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장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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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특히 도입부가 가진 설화적 특징이 한번 더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에겐 추방자의 슬픔보다는,
여전한 신과의 연대 속에서 실제 경기를 시작한 선수의 설렘만이 느껴집니다.
목축을 주업으로 하는 민족과 농경을 주업으로 하는 민족의 갈등과 투쟁을 보여주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역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자연스럽고 함축적입니다.
문명 초기, 인접한 지역에서 목축과 농경을 하는 무리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역시 이때까지만 해도, 두 민족은 같은 신을 섬겼고, 일상 속에서 선하지 않은 마음을 품을 때
여호와는 즉시 나타나 경고하고 타이를 정도로 인간 곁에 가까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 중 한 명의 제사만 받았다는 이야기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수확물의 일부를 드렸을 뿐인 가인이 아닌, 양의 '생명'을 드린 아벨의 제물만 받았다는 이야기로
어쩌면 저자는 이미 자신의 민족에게 일반화된 '번제'라는 예배와 숭배 방식의
역사성과 정당성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아가 아무리 빨라도 기원전이었던 시기,
농업용수 확보를 위한 대규모의 관개사업도 불가능했을 중동 지역에서의 농업은
100% 날씨와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흉년과 농사 실패는 흔한 일이었을 것이고요.
그들이 기후의 영향을 덜 받는 이웃의 목축 민족을 보며
자신들은 신에게 외면당했다는 불만을 가졌던 것도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두 민족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이었겠죠.
또 흥미로운 부분은 '악'에 대한 저자의 정의입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타자에 대한 분노와 살의라는 악을,
저자는 그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집 밖의 맹수처럼 외부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악마와 악, 재난과 고통 등 인간에게 불쾌한 모든 것이 외부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생각.
선과 악을 둘로 나누는 이분법적이고 투쟁적인 세계관.
하와가 선악과를 먹게 된 이유도 하와의 마음에 이미 존재했던 욕망과 호기심이 아닌 외부의 뱀에게 책임을 돌리는 사고 방식.
이런 사고 방식은 유일신교의 공통된 관념이며, 전세계의 종교 중 유일신교는 극소수입니다.
신의 전지전능함이라는 전제 위에서 발전하는 종교의 특성 상,
그런 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독립적 실체의 악이란 초기의 종교 창시자나 신자들에겐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모순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악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이 모순을, 힌두교는 악을 죽음과 소멸 등의 개념과 연결해 선의 반대 항이 아니라
세상을 유지시키고 이어지게 하는 순환의 한 과정으로 설명했고,
불교는 악이 외부가 아닌 인간의 내면에서 비롯된다는 일원론적 해답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유대교로 이어져 기독교와 이슬람에서 다시-가톨릭과 개신교로 이어지는 이 특이한 종교는
악의 핵심이 인간 외부에 존재한다는 까다로운 입장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악의 타자화. 농경이 여의치 않은 메마른 환경 속에서,
다신교 기반의 종교를 가진 수많은 민족에 둘러 쌓여 살아야 했던 유대 민족의 역사에서 비롯된 특성일까요?
지금 이 시간에도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포탄을 퍼붓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구약 성서를 읽는 재미 중 하나는, 이 자체 모순적인 선악관의 정당화와 변천사입니다.
임의적인 신의 사랑으로 위태로워 지는 자신의 생존을 비웃듯,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형제 혹은 이웃 민족.
갈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고 가인은 아벨을 죽입니다.
그 순간 동생이 아닌 애완동물을 실수로 죽게 한 자녀에게 하듯 죄를 짓기 전보다 더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고 심지어 안전까지 보장하는 여호와의 모습도 여러 생각을 하게 합니다.
16절 부터 시작되는 가인의 족보 속 다양한 이민족,
즉 분명 아담의 전통인 셋의 후손들과는 다른 생활방식과 신앙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번성하는 그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설명이었을까요?
가인의 후손도 족보를 남기며 번성합니다.
그 중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같은 통절한 고백 뒤에 오는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는 뻔뻔함이 무섭고 두렵습니다.
가인의 후손인 두발가인이 구리와 쇠로 만들었다는 도구 중에는 분명 살육과 전쟁의 도구로 쓰인 무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 아벨의 사망 후 아담은 삼남 셋을 낳았습니다.
지금까지 아담의 가계도에서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셋도 어느새 베필을 얻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셋의 아들 '에노스'가 태어난 순간에도 이미 '사람들'이라 표현할 정도로 많은 여호와를 따르는 민족들이 존재했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창세기가 묘사하는 최초 사회의 모습엔 여러모로 많은 의문점이 있죠. 적어도 저자의 의식 속에선 좀 더 구멍이 적었을 텐데, 그걸 적어놓지 않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