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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감명 깊게 읽은 <채식주의자>에 대한 단상입니다. 어둑해진 메타세쿼이아 길의 나무들이 무섭게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든 생각입니다.


1. 서

작품에서 이분법적으로 상징을 배치한다. 채식·약자·피해자를 한 편에 두고, 육식·강자·가해자를 다른 한 편에 둔다. 육식과 폭력의 인과관계를 상직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채식의 정당화와 선과 악의 구도를 구체화한다. 이러한 구도는 구체적으로 강자의 약자를 향한 폭력으로, 그 폭력이 다시 광기에 대한 정당화로 이어진다. 나는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가 싫다. 이분법적 구도는 멋없는 정당화를 낳는다. 이에 작품에 내재한 비겁한 정당화를 살펴보고, 비폭력적 폭력 -정신적 폭력-을 들춰내면서 채식주의자 속 은폐된 폭력을 바탕으로 이분법적 구도를 무너뜨려보고자 한다.



2. 존재의 정당화와 존재의 드러냄


나는 작품에서 채식을 단순히 드러낸다기보다는 채식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느꼈다. 채식과 육식의 공존보다는 육식의 폭력성과 악마화를 바탕으로 채식을 정당화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군인 출신의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가녀린 딸의 구도 속에서 폭력, 육식, 채식의 관계를 묘사하는 부분은 너무 의도가 투명해 보기에 불편했다. 작품이 단순히 하나의 구체적 사건을 그린다고만 생각한다면 이러한 불편함은 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은 단지 구체적 사건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거기서 일반적인 법칙을 도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에 그 묘사가 일으키는 거북함은 피할 수 없었다. 서로 공존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정당화하고 나의 존재 이유를 설파하여 납득시키는 것으로 부터 비롯되지 않는다. 서로 공존하는 것은 그냥 긍정하는 것 뿐이다. 드러내는 존재에 대한 수긍 뿐이다. 나를 위해 다른 상대편을 들먹여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이러한 이분법적인 정당화는 매혹적이다. 감정에 호소할 수 있고, 논리 자체가 직관적이다.)



3. 비폭력적 폭력


작품에서 육식과 폭력은 긴밀하게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긴밀한 연결은 우리 현실 속 실제적 인과관계의 강한 뒷받침을 받는다. 육식을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다. 가령 이케지메, 신케지메와 같은 보다 인도적 방법조차도 여전히 폭력이라는 측면에서 육식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현실 속 끊어낼 수 없는 도식이 작품 속 상징화에 의심하기 어려운 은폐를 드리운다. 그렇게 “육식은 폭력적이다.”라는 명제는 하나의 일반법칙화 되어 있다. 이것이 이분법과 어우러져 채식은 폭력의 저 편에 놓인다.


히키코모리를 생각해보자. 방 문을 꼭 닫고 나오지 않는 자녀가 있다. 그 자녀 곁에는 부모가 있다. 부모는 자녀에게 묻는다. 왜 그런건지. 자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부모는 화도 내보고, 타일러보고, 협박을 하는 등 모든 수단을 써 가며 원인을 알고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세간에서는 그런다. 기다려 달라고. 자녀가 그 알을 깨고 나올 때 까지 기다리라고.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은 문드러진다.


부모의 화와 협박은 폭력이 되고 가해가 된다. 그 반대편에 있는 자녀의 무응답은 약자로, 피해자로 남아 폭력의 저 편에 놓인다. 그러나 가시적 폭력이 은폐한 비폭력적 폭력은 문드러진 마음으로, 마치 폭력적이지 않은 것 같은 형태로 남아있다. 이와 같이 작품 속 영혜의 채식과 폭력의 인과관계는 육식과 폭력의 물리적 인과관계에 가려져 은폐된 채로 녹아있다. 영혜의 부작위가 야기한 그녀의 어머니의 마음의 문드러짐은 폭력의 결과가 아니면 뭘까. 그녀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도 그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이 곳에서 존재들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4.결


채식주의자도, 다처먹주의자도 무방비한 상태로 드러나 있다. 누구나 폭력을 사용하고, 누구나 폭력에 맞선다. 그 폭력이 한 존재만의 정당화의 도구로 이용되기에는 우리는 모두 똑같다. 이분법은 허상이다. 얼마 전 박상영 작가의 책도 읽어봤다. 거기에도 비슷한 정당화가 내재되어 있다. 이성애를 싫어하는 동성애자로 말이다. 사랑을 위해 투쟁하는 자들을 사랑의 정반대에 있는 미움으로 정당화하려는 모습이 여간 달갑지 않게 느껴진다. 이것이 요새 트렌드인가. 내가 꼰대인건가. 그냥 당신이 존재를 가감없이 드러낸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당신의 존재를 긍정하겠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귀찮게 왜곡된 정당화를 할 필요없이. 너와 나를 나눌 필요없이.



추신,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가 자기 자신을 잘 드러낸 책이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