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장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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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성경 읽기의 가장 큰 방해물이 되는 '족보' 대목이 다시 등장합니다.
우선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이름과 출산의 반복, 500세 때론 900세를 넘는 인물의 나이,
아담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족보 속에 흐른 시간을 계산하면
6,000년 남짓한 시간이 된다는 점 등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은 독자의 고갤 갸웃거리게 하죠.
이후로도 반복적으로 언급할 주제이긴 하지만
창세기의 저자는 이 기록을 읽을 후대가 가질 의구심을 예상하지 못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절대자의 핵심적인 능력이고,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도 신과 같은 이성과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고
때론 다스릴 능력을 가진 존재임을 깨우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런 허구적 기록을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손톱을 깎고 제대로 치우지 않으면 쥐가 손톱을 먹고 사람이 된다'라는 오래된 거짓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는 이 부모의 잔소리가 새빨간 거짓말임을 깨우친 순간 큰 배신감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삶을 살다보면 저 허구의 필요성과 맥락을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 깎은 후 치우지 않는 손발톱 조각을 밟거나 뾰족한 절단면에 발을 찔리게 되는 순간.
의학과 항생제가 발전하지 않았던 보다 옛날엔 당연히 저 가벼워보이는 상처가
심각한 감염으로 악화되는 일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작 손발톱 조각 하나 때문에.
'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준다' 라거나, '우리 아들(딸)이 세상에서 가장 잘 생겼(예쁘)다',
한민족은 단군의 후손이며, 세상을 떠난 할머니는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며,
인간의 삶엔 적어도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 이야기 역시 비슷한 맥락입니다.
얼핏 거짓으로 보이는 전설과 설화와 이야기 속에 숨은 더 깊고 방대한 진실.
성행위의 진상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엔 아직 어린 아이들,
적어도 가정 안에선 조건 없는 사랑을 흠뻑 받아야 할 어린 자녀들,
사분오열 할 수 밖에 없는 국가 구성원들을 느슨하게나마 묶을 수 있는 허구의 벨트,
할머니의 죽음을 극복하고 그 분의 사랑을 되도록 오래 기억하려는 마음,
시련의 순간에 삶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을 막으려는 선의.
이런 허구적 진실은 신화와 문학(특히 소설), 가정과 국가 등 다양한 공동체 안에서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간을 개체적, 시대적 미성숙으로부터 당분간 보호하며 때론 불쾌하고 버거운 '객관적 사실' 대신
더 깊은 차원의 '주관적 진실'을 이해하게 하려는 사려깊음이 그 안에 들어있있습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 속 흑인 노예 톰은 허구적 인물일 뿐이지만,
쓴 약의 겉을 싼 당의정처럼 드라마틱한 허구의 껍질에 쌓여 당대 미국인의 정신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 결과 노예 해방이라는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허구를 통해 백인들도 '흑인 역시 백인과 똑같은 영혼과 정신을 가진 인간이다' 라는,
당시로선 도발적이고 상식 밖이었을 진실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런 맥락에서 창세기의 저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신-아담-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 요셉-이스라엘 민족의 확고한 연결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이스라엘 민족은 현재 중동에서 다신교를 신봉하는 훨씬 많고 강대한 민족에 둘러쌓인 상황이지만,
동시에 유일하게 신의 선택을 받았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 명맥을 잃지 않고 생존해 온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다"
게다가 지금 저자는 약간 조바심이 난 상태입니다.
이 족보 부분을 마무리해야 '대홍수 설화' 라는 당대에든,
전세계의 주요 신화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인류 공통의 '허구적 진실'을 담은 이야길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기댈 곳이 완벽할 필요는 없죠 여기 영원히 있으라 요구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