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신발을 신은 문학(土足のままの文学)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에리히 케스트너의 「파비앙」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파비앙」은 제 1차대전 후의 혼란과 유폐와 퇴폐와 무기력과 불안 속에서 꿈틀거리는 독일의 한 청년을 관습 파괴적인 새로운 스타일로 그린 작품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전후 일본의 문학이 향해야 할 방향 하나를 보았다고 느꼈다.
종전 후 소위 대작가라는 분들도 자기 작품은 모른 체 하고서 그럴싸한 문학론을 적어놓았지만 그런 대다수의 문학론들 보다 이 「파비앙」 한 권이 앞으로의 문학이 가야 할 길을 더욱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파비앙」을 읽은 다음엔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었다. 나는 새로운 문학이 가야 할 길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우리들의 야망은 우리들의 「파비앙」을 만들고, 우리들의 「율리시스」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납득했다.
일본의 관습으로는 신발을 신은 채 집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문학도 신발을 신은 채 인생 안으로 밟고 들어가는 작품이 없다. 제대로 신발을 벗고 문단진보당의 대변자인 비평가들에게 키를 받아 신발함에 넣고 나서 들어온 듯한 작품들 뿐이다.
「파비앙」이나 「율리시스」는 신발을 신은 채 들어온 문학이다. 나는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가는 수준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카운터에서 신발을 벗어달라고 하면, 저는 처음부터 맨발로 걸어와서요…… 정도는 말하는 듯한 작품을 쓰고 싶다.
나는 지금부터는 말썽꾸러기가 되어서 신인이 아무리 정교한 작품을 쓰더라도 감탄하지 않기로 하겠다. 앞으로는 진흙이 잔뜩 묻은 신발이나 헤진 구두를 신은 채 마구 써 내려간 소설이 아니면 감탄하지 않는다. 신발을 잘 정리하고서 서재 안에 똑바로 정좌를 하고 책상 근처 정리도 깔끔하게 한 후에 쓴 듯한 작품에, 무슨 매력이 있으랴.
지금까지 일본의 문학은 하이쿠류의 자연 묘사와 탄카(短歌)류의 정서 서술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깐, 모노노아와레(일본의 고전적인 무상하고 쓸쓸한 미의식)다.
「파비앙」이나 「율리시스」는 모노노아와레가 아니다. 모노노아와레에 대한 노스탤지어, 그러니깐 심경소설로써의 사소설(私小說)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혀있는 한 문단진보당이라는 잡초나 번성할 뿐이다. 자기들의 문학운동에다 「민주주의」라는 말만 씌울 수 있으면 만족하는 듯한 문단사회당이나 문단공산당의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문단진보당의 기성 스타일을 부숴버릴 만한 새로운 스타일을 낳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문단진보당이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할만한 신선함을 말이 아닌 문학 작품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결국 문학운동의 이름을 빌린 정치운동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신발을 신은 채라고 말은 했지만 이게 기존 것은 뭐든지 다 부수거나 과하게 도를 지나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를 들자면 몽테뉴가 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기 위해 스스로의 내부로 들어갔을 때,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갔지만 발소리는 아주 조용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잊어먹고 있었던 「인간」을 우리들의 문학 안으로 다시 불러오기 위해 먼저 몽테뉴 즈음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문학의 발소리가 조금 거칠고 난폭하게 울리더라도 어쩔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정도는 지금 여기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初出:「文学雑誌」 1947年1月
底本:「定本織田作之助全集 第八巻」 文泉党出版 1976年4月25日
무뢰파에 다자이 오사무만 유명하고 같이놀던 친구중에 사카구치 안고나 오다 사쿠노스케는 독자층에 잘 알려지지 않은거같아서 번역해봄
브르통의 초현실주의선언처럼 미래 지향적인 선언문에 가까운 글인데 이거 쓰고 얼마뒤에 오다 사쿠노스케가 죽어버림
오다 사쿠노스케는 신발신고 집에 들어가겠다 정도인데 사카구치 안고는 집에 들어가서 방에 똥쌈 글들이 ㄹㅈㄷ임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