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또 유랑해 가게 하는 것은」



  병 나아

  기러기표 옥양목의

  새옷 새로 갈아 입고,

  눈멀었던 햇빛

  눈띄워

  내가 또 유랑해 가게 하는 것은

  내가 거짓말 안 한

  단 하나의 처녀 귀신이 나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문둥이 산(山) 바윗금 속에도 길을 내어

  그 눈이 또다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겨드랑에 옛 호수를 꺼내어 끼고

  아버지가 입고 가신 흰 두루마기 내음새로

  내가 또 유랑해 가게 하는 것은…….



- 『동천』(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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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의 시 가운데 「봄볕」이나 「정말」은 거짓말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그는 인간이 '거짓말 왕궁' 속에 든 존재이고, '정말'은 '어느 바다 속에나 갖다가/ 던져 버려' 두고 싶어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말년의 가령 「낙락장송의 솔잎송이들」이나 「메소포타미아(이라크) 신화를 읽고」 같은 짤막한 시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반복하지만 그의 이러한 인식은 반드시 부도덕에 대한 비판적인 서술 방식으로 말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위의 시의 내용은 전체적으로는 「칡꽃 위에 뻐꾸기 울 때」와 같이 도상(途上)에 선 존재로서의 인간을 주제로 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 이유를 '내가 거짓말 안 한/ 단 하나의 처녀 귀신이 나를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 포인트가 있다. 자신을 꿰뚫게 하고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신 같기도 하고 양심이나 진리 같기도 한 것을 '처녀 귀신'으로 치환한 것은 이것들이 지닌 어떤 진중한 느낌을 덜기 위한 것이다. 이 '처녀 귀신'은 같은 시집의 다른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여러 관념적인 여인상들과 연결되는데, 가령 「눈 오시는 날」에서 언급된 '천 년쯤 전에' 잠든 '내 연인'과도 동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