 감상에.
정의해보자면 세계란 정복하지 못한 불가해한 공간의 총칭인지도 모른다. 전체를 파악할 수 없으므로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히키코모리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다시 만화그리기를 시작하기도 한다. 누군가와 만나기도하고, 헤어지기도 한다. 세계 속에서 후지노와 쿄모토는 단지 그림으로밖에 알지 못했던 서로를 알게되었다. 그리고 함께 만화를 그리는 즐거움을 알게되었다.
물론 세계는 좋은 방향으로만 가진 않는다. 당연히 후지노가 바라는 데로만 가지도 않는다. 우리는 세계가 불가분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망각하고자한다. 우리는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걸 구분할 수 있다고하는 환상이 구분을 유지하는지도 모른다. 후지노는 언제까지고 쿄모토와 함께 만화를 그릴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지노가 알지못했던 쿄모토는 그림공부가 하고싶었고 그녀를 떠났다. 후지노는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다는 쿄모토를 잡을 수 없었다. 만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해준 쿄모토를 어떻게 잡을까?
4. 만화
마지막에 나온 쿄모토의 4컷만화, 영화에서는 '룩 백', 정발본에서는 '등 뒤를 봐'로 번역된 제목이 붙은 만화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 전에 쿄모토에게 만화란 무엇인가? '룩 백'이 나오기 전까지 쿄모토가 그린 만화는 나오지 않는다. 쿄모토는 후지노의 만화를 좋아하지만 만화를 그리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림은 잘 그렸지만, 어시 정도? '룩 백' 나오므로써 쿄모토에게도 만화가 존재함이 밝혀진다. 만화란 무엇인가?
후지노가, 타츠키가 보여주는 만화는 대안적 삶과 그것이 펼쳐지는 공간으로서 제시된다. 후지노가 그린 만화는 주로 어릴 때 그린 것만 보여준다. 초딩답다고나 할까 좀 유치한, 하지만 기발한, 우리의 삶의 이야기에 살짝의 뒤틀림을 준 이야기였다. 후지노의 만화가 갖는 4컷의 공간은 일상적인 삶의 한 부분을 뒤트는 기계장치로서 작동한다. 만화의 독자가 그것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므로써 만화적 공간은 그 설계이념을 실현한다. 후지노의 만화에 품빠진 쿄모토에게 그렇다.
후반부, 만약 둘이 만나지 않았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평행세계는 실제가 아니라 쿄모토의 만화 속 세계다. 쿄모토는 대안적 후지노 선생님을 창작하므로써 만화란느 대안공간을 창조한다. 쿄모토의 방 앞에서 쿄모토와의 만남을 후회하던 후지노에게 이 만화가 다가온 것은 왜 일까? 만화가 보여주는 뒤틀림이 있듯이 만화를 통해 알아온 즐거움이 있었다. 그런 즐거움을 알려주고 함께 나눈 후지노가 감히 만화를 그리는 것을 후회하는 걸 쿄모토는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후지노는 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나?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만화는 후회에 대한 쿄모토의 꾸짖음으로 다가 후지노에게 이유를 알려줬다. 왜 만화를 그렸는지.
5. 쿄모토의 방
후지노는 계속해서 뒷모습을 보여줬다. 책상에 앉아 고민하고 시도하는 만화가가 되는 과정을 그 뒷모습으로서 보여줬다. 그리고 쿄모토의 방 앞에서 자신의 삶을, 쿄모토와의 추억을 되돌아보며 다시 일어섰다. 후지노는 깨달았다. 단지 살아 숨쉬어야만 함께하는 게 아님을. 그들의 삶은 만화 속에 깊이 새겨져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후지노는 창문에 '룩 백'을 붙이고 벽에 사인해준 쿄모토의 옷을 걸어둔다. 후지노는 쿄모토의 방에 있는 듯했다. 쿄모토가 죽은 이상 후지노에게 남은 것은 기억 속 쿄모토와 만화 속 쿄모토 뿐이다. 쿄모토와의 첫만남과 만화는 둘이 여전히 함께함을 보여준다. 후지노 쿄는 여전히 만화를 그린다.
대회 주제가 백합이니만큼 마지막으로 쿄모토와 후지노의 관계를 되돌아보자. 서로는 그림으로만 알았다. 쿄모토는 후지노를 보고자 세계로 나왔다. 후지노는 쿄모토와 함께 만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쿄모토는 그럼에도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어서 떠났다. 후지노에게 쿄모토의 죽음은 다시 일어서기 힘든 충격이었다. 하지만 후지노는 쿄모토의 만화로 일어설 수 있었다. 쿄모토의 만화 속 후지노는 히어로 같은 존재였다. 서로는 서로에게 너무나도 큰 존재였다. 일어설 수 없게 만들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도 했다. 우린 이걸 사랑이라고도 우정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에 이름 붙이고 싶지 않다. 후지노와 쿄모토의 관계는 그들의 관계지 다른 무언가가 아니므로, 다른 무언가를 표현 할 수 있은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다. 쿄모토가 없는 후지노는 어떤 만화를 그릴까? 그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만화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단지 시간이 지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 후지노는 쿄모토가 남긴 만화를 딛고 서야한다. 마음으로는 참으로 둘이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룩 백 메가박스에서 단독 상영중! 많은 관심 오네가이시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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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영화 봤는데 몰입도 좋더라. 보면서 계속 드는 생각은 대구빡 좀 들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