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6장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
민족과 대륙을 초월해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거인과 대홍수에 대한 설화가 이어집니다.
'네피림'이란 흥미로운 고유명사는 안타깝게도 정전으로 인정받은 성서에선 이곳과 민수가 13장에만 등장합니다.
대신 '거인'이란 단어는 사무엘하 21장에도 등장합니다. 생소한 단어의 의미는 사용된 맥락으로 추론할 수 있으며
민수기와 사무엘하의 맥락은 모두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과의 싸움을 앞두고 두려움을 느끼는 적 중
네피림의 후손과 거인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다윗의 화려한 데뷔를 위한 희생양이 된 블레셋의 골리앗 역시 비슷한 두려움을 주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정전 성서와 비슷한 역사와 영향력을 가졌지만 기원 후 400년 경 가톨릭 사제들의 기준엔 미치지 못했던 '외경'에 대해
개인적으로 호기심을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직접 읽어본 외경의 내용은 경전이라기 보단 일종의 민담집에 가까웠습니다.
특히 '네피림'에 대해 꽤 자세한 서술을 해놓은 '에녹서', 그 동화적 상상력 가득한 외경에선 네피림의 키를 3,000m라고 써놓았습니다.
어지간한 산보다 훨씬 높은 신장을 가진 거인이 하늘의 한쪽을 가릴만한 스케일의 덩치로 움직이는 광경은
상상하는 것 만으로 즐거운 일이긴 합니다.
네피림 혹은 거인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호모 사피엔스의 20만 년 역사 중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현대 인류에게도 유전된 거인병.
고대엔 당연히 더 눈에 띄었을 큰 덩치, 거인병에 뒤따르는 의학적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을 고대엔
젊은 나이의 요절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운명.
군사적 심볼로도, 짧은 생애를 예감한 개인 입장에서도 필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기엔 아쉬운 특성이었을 것입니다.
1만 5천년 전 무렵 지구의 해수면을 수십 미터나 높인 마지막 해빙기의 경험 역시 인류 전체가 기억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창세기의 저자가 추론하는 좀 더 과거의 세상도 지금 우리가 보는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도처에 악이 가득하고, '용사'로 유명해진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전쟁과 잔혹함도 넘쳐 납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마도 유일신 신앙을 고수하는- 이들도 사람의 딸들 -중동 지역에서 대세를 차지한 다신교 민족- 과 섞여 살아가고 있고,
대규모의 농경이 거의 불가능한 척박한 사막 기후에서 신의 뜻과 도덕과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청소기나 걸레질만으론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더럽혀진 화장실. 창세기의 저자는 깔끔한 물청소를 꿈꿉니다.
300규빗의 길이와 50규빗의 너비, 30규빗의 높이를 가진 직사각 육면체의 모양을 상상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노아를 포함해 8명 정도로 추정되는 그의 가족이 134×22×13m 크기의 나무 배를 만드는 것과,
만들었다고 가정해도 이 면적 안에 지구상의 모든 동물의 암수를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류가 여호와의 명령에 지나치게 충실해 수많은 생물을 멸종시킨 오늘날에도 지구상에는
4000종 이상의 포유류, 8000종 이상의 조류, 1만 종 이상의 파충류가 있습니다.
양서류와 어류 혹은 곤충을 제외해도 2만 종 이상 되는 동물의 암수 두 쌍 씩을,
3개 층을 합쳐 봐야 8844제곱미터 남짓일 저 방주에 수납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동물 1마리당 허용되는 공간이 20제곱 센티미터 이하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정하지 않은 동물과 조류는 암수 7쌍 씩 실으라고 한 여호와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지킬 경우
동물 1마리에게 허용된 면적은 거의 2제곱 센티미터 이하로 줄어듭니다.
노아 가족의 생활공간, 저 동물들을 항해기간 동안 먹일 먹이를 보관할 공간까지 감안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직도 성경무오설과 문자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의 믿음이 초래한
문자 그대로의 ‘살인적 주거 밀집화’ 현상에 대한 그들의 해법이 궁금해 지긴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상상력을 발휘해, 이 과장된 신화가 담은 의미를 상상해 봅시다.
여호와가 직접 알려준 칫수대로 방주를 짓는다면 그것은 길쭉한 인간의 시신을 눕히는 관의 모양과 유사해 집니다.
갱생과 변화의 희망이 없는 절대 다수의 인류를 수장시킨 채 도도히 떠올라 도덕적 신인류가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관.
압도적 죽음 위에 정당성을 얻은 희귀한 새 생명.
역설적이게도 이는 후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혹은 부활 사건을,
혹은 14만 남짓한 이스라엘 민족만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교의 깐깐한 구원관을 예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당대 이스라엘 백성이 도달하기 원하는 도덕적, 신앙적 기준의 높이가 얼마나 높았으며,
나아가 그들이 가진 선민의식과 상대적 우월감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오래된 것이었는지도 보여 줍니다.
자신의 가족 외의 모든 인류가 죽을 것이라는 대재앙의 소식을 듣고, 다른 인류를 계몽시킬 노력 대신
차분히 초거대 규모의 조선 사업을 준행하는 노아의 냉정한 과단성은,
우리가 보기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라는 창세기 저자의 평가와는 좀 동떨어져 보입니다.
조금 더 뒤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 여호와에게 끈질기게 궤변을 늘어놓는 아브라함과 비교해도 그렇습니다.
방주 이야기는 파괴와 보존의 욕망이 공존하기에 생기는 억지스러움이 잘 묻어나죠 아무튼 비신자 입장에서 성경을 읽을 거면, 굳이 진화론이나 그런 반박을 신경쓰지 않고 읽는 게 제일 좋은 듯 그걸 내내 신경쓰면서 읽으면 피곤하기도 하고 또 결국 종교관에 얽메여 있는 거기도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