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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기의 마지막
당신은 <국도의 아이들>을 읽으며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
내가 느낀 바를 서술하자면,
먼저, 작품 전체적으로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대화 부분에서는 다소의 위화감을, 마지막 장면에서는 당혹감을 느꼈다.
아마 대다수의 의견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이제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는 왜 이 작품을 읽으며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꼈을까?
가장 일차적으로는, 이 작품이 어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로 내려와!"
"우선 올라와 봐!"
"너희들이 우리들을 아래로 내던지도록 말이지, 그럴 생각은 없는걸, 아직 그 정도 분별은 있지."
"너희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비겁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오기만 해, 오란 말이야!"
"정말? 너희들이? 바로 너희들이 우리들을 아래로 내던지겠다고? 너희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우리들은 공격했고, 가슴을 얻어맞고, 떨어지면서 자진해서 길섶 도랑의 잔디 속에 몸을 뉘었다.
모든 게 한결같이 따뜻해졌다.
<국도의 아이들> 중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직접적인 제시 말고도 다양한 표현 방법을 이용해 향수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도 특히나 두드러지는 표현 방법은 '대비'이다.
대비란 무엇인가?
문학에서 쓰이는 대비의 사전적 정의는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을 나란히 놓았을 때, 그 차이가 현저하게 드러나는 현상.'이다.
(네이버 표준국어대사전 참고함)
우리는 먼저 작품 제목에서 대비를 찾을 수 있다.
'국도'와 '아이들'은 서로 대비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벌써 꽤 높은 곳에 떠 있는 달을 보았고,
우편 마차 한 대가 그 달빛을 받으며 달려 지나갔다.
대개는 약한 바람이 일었는데, 도랑 속에서도 그것이 느껴졌다.
<국도의 아이들> 중
국도는 끊임없이 마차와 사람이 지나다니는 곳, 즉 변화하며 미래로 향하는 공간인 반면,
아이들은 카프카의 유년기를 뜻한다고 볼 수 있고,
알다시피 유년기는 '도랑'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나타나듯 변하지 않고 고여있는 과거이다.
이 대비를 바탕으로 작품을 다시 읽어보면,
작품 초반의 '마차 소리'와 후반부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또한
앞서 말한 대비를 심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 초반부 화자는 국도 위 마차의 소리를 듣고 짜증을 내지만,
아이들이 부르는 유치한 유행가는 짜증도 내지 않고, 직접 따라 부르기까지 한다.
나는 마차들이 정원 울타리 옆을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가끔 그것들이 보이기도 했다.
그 무더운 여름날, 수레바퀴와 끌채의 나무가 얼마나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었던지!
(중략)
우리 중 하나가 유치한 유행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우리는 기차가 달리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노래를 불렀고, 목소리로는 충분치가 않아서 팔을 흔들어댔다.
<국도의 아이들> 중
이 대비에 입각하여 작품 말미의 친구들에게서 벗어나 다른 마을로 달려가는 장면을 읽으면,
<국도의 아이들>은 유년기의 추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하고 해석을 마무리 짓기에는 아직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앞서 우리가 포착했던, 대화 장면의 위화감은 무엇인가?
왜 화자는 끊임없이 피로에 휩싸여 있는가?
말미에 화자가 친구들을 뒤로 하고 향한 남쪽 마을은 왜 '피곤하지도 않은 바보들'로 가득 차 있는가?
이 문제들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작품 속 화자를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 카프카적 주체
멜랑꼴리 by 에드바르 뭉크
꿈의 문학은 필연적으로 주체를 낳는다.
꿈은 내가 겪는 하나의 체험이므로, 타인에게 자신의 꿈을 보여줄 때 주체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탄생한 카프카적 주체는,
카프카의 자아가 투영되는 거울임과 동시에 소설 속 하나의 캐릭터이기도 한, 양가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카프카적 주체는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카프카의 정신 상태와 소설 속 상황에 따라 변하는, 가변적인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카프카가 가지고 있던 어느정도 일관적인 사고회로를 바탕으로,
카프카적 주체의 몇 가지 보편적인 속성을 알아볼 수 있다.
1. 거리감
누군가 창문턱을 넘어와서, 다른 아이들이 벌써, 집 앞에 와 있다고 전하면
나는 물론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킨다.
"그래서는 안 돼, 너는 왜 그렇게 한숨을 쉬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니?
다신 회복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불행이니? 우리는 정말 그것에서 회복될 수 없겠니?
정말 모든 것이 다 망쳐진 거니?"
망쳐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집 앞으로 달려갔다.
"천만다행이군, 드디어 너희들이 오다니!"
"넌 언제나 너무 늦는구나!"
"어째서 나야?"
"바로 너 말아, 함께 가기 싫으면 집에 있어."
"양해를 구하지는 않겠어!"
"뭐라고? 양해를 구하지는 않겠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
<국도의 아이들> 중
화자의 한숨 한 번에 광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누군가'
'양해를 구하지는 않겠다'는 (화자의 의도상) 타인을 위한 말을,
자만감의 표출로 보고 지탄하는 아이들 중 하나.
이 모든 것들은 분명 묘한 거리감이 타인과 카프카적 주체 사이에 존재한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유년기의 카프카는 주위와 일정한 거리감을 둔 채 살았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그를 매우 좋아했고 또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한 번도 제대로 친한 적은 없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얇은 유리벽 같은 것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는 조용하고 상냥하며 관심 있는 미소로써 자기 자신을 세계에 열어보였지만,
동시에 세계 앞에 자신을 폐쇄시켰습니다.
카프카의 김나지움 급우였던 에밀 우티츠의 기억 중, AK 50f
2. 고독의 불안
그러고는 새들이 마치 튕기듯이 날아올랐다.
나는 눈으로 새들을 좇아, 그들이 단숨에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나에게는 그들이 날아오른 것이 아니라, 내가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촛불 아래서 나는 저녁을 먹었다.
이따금 나는 양팔을 나무 식탁 위에 올려놓았고, 벌써 피로해진 채 버터 빵을 씹었다.
<국도의 아이들> 중
세계는 내가 있든 없든 큰 차이 없이, 착실히 나아가리라는 사실.
그렇기에 가만히 있음에도 서서히 추락해간다는 느낌, 카프카적 주체는 이처럼 고독에서 불안을 느낀다.
3. 소속의 자아 소실
극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리감에도
고독의 불안을 해소하고자, 카프카적 주체는 소속되고자 노력한다.
우리들은 공격했고, 가슴을 얻어맞고,
떨어지면서 자진해서 길섶 도랑의 잔디 속에 몸을 뉘었다.
모든 게 한결같이 따뜻해졌다.
우리들은 따스함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잔디의 냉기를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피로해졌을 뿐이었다.
(중략)
우리는 기차가 달리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노래를 불렀고,
목소리로는 충분치가 않아서 팔을 흔들어댔다.
우리들은 군중 속에 끼어든 것처럼 우리의 목소리로 서로 밀쳐대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 속에 섞이게 되면,
마치 낚싯바늘에 걸린 것만 같았다.
<국도의 아이들> 중
그러나 '자신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 속에 섞이'며,
단체의 일원으로써 자신을 잃고 동질화되어가는 것을 느낄 때,
카프카적 주체는 '마치 낚싯바늘에 걸린 것만 같'은 역겨움을 느낀다.
4. 관찰이라는 이름의 투쟁
개인으로써 고독한 삶을 영위할 것인가, 단체의 일원으로써 자신을 잃고 동질화될 것인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카프카적 주체는 둘 중 어느 것도 택하지 않는다.
자신을 유지하면서도, 어딘가에 소속되기 위해서,
그는 이방인으로써 관찰한다.
벌써 시간이 되었다.
나는 옆에 서 있는 아이에게 입을 맞추고,
그 옆의 다른 세 명에게는 그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첫 번째 네거리에서
나는 구부러져서 들길을 달려 다시 숲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남쪽 도시를 향해 힘껏 달렸다.
우리 마을에서는 이 도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각 좀 해봐!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잠을 자지 않는대!"
"그건 또 왜?"
"그들은 피곤해지지 않으니까."
"그건 또 왜 그렇지?"
"그들은 바보니까."
"바보들은 피곤해지지도 않는다고?"
"바보들이 어떻게 피곤해질 수 있겠니?"
<국도의 아이들> 중
그는 그렇기에 내면적 세계에선 여전히 유년기의 모습을 간직한 채로,
피곤해지지도 못하는, 실존적 고통 따위는 느끼지도 못하는 바보들이 가득한 도시를 향해 달려나간다.
이 짧은 단편 하나에, 카프카는 자신의 실존과 고통, 그리고 앞으로의 예고까지 착실히 담아 두었다.
- 첨언
다음 글은 어떻게 될 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관찰>이라는 단편집이 생각보다 굉장히 난해하고 까다로워서, 이해하기 힘들고
하나의 통일된 비평문으로 해설하기가 까다롭네요...
특정 테마별로 연결해서 다룰까 싶기도 하고
특히나 신기한 건, 분명 아예 다른 내용의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느슨하게 연결되는 느낌을 받는다는 겁니다.
예시를 들자면 아까 보셨듯이 <국도의 아이들> 마지막에 남쪽 도시 피곤해지지도 않는 바보들이 있다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다음 작품 <사기꾼의 가면을 벗기다>에서 언급되는 이 도시의 사람들은 피곤하지도 않고 끊임없이 사람을 따라다니는 그런 존재거든요.
소녀란 대상이 중반 이후에 갑자기 연속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말이죠.
개별적인 글도 번역의 한계인지, 작가의 특성인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 글에서 다룬 <국도의 아이들>은 매우 친절한 편에 속하죠.
뭐 그래도 언젠가 방향이 잡히겠죠, 일단 단편집을 계속해서 읽어보고 있습니다.
인용한 책들)
솔 출판사 <변신>(저 카프카, 역 이주동)
<카프카 평전>(저 이주동)
잘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